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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감사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설교 본문 / 마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세계적으로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고통과 환난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2021년의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매년 년중 행사로 성탄 감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무서운 것은 전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과거 역사상에 나타난 흑사병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사태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불안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대면 예배에 위기를 맞이했고 소위 영상 미디어를 통한 예배로의 전환은 그 정당성 논의는 논외로 하더라도 교회의 경제적 위기는 교회의 고통이 되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경제적인 위기와 더불어 찾아온 교회의 위기는 심각한 경제난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과거 애굽의 7년 대 환난의 때와 마찬가지일 가능성 앞에 불안과 공포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 이 시대의 불청객과 아픔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들의 신앙은 여전히 이러한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는 힘입니다. 과거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시대적 위기를 마녀에게로 돌리면서 무자비한 마녀사냥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시대의 무서운 공포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이것은 우리에게 심각하게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합니다. 이번 성탄 감사 예배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변을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내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류의 질문 많은 철학자는 존재의 근원에 관한 질문을 통해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언제나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은 신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그 신은 ‘초월해 있다’는 믿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현실 세계와는 다른 영원한 초월 세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믿었습니다. 그 초월 세계는 이 땅의 현실 세계와 구분하였습니다. 현실 세계에서의 인간 본성은 초월 신을 동경합니다. 모든 인간은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 신을 의지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인류에게 나타난 보편적 현상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조상은 오래 전부터 한 신을 믿었습니다. 그 신은 여호외라는 유일한 신이었습니다. 인간이 신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그 신이 먼저 인간에게 찾아왔서 믿는 신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신과 나눈 대화를 비롯하여 그 신과 만나는 방법, 그리고 이 땅의 존재에 대한 근원을 밝힌 문서를 남겼습니다. 그 문서들을 구분하여 이를 히브리어성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해진 그 문서인 히브리어 성경의 원본은 없고 사본들 뿐이었습니다. 원본을 필사한 사본들이었습니다. 그 문서들은 신이라는 여호와가 인간에게 내린 계시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문서의 히브리어 성경은 주전 1500년 전 부터 기록한 내용들이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 여러 문서인 사본들을 한 권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책, 성경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성경에 포함하는 문서들과 포함할 수 없는 문서들을 구분하여 하나의 거룩한 책으로 완성하였습니다. 히브리인을 조상으로 하는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히브리어 성경을 포함하여 소위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인 사도들이 기록한 문서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이를 신약성경이라 했고 히브리어 성경을 구약성경을 분류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가 믿는 구약성경에 해당된 히브리어 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구약성경에 해당된 히브러어성경에 기록된 여호와만 믿는 유대인들과 신약성경에 기록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는 믿는 하나님이 달랐습니다. 유대인이 믿는 신이 진짜인가, 그리스도가 믿는 신이 진짜인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습니다. 거룩한 책인 성경에 기록된 신이 진짜 신인지를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히브리인의 조상들이 오래동안 믿었고 그 믿음의 근거인 그 책에 기록된 신, 그리스도교가 믿는 그 신이 진짜 신이 내린 문서인지를 누가 증명해 주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그 문서들은 인간이 감히 경험할 수 없는 시간 세계의 시작인 태초에 대한 창조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러한 문서들이 진정한 신의 계시임을 누가 증명해 줄 수 있습니까? 증명해 줄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문서는 유일한 여호와라는 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후대의 문서들에서는 그 여호와의 아들이 등장합니다. 그 아들 역시 신인지, 단순히 신을 대리한 예언자인지에 대한 논쟁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문제가 되어 싸웠습니다. 인간이 신에 대한 문제를 놓고 죽음을 담보로 피를 흘리는 전쟁도 있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를 이 땅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2. 신의 계시로 믿는 성경 천사가 이 땅에 내려와 여성과 성적인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은 등의 이야기를 기록한 ‘에녹서’ 같은 문서들은 성경으로 취급되지 못했습니다. 신의 계시인 거룩한 책 성경에 포함할 수 없는 내용은 제외하였습니다. 종합하여 한 권의 책으로 정형화하여 확정하였습니다. 이 책을 우리는 성경이라고 합니다. 이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합니다. 이 성경을 신적 권위를 갖는 책으로 여깁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책을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믿습니다. 내가 신이 아닌 이상 내가 이 성경이 신의 계시하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문서들이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대전제는 성경이 권위가 있는 신의 계시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즉 여호와가 참 신이시며, 초월해 계신 여호와이시며,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 인간을 지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거룩한 책인 성경을 신의 계시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들의 신앙이 불가능합니다. 존재의 근원이 바로 이 성경을 통해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초월해 계신 신은 유일한 신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그 어떤 의견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신이 여럿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문서들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합니다. 그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신의 계시를 담고 있는 내용에 예언되고 약속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에 따라온 칭호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예언자인 인간인가, 아니면 신과 동일한 분이신가 하는 문제로 엄청난 혼란이 임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의 주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방지역인 로마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많은 핍박 속에서도 교회는 성장하였습니다. 로마를 통일한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통치하는 그 시대는 그리스도인이 전체 인구의 50% 정도였습니다. 이 황제는 주후 313년에 기독교를 인정합니다. 이를 기독교가 공인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문제로 서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황제는 주후 325년에 로마에 있는 모든 주교를 로마 니케아에 모이게 하여 예수의 신성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성부와 성자에 대해 정리한 교리가 ‘니케아 신조’라고 합니다. 이때 아들이신 성자는 ‘피조 된 것이 아니시며’, 성부와 성자는 ‘동일실체’라고 정리하여 교리로 확정하였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온 땅과 만물을 창조하신 한 하나님이시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조에 대한 전체 내용 중에 성자에 관한 내용이 절반을 차지합니다. 성자는 ‘출생하시되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라는 내용을 교리로 채택했습니다. 여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라는 말은 ‘피조물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성자는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나신 이로써 아버지와 ‘동일실체적’이시라고 했습니다. 동일실체는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라는 관점이었습니다. 니케아 신조는 이와 반대되는 내용, 즉 성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자들을 이단으로 파면했습니다. 그리고 이 신조에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에게 “공교회요, 사도적 교회가 선포하노니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3. 성령으로 잉태되어 영원히 나신 예수 그리스도 첫째,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출생하셨습니다(18-20). 본문으로 돌아가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합니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니케아 신조에 나타난 성부와 성자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시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한 하나님을 믿사오며,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아버지에게서 나신 이로써(독생자시요, 아버지의 실체에서 나신 이로써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이요), 빛에서 나신 분이시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신데, 출생하시되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아버지와 동일실체시니(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고,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구원하시고자 내려오셔서 성육신하시고 인간이 되셨나이다. ….) 니케아 신조 이후 성자에 대한 신성 문제가 정리되자 성령에 대한 이단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성령에 대한 교리는 니케아 신조 이후 주후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확정됩니다. 이 신조에서는 “우리는 성령을 믿사옵니다”, “또 (우리는) 주권자이시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성령을 믿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받으시고, 함께 영광을 받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우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성령을 믿습니다)”라는 내용이 추가되어 확정되었습니다. 마태는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출생하였음을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하여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죽음을 통해 유대인의 뜻이 이루어지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였습니다. 둘째, 예수는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21-23). 본문 21~23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탄생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21). 예수의 탄생은 이미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습니다(22). 그 예언은 23절입니다. 다 함께 23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함께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은 함께 해 주십니다. 이사야 41: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은 성령이 역사했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주로 고백했다는 것은 영원 전에 나를 선택해 주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나를 굳세게 하고 도와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도와주시되 오른손, 즉 능력의 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셋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셨습니다(24-25). 본문 24절에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정통교회의 중요한 교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둘째, 성육신 교리입니다. 여기에 종교개혁자들은 세번째로 이신득의(以信得義), 즉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며,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확정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오늘날 우리가 붙들고 믿어야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이는 이단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삼위일체를 믿는다면 성육신을 믿습니다. 성육신을 믿는다면 삼위일체를 믿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어야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4. 교훈과 적용 성탄 기념 감사 예배는 바로 이러한 신앙을 고백하며, 이를 확인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으려면,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사랑과 축복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는 내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전혀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대신하고,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도록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막 2:17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빌 4:6~7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들이 좌절과 절망으로 가득하면 안 됩니다. 될 일도 안될 것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다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요 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그 어떠한 고난의 언덕도 넘을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시며,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묵상하며 승리하면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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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어제와 오늘(6) 조선신학교의 직영 인준과 취소역사는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고 한국에 주재한 해외 4개의 선교부 선교사들은 강력히 항의 하며 반대했다. 선교사들은 1939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자진 폐쇄했다.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 이전에 일제의 핍박은 극에 달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본국으로 출국했으며, 남궁혁, 박형룡, 박윤선 박사 등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모두 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일제의 외국인 선교사들의 강제 출국지시로 한국교회를 지킬 수 있는 선교사들도 없었고 한국인 보수신학자들도 없었다. 그동안 보수주의 신학의 위세에 눌려 뜻을 펴지 못하고 있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신학교의 설립 명분을 찾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김재준 박사였다. 그는 일찍 일본 청산학원을 나와 도미, 1929년에 프린스턴신학교를 수학했으며 1932년 미국 웨스턴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 1933년 이후 산정현교회, 오윤선 장로, 조만식 장로가 세운 숭인상업학교에서 교목 및 교사가 되어 가르쳤다. 그는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로 들어가지 못하고 중학교 교사로 있었던 그는 평양신학교 폐교와 함께 신학교는 서울에 있어야 한다면서 “한국의 신학교육은 한국인에 의해서”라는 자치권을 명분으로 내세워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1939년 3월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 13명이 서울에서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를 조직하고 학교 설립 추진 작업을 송창근 박사에게 일임하고 있었을 때 백방으로 독지가를 물색하던 중,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와 제휴되어 쾌히 학교의 재단 설정을 위해 거액의 재산을 희사하기로 하고 설립재단과 운영비로 30만 원 상당의 부동산과 헌금을 내놓았다(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새역사 50년사」, 59.). 김대현 장로는 1893년 경북 영일 태생으로 어릴 때 유교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여생을 주로 교육 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부동산 소개업에 종사하면서 승동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으며, 1923년에 장로 장립을 받았다. 서울에 세우기로 했던 조선신학교는 당시 서북 교계 지도자들이 평양신학교를 평양에다 재건키로 함으로써 본래의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신학 노선에 대한 쟁점 때문이었다. 서울에 조선신학교 설립을 추진하던 위원이 아빙돈 주석 사건에 관여했던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등등의 인사들이었기에 교계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설립위원장으로 있던 채필근은 평양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게 되자 평양신학교로 가버렸다. 총회는 후 평양신학교를 총독부 인가를 받게 하고 총회 지정신학교로 결정하였다. 조선신학교는 겨우 경기도지사의 사설 강습소 인가만 받아 1940년 4월 19일 조선신학원으로 개교하였다. 이때 송창근은 일제 경찰의 강압으로 신학원 일을 볼 수 없게 되자 김대현 장로가 부득불 신학원장이 되었다. 제28회 총회에서 서울에다 신학교 설립 허락을 받은 서울 조선신학원 기성회는 제29회 총회에 올린 신학교의 목적을 “장로회 목사 양성”에 두었으나 평양신학교 측의 반대로 “장로회 교역자 양성”으로 수정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제29회 총회는 “신학교육부 부장 조희염 씨가 여좌히 보고함에 조선신학원 보고 중 ‘장로회 목사 양성’을 ‘장로회 교역자 양성’으로 개정하고 채용하기로 가결”하였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9회 총회 회의록」(1940), 42.). 제29회 총회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신학원 함태영 이사장 이름으로 총회에 보고된 조선신학원 설립에 관한 보고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8회에서 조선신학교 설립 경영의 인정을 얻고 그 설립위원으로 승인을 받은 설립 기성회 실행위원 13명은 이사회를 조직하여 그 설립 사무를 일임한바 이사회에서는 경기도 지사의 인가를 얻어 신학 전 과목을 교수하여 장로회 교역자를 양성하는 조선신학원을 설립”을 보고하였다. 조선예수교 장로회 조선신학원 일람에 설립목적은 “본 학원은 복음적 신앙에 기(基)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충양유위(忠良有 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하였다. 조선신학교의 설립목적은 우선 민족을 위한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충성스럽고 나라(일본)를 위하는 일본 교역자 양성이 목적이었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앞장서는 신도주의 교회사(敎悔師) 양성이 그 목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를 이어받은 한국기독교 장로회 한신대학교는 「한신대학 50년사」(1990)에서 조선신학교 설립목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복음적 신앙에 기초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현 조선교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함.”(「한신대학 50년사」, 13) 이것은 객관적 사실의 역사 기록과 거리가 먼 역사 날조에 불과하다(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본문과 현장 사이, 2000), 303-313). 이사장 함태형 목사가 총회에 보고하여 총회록에 실린 조선신학교원의 설립목적은 “충양유위(忠良有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신대학 50년사」는 이것을 “현 조선교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교역자 양성”으로 바꾸었다(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29회 총회 회의록」(1940), 42-45). 조선신학원의 첫 학원장에 김대현 장로가 취임했다(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9회 회의록」(1954), 44.). 1943년 첫 학기는 감리교신학교 교사에서 양교 합동으로 학업을 실시했다. 일제의 요구에 따라 양교의 병합이 추진되었으나 1943년 5월에 원상으로 회복되었다. 이어서 김재준 교수의 원장 취임과 더불어 일본인 미야우찌 아끼라가 교수로 취임했다. 전임강사로 한국인 전성천, 강자회, 유호준, 일본인 하나무라 요시오(花村芳夫), 무라기시 세이유, 야먀구찌 다로 등이 가르쳤다(“한국신학대학 35년의 발자취”, 「신학연구」16(1975), 335.). 학생들은 학도 동원령에 따라 1945년 4월에서 광복까지 전교생이 평양 선교리 소재 종연화학 공장에서 일제를 위한 노동을 제공했다. 조선신학교는 1942년 3월 31일 제1회로 11명 배출을 포함해서 1945년 해방 전까지 4회에 걸쳐 9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호헌사」(1959), 97.) 해방 직후 조선신학교는 한국에서 유일한 신학교육 기관으로 되어 있었다. 평양신학교, 봉천신학교 등은 공산지역에 들었으므로 말할 것도 없었고, 감리교신학교, 서울신학교(성결교) 등도 다시 개교하기에는 상당한 정비기간을 요구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 만주, 중국, 일본 등지의 각양 신학교육 기관에 재학 중이던 신학생들이 조선신학교에 모여들어 학생이 360여 명에 달했다(한국기독교장로회, 「韓國基督敎長老敎會 十五年 略史」(1965), 31.). 조선신학교는 광복 후 미 군정청으로부터 학교 인가를 받았다. 교장 김재준, 전임강사 송창근, 한경직이 취임했다. 1946년 3월에 송창근이 교장직에 취임했고, 한경직, 최윤관, 서고도(William Scott)가 전임 교수로, 전성천, 정대위, 조선출, 공덕귀, 이영회, 김관식, 김정준, 박봉랑, 차보은 등이 전임강사와 강사로 임명을 받았다. 1946년에 남부대회(제32회 총회)에 의해 장로교단 직영신학교로 인정을 받았고, 1947년에 대학 인가를 받았다. 1946년에 학장으로 취임한 송창근 박사는 동란 중에 납북되었다. 함태영, 김관식, 오건영, 조희염, 김길창, 김영주, 김영철, 한경직, 윤인구 등이 이사와 강사로 활약했다(김재준, 「한국신학대학의 역사적 위치」(한국신학대학보) 3(1957), 5.). 채필근은 이 학교 초창기에 교수로 일하다가 얼마 후 평양신학교의 교장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선신학교는 1951년에 한국신학대학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조선신학교는 해방 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2회 총회로 기록된 1946년 남부총회에서 총회의 직영신학교로 인준을 받았다. 제36회 총회가 1950년 4월 21일 대구제일교회에서 회집되었다. 이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총회 직영 취소와 총회신학교가 설립을 승인받는 총회였다. 남산 장로회신학교는 조선신학교의 직영 취소를 전제로 함께 취소하기로 하고 새로운 단일 총회 직영신학교인 총회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 측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무장 경찰관까지 동원되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조선신학교 측의 강원룡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동창생들과 총대들의 폭력과 난투극으로 총회가 수라장이 되었고 무장경찰 관의 출동으로 제지하고서야 평정되는 사태까지 오고 말았다. 제36회 총회는 임원 개선도 하지 못한 총회는 비상 정회를 하고 말았다. 속회 총회는 1950년 9월 1일이었지만, 전쟁으로 인하여 정한 날짜에 속회하지 못하고 다음 해인 1951년 5월 25일에 제36회 총회가 부산중앙교회에서 모였다. 특별위원회는 6·25동란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신학교 문제가 지난번 총회 결의대로 실행할 수 없었음을 보고하고 각 노회의 수의는 거치지 말고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신학교를 신설하자는 안을 총회에 제출하여 가결하였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는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 직영신학교를 신설하기 위하여 과도이사를 총회에서 선정하되 과도이사는 각 노회 대표 2인과 각 선교회 대표로 한 신학 위원으로 하기로 가결하였다(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36회 회의록(1950), 105.). 총회는 신학교 문제 특별위원의 보고를 정식 제안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동 안을 거수 표결에 부친 바 53:3이라는 압도적인 표로 가결하였다(김양선, 「韓國基督敎解放 十年史」, 252) 가결 표수는 총회록에 기록되지 않음. 이렇게 하여 1952년 9월 18일 대구에서 새로운 총회신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새로 신설된 총회신학교의 교수진은 교장 : 감부열(甘富悅, Archibald Campbell) 선교사, 교수 : 박형룡, 한경직, 권세열, 명신홍, 김치선 등이었다. 필자는 이 부분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박형룡 박사는 신사참배 문제로 한국장로교회가 고난과 환난이 닥칠 때 주기철 목사와 다툰 후 일본을 거쳐 만주로 망명을 했다. 해방 후 고려신학교 학장으로 취임하는 계기로 입국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교장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장로회 총회의 목회자 양성은 사설신학교로는 안 된다는 소신에 따라 서울로 상경하여 남산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했다. 이 신학교 역시 사설신학교였다. 그러나 자신이 외국에 망명가 있는 동안 한국장로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신학교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며, 후 평양신학교, 조선신학교로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는 길을 목표로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결국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두 신학교의 직영이 취소되기 이전에는 전혀 다른 신학적 입장에 따른 두 개의 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둘 수 없었다. 남산 장로회신학교를 폐교하는 정면 승부를 걸어 조선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조선신학교의 총회 직영 취소에 성공했으며, 새로운 보수신학의 요람으로 총회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조선신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직영신학교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신학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절 총회직영신학로서 조선신학교는 총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제32회 총회(1946)부터 제36회 총회(1950) 때까지 총회 직영신학교였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총신대학교의 전신인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신학교 졸업생들은 총신대학교 졸업기수에서 제외되었다. 역사의 연혁에서도 제외되었다. 역사는 거짓이 없어야 하고 사실대로 기술해야 한다. 총신대학교가 교단 직영신학교이기 때문에 과거 평양신학교로부터 조선신학교를 포함하여 금년에 120주년이라는 계산이 니온다. 비록 조선신학교가 오늘날 총신대학교와 총회의 신학적 입장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오늘의 총회가 있기까지 그 총회의 직영신학교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음은 '남산 장로회신학교 편'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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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어제와 오늘(5) 후 평양신학교1938년 평양신학교가 스스로 학교 문을 닫은 다음 해인 1939년에 와서도 선교부가 신학교를 개교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평양과 서울에서 개교 또는 신설을 위한 움직임이 일게 되었다. 평양에서는 1939년 3월 3일에 총회 신학교육부가 평양 서문 밖 예배당에서 모여 회의를 하여 총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본부가 지난 3월 3일에 평양 서문밖예배당에 회집하여 현 신학교는 본 총회에서 직영키로 결의하고 기본금 50만 원을 모집키로 하였사오며, 현 신학교 인계 청원을 재 조선 4미션회와 선교연합공의회와 4미션 선교본부에 발송하였던바 남장로 미션 본부에서는 선교 연합공의회에 일임하겠다 하였사오며 캐나다 미션 본부에서는 조선총회가 경영함을 찬성하였사오며 재조선 캐나다 미션회에는 금번 총회 후에 토의하기로 보류하였다 하오며 선교사연합공의회에서는 인계할 수 없다 하였사오며 호주 미션 본부에서는 재조선 미션회 의견을 들은 후에 회답하겠다 하였사오며 호주 미션회에서는 신학교로서 8월 31일에 개학 통지를 받았으니 그 일은 다시 고려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제28회 총회 회의록」(1939), 65.)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28회 총회(1939)는 “① 현 신학교는 총회에서 직영하며 ② 기본금 50만 원을 모금키로 한다”라고 결의하였다. 이 같은 내용을 네 선교부에 청원하였으나 선교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유는 신사 참배한 장로회 총회에 신학교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총회 신학교육부 부장 김선환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8회 총회(1939년)에서 “현 신학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로 본 총회와 선교회가 협동 경영하여 오던바 선교회가 만 1개년이나 자의로 개교치 아니하고 또 연기하오니 본 총회가 직영으로 금추에는 당연히 개교하실 일”(제28회 총회록, 66.)이라고 보고하여 총회가 허락하였다. 총회 결의에 따라 1939년 10월 17일에 (후) 평양신학교 설립 신청을 평남도청에 제출하였고, 1940년 2월 9일 자로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해 준 것에 대한 답례와 같은 인상이 짙다. 1940년 4월 11일에 신학교를 개교하고 이 신학교를 ‘후 평양신학교’라 칭하기도 하고, “전 평양신학교”로 칭하고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9회 총회의록」(1940), 45).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작년(1939년) 총회 결의로 평양신학교를 설립고자 인가신청을 소화 14년(1939년) 10월 17일에 평남도청에 제출하였던바 본년 2월 9일부로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서 동 4월 11일에 개교식을 거행하였사오며.”라고 보고한다(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9회 총회 회의록」, 45).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평양장로회신학교는 스스로 문을 닫은 이후 총회가 중심이 된 후 평양신학교는 1940년 2월 9일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1940년 4월 11일에 개교한 신학교는 채필근이 교장으로 한 후 평양신학교이다. 합동 측 총회 신학교인 총신대학교는 바로 1901년에 설립되어 1938년에 스스로 문을 닫은 평양신학교와 1940년에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다시 조선총독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한 후 평양신학교(교장 채필근 목사)를 그 역사적인 뿌리로 하고 있다. 그러나 후 평양신학교의 부끄러운 역사 때문에 총신대학교의 역사적 뿌리에서 이를 제외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된 시기의 조선신학교는 총신대학교의 역사적 뿌리에서 제외했다. 선교부가 전 장로회신학교의 건물과 시설들을 넘겨주지 않음으로 임시교사로 최억태 씨가 소유한 옛 동덕학교 교사를 사용하다가 1940년 가을부터 마포기념관과 서문밖교회의 아래층을 사용하였다 “작년 총회 결의로 평양신학교를 설립코자 인가신청을 소화 14년(1939년) 10월 17일에 평남도청에 제출하였던바 본년(1940) 2월 9일부터로 조선 총독의 인가를 받아서 동 4월 11일에 개교식을 거행하였사오매 인가받기 전에 재래 신학생의 사정을 고려하여서 소화 14년(1939) 10월 25일부터 익년 3월 9일까지 사경반 형식으로 교수하여서 9명에게 졸업증서를 수여하였사오며 임시교사는 최악 태 씨의 소유인 전 동덕학교 교사를 사용하다가 금추기 부터 마포기념관과 서문 외 교회 하층을 임시교사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9회 총회 회의록」(1940), 45). 1940년 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자는 9명으로 김용국, 김성규, 고봉윤, 소연수, 유동만, 조상원, 이정현, 이순도, 조상필 등이다. 이들은 후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이면서 평양신학교 제34회(1939)에 이어 35회가 되었다. 후 평양신학교는 1949년 제44회에 29명의 졸업으로 평양신학교 이름으로 졸업은 종결되었다. 후 평양신학교는 채필근이 교장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전 평양신학교가 문 닫은 것과는 달리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의 뜻에 따라 일제 조선총독부의 인가로 복교된 학교이기 때문에 친일적인 성향이 농후할 수밖에 없었다(김인수, “일제 말기의 기독교 탄압과 교회의 이용에 대한 소고”, 교회와 신학」 19 (장로회신학대학교, 1987), 246.) 후 평양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출발하여 일본 황도정신(皇道精神)에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공산주의에 이용되어 마침내 사멸되었다.”(김양선 「韓國基督敎解放 十年史」, 195) 1940년에 세워진(복교) 후 평양신학교(교장 채필근)는 해방을 맞이한 1945년 12월 1일에 이북에 있는 5도를 중심으로 연합 노회를 구성하여 총회를 대리하게 하고(남쪽은 남부총회) 이 연합 노회에서 후 평양신학교를 직영하기로 하고 김인서 목사를 교장으로 세웠다. 해방과 함께 북한지역에 찾아온 것은 해방의 해 8월 20일 소련군이 원산에 상륙하였고 24일 그들은 마침내 평양에 진주하였다. 소련군은 8월 26일 정치 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입회하에 민족진영과 공산 진영을 같은 비율로 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나아가 “5도 인민위원회”를 장악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1946년 11월 3일 공산당 정부수립의 골격인 입법부 구성을 목적으로 도ㆍ시ㆍ군 인민위원회 선거가 치러졌다. 김윤찬 목사 등 여러 목회자가 ‘평양 신앙동지회’를 구성하고 이 이름으로 인민위원회 선거에 대항했다. 이때 동지회가 결의한 내용은 “우리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평양을 사수한다. 우리는 신앙을 위하여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성을 위하여 이 작은 몸을 주님의 제단에 바치기로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1947년 1월에 후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이성휘 목사가 취임했다. 당시 북한에 두 곳의 신학교가 있었는데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와 감리회 계통의 성화신학교였다. 1948년에 공산정권은 어용단체인 기독교연맹을 발족하였는데 1949년 겨울방학 이후 평양신학교를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기독연맹 서기인 조택수 목사는 평양신학교 현관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걸어놓고 신학생들에게 사상교육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1학년에 재학하여 수업을 받는 신학생 중에 이종겸(성북교회 원로 목사), 이규일(장충교회 원로 목사)은 계속 수업할 수 없어서 수업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북한에 들어선 공산정권은 두 개의 신학교를 합병하여 공산 정책을 따르는 120명을 제외한 600명 정도를 중도 하차시키고 말았다. 이때(1950년 봄)의 교장은 기독연맹 부위원장이었던 김응순 목사가 되었다(김요나,「총신90년사」, 290-191). 이렇게 하여 1901년에 세워진 평양신학교는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가 있자 선교사들이 폐쇄하게 되자 1940년에 신사참배를 결정한 장로회 총회(친일 인사들이 중심)가 다시 복교시켰다. 그 후 “후 평양신학교는 1950년 봄에 그 종말을 보게 되었다. 후 평양신학교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자체적으로 설립하여 운영한 직영신학교이다. 이 신학교는 총회가 설립한 신학교이지만 평양장로회신학교와 오늘날 총신대학교의 설립이념인 신학적 입장이 다른 신학교이다. 현재 졸업기수로 후 평양신학교 제1회(1940)에서 제10회(1949)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총신대학교의 역사에서는 후 평양신학교를 배제했다. 이 신학교는 이미 평양신학교 교수인 선교사들과 참여했던 한국인 교수들은 다 강제 출국 및 망명으로 일본이나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유주의자들이 주관한 신학교였다. 특히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답례로 인가한 후 평양신학교는 평양장로회신학교와 현 총신대학교의 신학적 정체성을 유지ㆍ계승할 수 없는 신학교이다. 후 평양신학교가 오늘날 총회를 계승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설립한 직영신학교였다는 점에서 총회와 총신대학교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계승한 신학교로 삼기에는 부담이 된다. 그래서 총신대학교의 역사에서 후 평양신학교의 흔적 지우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후 평양신학교 역시 총신의 전체 졸업 기수에 포함하여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으니 딜레마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 후 평양신학교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싶다. 한국에 주재한 외국 선교부는 한국교회의 독립된 자치권을 위해 외국 선교본부의 승인으로 독립된 독노회를 설립했다. 소위 네비우스 선교 정책 가운데 자치권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에 대한 자치권을 한국교회에 넘기지 않았다. 한국 주재 각 선교부가 직접 평양신학교를 운영했다. 이 신학교를 조선총독부로부터 일본 민사령에 의해 ‘재단법인 재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유지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각 선교부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는 이유로 신학교와 재단을 한국교회에 넘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폐쇄해 버렸다. 신학교와 신학교 재산을 한국교회인 총회에 귀속시킬 수 없다는 의지가 강했다. 이 시기는 적어도 보수적인 신학자인 남궁혁, 박형룡, 박윤선 등은 총회가 신사참배를 하기 전에 이미 망명으로 한국에는 없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자치적으로 신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길이 없어져 버렸다. 이제 총회는 일제에 아부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사람들이 조선총독부에 신학교 설립 허락을 받아 최초로 한국교회 자치권에 의해 운영된 신학교가 바로 후 평양신학교였다. 이 신학교는 그동안 유지해 온 평양장로회신학교의 보수적인 신학과는 정반대의 신학적 입장을 갖고 있는 자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총신대학교는 이 후 평양신학교가 교단 신학의 정통성에 반한 신학교로 평가한다. 엄연히 총회가 결의하여 운영한 교단신학교를 역사에서 삭제 또는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은 모순이다. 평양신학교와 남산 장로회신학교가 폐쇄됐다. 그리고 새로운 총회신학교를 설립했다. 총회신학교가 교단에서 운영한 신학교이기 때문에 평양신학교를 계승한 학교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떤 신학교는 배제하고 어떤 신학교는 계승한다고 하는 이 모순적인 딜레마를 안고 지금 총회(합동)와 총신대학교는 운영되고 있다.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조선신학교 편’ 소재열 목사(한국교회법연구소, 한국교회사 Ph.D.,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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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어제와 오늘(4) 신사참배와 평양장로회신학교 폐쇄오늘날 총신대학교(합동)와 장로회신학대학교(통합)는 같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뿌리로 하고 있다. 이 신학교는 1901년에 선교사 공의회의 결정으로 마포삼열 선교사 자택에서 시작하였다. 따라서 총신대학교 120주년 기념은 1901년으로 시작한다. 이런 이유로 총신대학교의 역사적인 과거의 발자취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선교사 공의회와 마포삼열 선교사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46년간 한국에서 사역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32년이다. 총신대학교의 120주년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선교사들이 설립한 일반 학교나 신학교는 나름대로 설립목적을 갖고 있었다. 설립이념은 학교와 신학교의 주인이 되어 영속적(永續的)으로 유지된다. 설립이념에서 의도한 대로 기독교의 진리와 자유를 심는 교육의 질은 높이 평가되었다. 근대적인 교육 형식과 질에 있어서 근대적인 지식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기독교 학교를 통해 국민 계몽과 민족 운영에 앞장섰다. 남녀계급의 평등사상과 기독교적 가치관을 심어 개인적인 영달보다 민족과 이웃을 위한 희생과 헌신, 봉사의 정신을 함양하였다. 망국의 한에 눌린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는 교육은 고난에 동참하는 역동적인 사람으로 개조되어 가고 있었다. 새로운 학문과 민주주의적 교육으로 민주적 이념을 형성하는데 이르렀다. 특히 신학교육은 높은 수준의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의 청교도적 신학과 교리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자리매김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기독교를 방치할 수 없었다. 일제는 민족주의적 교육 탄압, 일본에 충성하는 신민양성, 한국인의 우민화를 시도하였다. 이는 교회와 기독교 학교와의 갈등을 가져왔으며,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영역이 되고 말았다. 1930년대 일본과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의 귀국으로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신학 논쟁은 필연적이었다. 한 예로 한국 선교 50주년이 되는 희년의 해인 1934년에 일어났던 모세오경의 저작 부인 등은 모두 자유주의 신학의 발흥이었으며, 일제와 밀월관계를 갖고 있었다. 결국 평양장로회신학교 역시 1938년에 이르러 큰 위기가 닥쳐왔다. 그것은 곧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한 폭거였다. 평양신학교를 운영하는 선교회와 선교사들은 이를 신사참배를 허용할 수 없었다. 일제는 1911년부터 조선교육령(칙령 229호) 제2조에 “충량한 국민을 육성함이라고 못 박아 일본 국민으로 만드는 민족말살정책을 처음부터 천명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탄한 후에 간헐적으로 행한 신사참배 강요는 1932년부터 더욱 악랄하게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일본은 점차 군국주의화하여 그들의 종교 행사인 신사참배를 조선의 학교와 교회 등에 강요하였다. 전남 광주의 남장로회선교부의 기독교 학교 두 곳이 그 시발점이 되었다. 평양 역시 춘기 황량제에 당국은 국민의례라고 하여 참석하라고 요구하였지만 이를 거부했다. 1932년 제21회 총회에서는 교단 소속 학교 학생이 신사 및 여러 제식에 참배할 수 없다고 못 받으며 총독부와 당국에 교섭할 것을 결의하여 교섭위원으로 마포삼열 선교사를 포함하여 3인을 선정하였다. 결국 총회의 뜻을 관철하지 못하고 해당 학교의 신앙 양심에 따라 결정하게 되었다. 미국 북장로회 한국 선교부는 1936년 6월 25일부터 7월 2일까지의 연례회의에서 ‘교육 철수 권고안’을 69:16으로 가결하였다. 기독교 학교의 설립목적과 이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철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학교 폐쇄로 학생들의 진로 문제로 일부는 반대하기도 했다. 1938년 4월 18일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실행위원회(위원장 노해리)의 모임에서 서면으로 투표하여 5월 2일 개표한 결과 62:33으로 다수가 폐교로 결정하였다. 그해 6월에 소집된 북장로회 한국 선교부의 연례회의에서 “선교사들은 교육에서 철수한다”라는 원칙을 재확인하였다. 미국 남장로회 한국 선교부 역시 1937년 2월 전주에서 선교부 임시총회를 소집하고 신사참배 문제를 토론하고 “기독교 교리가 바뀌지 않는 한 한국에서 경영하는 학교를 폐쇄하기로 가결”하고 이를 성명서로 발표하였다. 신사참배가 더욱 심해지자 남장로회 산하 전주의 신흥, 기전, 군산의 영명, 멜볼딘, 목포의 영흥, 정명, 광주의 숭일, 수피아, 순천의 매산, 매산 여학교가 폐쇄되었다. 호주장로교회는 1936년 2월 7일 마산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고 천황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사와 국가적인 기념식에는 참석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므로 관할 학생들의 참배를 불허한다고 결정하였다. 동래의 일신, 마산의 의신, 호신, 명덕, 진주의 시원여학교가 폐쇄되었다. 1931년 9월 주기철 목사를 중심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하기로 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1회 총회(1931.9.)는 평양 창동교회당에서 회집되어 신사참배를 반대하기로 결의하고 총독부와 교섭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제24회 총회(1935)에서는 7인 연구위원을 선정하여 신사참배 문제에 관해 연구하여 보고하게 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한국교회를 회유하고 탄압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런 탄압에 못 이겨 평북노회가 1938년 2월 9일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그해 9월에 개최된 총회 이전까지 전국 23개 노회 중에서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로 돌아섰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 9.)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전국의 23개 노회 총대들에게 가결하는 편을 들 것을 미리 주지시켰다. 신사참배에 반대한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등은 미리 구금시켰다. 평양경찰서는 신사참배 가결안 각본을 세워 총대들에게 전달하고 동의까지 받았다. 제27회 총회가 1938년 9월 소집을 앞둔 8월에 의성경찰서에 수감 후 대구교도소에서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1939) 2월에 평양으로 돌아왔으나 8월에 다시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9년 10월에 개최된 평양노회 정기회에서 형무소에 주기철 목사를 찾아가 권고 사면을 권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권고 사면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평양노회는 주기철 목사의 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1939년 12월 19일에 임시회를 소집하였다. 일각에서는 임시회에서 면직처분을 받았다고 주장하나 이는 법리 오해였다. 면직처분이 아니라 권고 사면을 권고사직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권징재판이 아닌 행정처결이었다(이 부분은 추후 논문으로 발표함). 교회헌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당시 역사적인 사실이 왜곡될 수 있다. 그의 복권 결의는 한국교회의 최대의 실수였다. 1921년에 평남노회에서 평양노회, 평서노회, 안주노회로 분립되었는데 이 세 노회가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위한 안건 청원자와 동의자, 재청자가 되었다. 총회 첫째 날 임원선거는 회장 홍택기, 부회장 김길창, 서기 관진근, 부서기 조택수, 회록서기 권택희, 회록 부서기 전재호, 회계 고한규, 부회계 이춘섭을 선출했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위해 평양노회장 박응률이 제안하고, 평서노회장 박임현이 동의하고, 안주노회장 길인섭이 재청하게 되어 있었다. 회의장은 삼엄한 경찰들이 배치되어 총회 이튿날 회의 때 신사참배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가’를 묻고 나서 10여 명만 ‘예’라고 대답했는데 ‘부’를 묻지 않고 가결을 공포하였다. 찬반 표결을 붙이지 않기로 하전에 공모한 것이었다. 이때 공포 내용도 사전에 준비하였다. 그 내용은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이행하고 따라서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이라고 하였다(제27회 총회 회록, 9.). 신사참배가 가결된 후 심의현 목사가 신사참배 실행을 위한 특별청원으로 부총회장 김길창의 인솔로 23개 노회의 대표들이 함께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와 계속 총회 회무를 진행하였다. 장로교의 유일한 교역자 양성기관인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교수들 사이에도 의견이 나뉘었다. 남궁혁, 박형룡, 이성휘 교수는 반대하였으며, 채필근, 김관식은 학교와 교회는 분리해야 하고 종교는 문부성에서 신사는 내부성에서 관장하므로 신사참배를 종교적 행위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을 보였다. 평양장로회신학교는 주한 장로회선교부의 결의에 따라 1938년 1학기 수업을 마지막으로 자신 폐교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남궁혁, 박형룡 박사 등은 해외로 망명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일제가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를 탄압할 때 일본을 거쳐 만주로 갔다. 그는 일본에서 체류하는 동안 일본신학교에서 청강도 하면서「표준성경주석」집필에 몰두하였다. 1938년 8월에 일본으로 건너간 박형룡 박사는 약 4년 후 1941년 만주 봉천으로 가서 봉천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윤선 박사 역시 봉천신학교에서 1941년 4월부터 신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봉천신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참여한 신학교였다. 교장 정산인은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는 신사참배 예식에 참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는데, 박형룡 박사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당국과 사전에 묵계가 있었다. 신사 참배한 동료와 학생들에게 본인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며 강의한 박형룡 박사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는 역사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선교사들은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한 학교여서 학교를 폐쇄한 것이 아니라 일제가 조선교회와 총회를 강박하여 신사참배케 한 것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를 용납할 수 없어서 신학교를 폐쇄했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신사참배한 총회가 열리기 한달 전에 한국교회를 떠나 일본을 거쳐 만주로 갔다. 적어도 그때는 주기철 목사 등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투옥되기 시작한 때였다. 박형룡 박사는 평양신학교가 폐쇄되기도 전에 이 땅을 떠났다.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신사참배한 봉천신학교로 가서 그곳에서 둥지를 틀게 되었다. 일제는 한국에 주재한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1940년에 모든 선교사가 철수하였다. 그리고 이미 검속된 주기철 목사 등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투옥된 그들은 많은 고문을 당하였다. 선교사들이 전원 출국한 1940년 9월에는 300명 이상 한국교회 지도적 목회자들이 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교회의 지도자 공백은 침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전수된 복음적인 보수주의 지도자의 공백 상태가 되었다. 한국교회 미래가 암울했다. 박형룡 박사도 이러한 환난과 고난의 현장을 떠나 망명하고 말았다. 훗날 고신 측은 박형룡 박사의 이러한 형태의 태도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3회 총회(1924.9.13.)에서 평양신학교 보고에서 마포삼열 선교사가 교장직에서 사임하고 원로 교장으로 임명했다. 후임 교장으로 라부엘 선교사를 임명했다고 보고했다. 제14회 총회(1925)에서는 “본교 재단법인 인가를 엇은[얻은] 일이오며”라고 신학교육부 보고가 있었다. 이에 총회는 보고를 받았다. 평양신학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 재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유지재단’이 설립되었다. 평양신학교가 1922년에 신축한 교사는 재단법인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재산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법인을 설립하여 관리하였다. 1901년 선교사들과 미국 선교회 본부의 재원으로 설립된 평양장로회신학교는 당시 ‘재단법인 재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유지재단’인 법인을 구성하여 운영하였으며, 마포삼열 기념관 및 신학교 재산을 유지재단에 등록하여 관리하였다. 제27회 총회(1938. 9.)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양장로회신학교 폐교되므로 유지재단의 모든 재산이 조선총독부로 넘어 가버렸다. 소위 적산 재산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재산을 두고 선교사들은 강제 출국당한 것이다. 역사는 가정이 없지만, 가정해 본다면, 선교사들이 1940년에 강제 출국당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폐쇄하지 않았다면, 더불어 유지재단은 그대로 존속되었을까? 그러나 신학교를 폐쇄하자 유지재단의 재산이 조선총독부에 귀속되어 버렸고, 선교사들 역시 강제 출국당하고 말았다. 선교사들은 이런 상황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래저래 이는 한국장로교회의 아픈 역사임이 틀림없다. 총신대학교, 장신대학교 전신인 평양장로회신학교가 폐쇄되었다. 학교 재단이사회도, 재산도, 학생도, 교수도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말 그대로 소멸이다. 그러나 그 정신과 설립이념은 그대로 유지되고 계승되었다. 하지만 일부 계승된 신학교는 총신대학교 역사의 연혁에서 삭제했다. 역사란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분명한 역사적 사건을 취사선택하여 가위로 종이를 오리듯 역사를 오려 종이에 풀로 붙이는 가위와 풀의 역사는 안 된다. 총신대의 역사는 일부 왜곡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필자는 본고에서 다음과 같은 같이 평가한다. 일제의 한국교회 침탈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로 한국에 주재한 선교부는 유일한 목회자 양성신학교인 평양장로회신학교를 폐쇄하였다. 한국교회의 네비우스 선교 정책인 자전, 자급, 자치 중에 1907년은 교회의 자치권을 위해 7인의 목사를 안수하여 임직하므로 독립된 독노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가 교회의 자전, 자급, 자치는 이루었지만 그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운영에 있어서 자급과 자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학교 운영을 위한 많은 재원과 한국인의 신학자에 의해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못했다. 항상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개최할 때에 그 많은 경비 역시 한국교회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총회 회계는 선교사들이 맡았으며, 재정권을 갖고 있는 총회의 장소 선정은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따라서 평양신학교는 일제의 민사령에 의해 불교나 천주교보다 되늦게 법인 설립이 승인되었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는 장로교회를 견제하기도 했다. 목사가 될 신학생들을 양성할 자급과 자치가 한국교회의 능력 부족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평양장로회신학교 법인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넘기지 않았다. 총회와 별개로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는데 그 명칭 자체도 ‘재단법인 재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유지재단’이었다. 결국 마포삼열 선교사의 기념관도 신학교 교사와 관련 부속건물들 모두 적산재산이 되고 말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그 재산의 소유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평양신학교 교사가 서울이나 남한에 두었더라면 지금은 역사의 기록상으로만 존재한 역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과 운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마포삼열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 32년보다 더 긴 세월인 46년 동안 한국의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일제의 암살계획의 긴급 정보를 입수하고 미국으로 귀환하여 미국에서 지인의 창고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장신대학교는 마포삼열 선교사의 자료관은 물론 그의 자료집을 집대성하는 것은 물론 67년만에 그의 유해를 2006년에 미국에서 장신대학교 교정으로 이장하기까지 하여 그를 기념하며, 어떻게 이땅에 복음을 증거했고 목회자를 양성했는지를 기념하고 있다. 총신대학교는 역사상에 등장한 화려한 이야기는 채용하면서도 그외에 것들을 기념하는 일은 장신대학교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박형룡 박사를 영웅시 하면서도 박형룡 박사가 설립하고 후에 총회가 직영신학교로 인준한 남산 장로회신학교를 총신 전체 졸업회수에서 배제시키기까지 했다. 지금도 여전히 싸움질하는 총회와 총신대학교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싸우고 있으니. 과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총신대학교를 운영할만한 자급, 자치의 능력이 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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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기념, 어제와 오늘(3)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의 전후 역사적 배경오늘날 총신대학교(합동)와 장로회신학대학교(통합)는 같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뿌리로 하고 있다. 이 신학교는 1901년에 선교사 공의회의 결정으로 마포삼열 선교사 자택에서 시작하였다. 따라서 총신대학교 120주년 기념은 1901년으로 시작한다. 이런 이유로 총신대학교의 역사적인 과거의 발자취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선교사 공의회와 마포삼열 선교사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46년간 한국에서 사역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32년이다. 총신대학교의 120주년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선교사들의 한국선교의 중요한 핵심 전략 가운데 하나는 사경회를 통한 성경공부였다. 선교사들에게 사경회는 사역의 주요 버팀목이며, 교회를 부흥시키고 강화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런 형식의 사경회가 진행되면서 성경 공부를 하였는데 이 성경 공부는 성경의 각 권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형식을 통해 성경 공부와 더불어 구체적인 각론으로 신학반을 운영하였다. 신학반을 통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통해 성경과 신학 공부를 하였다. 1893년에 평양선교지부가 개설되면서 1894년부터 마포삼열 선교사 중심으로 평양 지역에 신학반이 조직되었다. 선교사들이 진행한 저녁 전도 집회에 통해 결신자와 결신자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믿는 자들에게 학습과 세례 문답을 통하여 모든 모욕과 박해를 견디고, 교회 건축과 운영을 위해 스스로 헌금했으며, 엄격하게 주일을 지키고, 속죄(贖罪)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한국교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게 하였다. 1898년 12월에는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한 신학반(神學班)은 100~200명이 참석하였다. 이들 중에 50명은 전체 선교지부에서 선발된 조사와 영수였다. 1899년 6~7월에는 20명에 대한 조사를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사경회가 평양선교지부에서 실시되었다. 지난 8년간 선교지부 전체에서 일어난 결과보다 더 많은 열매가 맺어지고 있었다. 이쯤 하여 평양선교지부는 세례교인이 1,000명이 넘었고, 학습 교인이 3,500명 이상이었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한국교회에 어울리는 학교를 계획하여 추진하였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1899. 6. 1. 12시 정각에 그레이엄 리 선교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가졌다(아내 앨리스 피시 마페트). 결혼식에 쓸 케이크를 미국에서 공수해 오기도 했다. 1900년에 이르러 선교사들은 자전(自傳), 자급(自給)에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자치(自治)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가 선교부로부터 독립한 자치를 위해 1900년에 2명인 소래교회 서경조와 평남 평양의 김종섭에게 안수하여 장로로 세웠다. 또한 공의회로부터 추가로 세 명에게 안수하여 장로를 세우는 문제를 허락받아 장대현교회 길선주와 방기창이 1901년 5월 15일 평양을 방문한 선교부 총무 브라운 목사에게 안수를 받았다. 선천교회 양전백은 1902년 2월로 안수받아 장로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장로에 대한 성경적인 자격 요건을 강조하고 가르쳤을 뿐 선출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한국인 교회 신자들에게 맡겼다. 1900년 선교사 공의회에서 목회자 후보생으로 2명을 관리하겠다고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 2명은 장로로 안수를 받아 현재 부목사 일을 하고 있는 김종섭 장로였으며, 다른 한 명은 아직 장로로 피택을 받았을 뿐 장로 안수를 받지 않는 방기창이었다. 방기창은 3년간 베어드(배위량) 선교사와 헌트 선교사의 지방 사역을 도운 조사이다. 선교사들은 이들이 목사안수를 받기 전에 몇 년간 교육 과정을 이수할 계획을 세웠다. 목사 안수는 그들이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여겨질 때 결정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한국교회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게 될 경우, 이들에게 전적인 책임과 특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의회는 장로로 안수받은 자 10여 명을 선발하여 공의회에서 투표권을 부여하고 나머지에는 발언하는 발언권, 즉 언권을 부여하기 위해 한국어 공의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한국인 목사에 의해 독립된 교회의 자치를 위한 노회가 출범할 때까지 노회에 들어갈 사람들을 훈련하였다. 그 결과 1901년부터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는 ‘영어로 쓰는 공의회’와 ‘조선어를 쓰는 공의회’(장로 3인, 조사 6인 참석)로 진행하였다. ‘조선어를 쓰는 공의회’는 독노회가 조직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선교사들은 “처리를 엄하지 않게 하는 것이 허약한 교회를 세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의 하나”라고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잘못한 자에게는 모든 친절과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어떤 죄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어떤 원칙이나 성경적 행동 기준을 타협해서도 안 된다”라고 하며 이 원칙을 지켜나갔다. 특히 제사, 일부다처제, 음주, 도박 등의 문제에 대해 높은 도덕적 기준과 확고한 견해를 밝히게 하여 강한 교회, 교회 지도자는 일반 교인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은 조선에 선교의 문을 여는 데 필요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진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교회설립보다 앞설 수 없으며, 뒤따라 가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은 교회와 선교를 위한 목적사업이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1892년에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할 무렵 국내에 외국 선교사들은 무려 40여 명이 육박했다. 1893년 1월 미국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사이에 장로회 정치형태를 보유하는 선교부끼리 ‘선교사공회’라는 협의기구를 구성하고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선교부와 캐나다장로회 선교부 등이 참여했다. 이렇게 되자 이듬해인 1893년 1월 28일에 선교사 공의회를 조직할 필요를 느껴 경성 빈톤 의사 집에 모여 영어를 사용한 ‘선교사 공의회’(宣敎師公議會)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는 1893~1900년 말까지 진행되었으며, 제1회 회장은 이눌선 선교사와 제8회를 끝으로 오웬 선교사가 회장이었다. 1901년 1월 28일 평양 선교부 선교사 공의회 평양위원회는 선교사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교회 자치(自治)를 준비하기 위한 하나로 목사 후보생 2인을 선발하여 교육하기로 하였다. 이 2인을 선발하기 위해 조사 2인의 문답을 시행하였다. 이 문답은 목사 후보생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렇게 하여 이 두 사람은 1901년 2월 6일 조선의 최초의 목사가 되기 위한 목사 후보생으로 선정하였다. 김종섭은 장로이면서 조사이며, 방기창은 장로 임직 이전의 피택장로(선출장로)였다(방기창은 1901. 5. 15.에 장로로 임직). 목사 후보생 문답 때 방기창은 아직 장로가 아닌 상태였다. 마포삼열 선교사와 베어드 선교사는 이들을 5년 동안 교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들이 만족할만한 교육을 받고 자격이 갖추어졌다고 생각할 경우, 공의회에 청원하여 목사로 안수하여 한국교회 자치를 위한 노회 조직을 위해 계획하고 있었다. 1901년 선교사 공의회는 신학교육위원회(Committee on Theological Education)를 선정했다. 그 이듬해(1902)에 위원회는 신학교육을 위한 5개년 교과과정을 제안했고, 이 제안이 1년 동안 임시로 받아들여졌다. 이 임시교과과정을 갖고서 평양공의위원회는 1903년부터 6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마포삼열 선교사가 「코리안 필드」(1903. 11.) 140~141페이지에서 1903년 6월 평양의 상황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공의회는 4명의 목사 후보생을 추가로 공의회 평양위원회의 관리하에 두도록 허락하여 총 6명의 목사 후보생이 탄생하였다. 6명의 목사 후보생은 5년 과정의 첫해인 1903년에 수업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해 1월, 4월, 7월에 세 학기가 개강하였다. 이는 여름과 겨울 정기 사경회에 출석하는 일과 함께 학생들에게 약 3개월간 강의가 제공되었다. 학생들은 나머지 시간에 스스로 공부하고 실제 현장에서 봉사하면서 보낸다. 6명 중 4명은 장로이며, 여기에 서경조 장로는 목사 후보생으로 허락받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교사, 조사, 또는 조력자의 직무를 감당했고 6-10년 동안 선교사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었다. 모두 한문 문헌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도록 해주는 한국 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7년에서 11년 동안 선교사들이 인도하는 사경회 참석하였다. 1903년 첫해 신학반은 조직신학과 소요리문답(모펫, 한국명: 마포삼열 박사), 구원론(베어드 박사, 한국명: 방위량), 유대 역사(스왈른 목사. 한국명:소안론), 설교학(리 목사, 한국명: 이길함), 마태복음과 고대사(헌트 목사, 한국명:한위렴), 모세오경 연구(베어드 박사와 스왈론 목사), 산수 수업(번하이젤 목사, 한국명:편하설) 등이었다. 1903년 12월 사경회로 모일 때 2년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양전백 장로는 33세로 1893년에 세례를 받았다. 김종섭 장로는 41세로 1895년에 세례를 받았다. 나이가 가장 많은 방기창 장로는 41세였다. 1895년에 세례를 받았다. 송인서 조사는 34세로 1895년에 세례를 받았다. 이기풍 조사는 35세로 1896년에 세례를 받았다. 길선주 장로는 34세로 1897년에 세례를 받았다. 길선주 장로는 거의 시각장애인이지만 뛰어난 설교자요 심오한 사상가이며 보기 드문 뛰어난 판단력과 영적인 감각을 갖춘 인물로 평가되었다. 전술한 대로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공의회를 조직하였다. 선교사들만의 공의회는 1893~1900년에 8회기에 걸쳐 운영하였으며, 북장로회 선교사와 남장로회 선교사가 교차적으로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이 선교사 공의회에서 장차 한국 장로교회의 자치를 위한 독립을 위해 목사를 세우기로 하고 먼저 목사 후보생을 2인과 추가로 4인을 합하여 6인을 승인하였다. 공의회 평양위원회는 목사 후보생을 선출하였는데 먼저는 1901년 2월 6일에 2인, 그 후 추가로 4인을 승인하였다. 미국 북장로회 헌법이나 그 헌법을 번역하여 사용한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은 신학생을 모집하여 교육한 후 목사 후보생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목사 후보생을 결정한 후에 신학 공부를 시킨다. 1901년 2월 6일은 선교사 공의회의 승인하에 공의회 평양위원회에서 목사 후보생을 심사하여 2인을 결정한 날이다. 공의회는 1903. 9. 8.에 평양장로회신학교(교장 마포삼열 선교사)가 승인되었다. 통합 측 장신대학교 “1901. 봄.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박사가 평양 대동문 옆 자택에서 방기창, 김종섭 두 학생으로 신학반을 시작하다.”라고 한다. 합동 측 총신대학교는 “1901. 5. 15. 대한예수교장로회 공의회가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의 설립을 결의함에 따라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 선교사 자택에서 본교의 전신인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가 개교되다.”라고 역사를 기록한다. 1901년 2월 6일에 목사 후보생 2인을 선정하였고, 1903년 1월부터 신학반이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목사 후보생은 2인으로 먼저 수업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6명이 함께 첫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그 해가 1903년 1월부터이다.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자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아니라 선교사 공의회였다. 인준 승인권이 공의회 평양위원회도 아니며, 평양위원회에 소속된 마포삼열 선교사도 아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공의회 승인하에 실무적으로 주도적으로 이를 시행한 선교사이다. 마치 숭실대학교 전신인 평양의 숭의학당이 베어드(방위량) 선교사가 설립한 것이 아니라 북장로회 평양선교지부가 설립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1905년에 처음으로 1903-4년과 다른 방식인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 동안 한 곳에 모여 집중적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첫 신학교 교사가 1908년 10월에 완공하였으므로 정식 건축된 교사가 없었다. 1906년에는 3학급(1학년 29명, 2학년 14명, 4학년 7명)으로 확대되었으며, 재학생 수는 50명이었다. 1907년은 75명이었으며, 한결같이 목사 후보생이었다. 이들은 조사. 장로, 영수 등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선교사 공의회 평양위원회가 주도적으로 출발했지만 1906년에 이르러서는 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캐나다장로회와 연합으로 학교를 운영하여 명실공히 한국 장로교회의 대표적 신학교로 성장했다. 1907. 6. 20. 제1회 졸업생으로 서경조, 방기창, 한석진, 양전백, 송인서, 길선주, 이기풍 등의 7명을 배출하였다. 조선에 독립된 노회가 설립되었는데 그 노회를 독노회라 한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그해 9월 17일에 조직되었다. 첫 졸업생 7명이 목사안수를 받음으로 노회적 성질인 목사와 장로로 노회가 성립되었다. 신학교의 공식 이름을 ‘조선장로회신학교’라고 하였다. 실로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선교하고 교회를 세운지 23년만에 한국에 한국인 목사와 장로 중심의 독립노회(독노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제 선교사들이 1890년 중국선교사 네비우스를 통해 한국 선교의 중요한 정책노선으로 네비우스 선교정책 중에 자치가 이루어진 역사적인 날이었다. 1908년 5월에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에 학교 교사(校舍)의 정초식을 하였고, 이어서 건물을 지었다. 2층 한옥이었다. 상층에는 기도실과 교사실 그리고 4, 5학년 강의실이 있었고, 하층에는 1, 2, 3학년 강의실과 물건을 넣어두는 저장고가 있었다. 그리고 기숙사가 여러 동 있었는데, 4개 선교부가 각각 건축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호주 장로회, 미국 남장로회와 북 장로회, 그리고 캐나다장로회가 각각 기숙사를 지었다. 교사건축과 기숙사(2동) 건축을 위하여 미국 시카고에서 사는 매코믹 여사가 재정지원을 하였다. 늘어나는 학생들을 수용하고 새로운 현대시설의 교사가 필요함에 따라 1921년 9월 21일 옛 교사(校舍)를 헐고 새 교사를 짓기 시작했다. 1922년 5월 12일에 머릿돌을 놓았고, 9월 27일에 헌당식을 하였다. 새로 지은 교사의 시설이 매우 만족스러웠고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붉은 벽돌 3층 건물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4회 총회(1925)에서는 "본교 재단법인 인가를 엇은[얻은] 일이오며"라고 신학교육부 보고가 있었다. 이에 총회는 보고를 받았다. 평양신학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 재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유지재단’이 설립되었다. 평양신학교가 1922년에 신축한 교사는 재단법인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재산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법인을 설립하여 마포삼열 기념관 및 신학교 재산을 유지재단에 등록하여 관리하였다. 1925년 10월 30일 제1대 교장인 마포삼열 션교사가 사임했다. 제2대 교장 라부열의 취임했다. 1925년부터 가을부터 졸업생인 남궁혁(제15회 춘기 졸업생) 교수가 한국인 최초의 조교수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1926년 김선두 목사에 이어 박형룡 교수가 1928년 봄학기에 임시 교수로 취임하여 총회의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기 1년 전인 1937년 9월 7일 정교수가 되었다. 제27회 총회(1938)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다. 1938년 9월 29일로 예정되었던 가을학기 개학은 없었다. 개학하지 못하고 통신수업이 진행되었다. 1939년 4월 13일 오전 10시 학교 대강당에서 제34회 졸업식이 개최되었다. 교장 라부열이 사회하였고 교수 남궁혁이 ‘진(眞) 종교의 본질’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54명의 졸업생에게 졸업증서를 수여하였다. 이것이 평양신학교 졸업식을 끝으로 신학교는 폐교되었다. 학교 재산은 적산 재산이 되어 총독부에 귀속되고 말았다. 필자는 본고에서 "총신대 개교 120주년 기념, 어제와 오늘(3)" 를 연재하면서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의 전후 역사적 배경"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총신대학교(합동)와 장신대학교(총합)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자신들의 역사적인 정통성과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2021년을 개교 120주년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120주년은 상당히 인위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여야 한다. 최초의 장로회 조직이 1907년 독노회이며, 치리회인 독노회는 선교사 공의회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총신대학교는 공의회에서 설립한 평양장로회신학교를 그 근원지로 삼고 있다. 후평양신학교는 평양신학교와 총신대학교의 신학적 정체성에 반한다는 이유로 총신 기수에는 포함되나 역사의 연혁에는 삭제했다. 조선신학교는 아예 총신 기수나 역사에서 삭제했다. 제105회 총회에서는 신학적 정체성 때문에 역대 총신 기수에 포함되지 않는 조선신학교 졸업생인 한 인물을 영웅화 시키는 작업을 했다. 1948년에 남산에 세워진 장로회신학교는 설립후 총회 인준을 받는 직영신학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신 기수에서 삭제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일들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이 문제가 고민일 뿐이다. 사실 불편한 진실 앞에 우리들의 수치만 드러난 역사 회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픔일 수밖에 없다. 세워진 신학교는 폐기 되고 다시 새로 세워진 신학교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120주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앞으로 이러한 부분을 계속 추적해 보려 한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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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6] 바울의 오직 십자가 설교본문 / 고전 2:1-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1:26-31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부르심은 인간의 가문이나 학벌, 학식, 인간의 지혜에 근거한 부르심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간혹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남다른 그 뭔가가 있어서 부르심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부르심은 언제나 자랑이었습니다. 그 자랑은 교만으로 나타납니다. 적어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분포도는 노예였거나 노예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고린도 지역의 세상의 지혜와 힘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 비친 고린도 교회의 모습은 천한 출신자들입니다. 말 그대로 연약한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지친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본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좋은 예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구원을 받도록 부르셨음을 받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조건 없는 부르심이었으며, 자기 자랑을 하지 못 하게 함은 물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철저한 구원의 은혜성이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본문인 고린도전서 2:1~5절 말씀을 통하여 “바울의 십자가 설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주제는 목회자의 설교에 관한 이야기도 되지만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전도는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어떠한 원칙과 원리에 의해서 전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설교(전도)의 방법(1, 4) 첫째, 방법, 접촉점의 중요성입니다. ‘방법’이란 단어를 먼저 생각해 본 후 본문 말씀을 돌아가 살펴보겠습니다. 이 ‘방법’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연구 방법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주제를 어떠한 방법에 따라 연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연구 대상이 먼저 결정됩니다.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을 어떠한 방법으로 연구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는 소위 인식론이라 합니다. 어떠한 인식의 원리로 연구 대상을 접근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보통 교회 안에서 직분자를 선택하는 투표를 합니다. 문제는 어떠한 방법으로 투표하느냐에 따라 당선 여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어떤 사업을 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웁니다. 사업 대상이 결정되면 어떠한 방법으로 사업을 할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물건을 팔 때도 누구를 상대로 어떠한 방법으로 물건을 소개하여 팔 것인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상대방을 설득할 때 어떤 방법으로 설득할 것인가, 설득의 방법을 우리는 ‘접촉점’이라고도 합니다. 설득자와 피 설득자 간에 공유할 수 있는 접촉점은 대화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대화를 경청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처럼 방법론, 접촉점, 인식론 등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방법, 어떠한 접촉점으로 복음을 전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전도와 말씀선포의 접접촉점은 오직 성령의 역사임을 말씀합니다. 둘째,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1). 본문 1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라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증거’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증언’,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 등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증거는 결국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습니까? 이 점이 중요합니다. 당시 사도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에 대해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동격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구원은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것도 아니요,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명의 ‘주’로 믿어야 가능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유대인의 신지식과 구원 관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환난을 받았습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생명을 노리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계시는 하나님의 신비였습니다. 감춰졌던 비밀의 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믿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말씀 선포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가능했습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이러한 복음, 하나님에 관한 비밀의 계시를 고린도의 헬라(그리스) 철학이나 지혜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복잡한 철학적 사변이나 현란한 수사학을 동원하여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의 증거를 일관된 통일성과 근거에 의한 논리로 논증을 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와 논증은 헬라 철학이나 지혜에 근거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본문 말씀에서와같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웅변술이나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상한 말이나, 뛰어난 말이나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하나님의 증거란 이런 인간의 지혜로운 말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였습니다(4). 본문 4절을 보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도할 때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말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들로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3:31-16:33절은 예수님의 고별설교로 유명합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등 하나님에 관한 계시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볼 때 이단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관해 분명히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해서 또 다른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보혜사 성령이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입니다. 세상이 능히 저를 받지 못합니다(요 14:16-17).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은 가르치고 생각나게 합니다(요 14:26).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그 진리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요 16:26). 성령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요 16: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행 1:3). 그리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면 보혜사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제자들과 세상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고, 성령께서는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며”(요 14:11),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며”(요 14:9),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기록으로 완성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혹은 복음의 말씀과 서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강림하신 성령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이 주된 임무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성령에 대한 문제 때문에 문제가 되자 그 해결책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강조하므로 해결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고 힘 있는 성도,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도는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 백성의 신분과 삶을 결정한다고 주장해 왔고 계속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 안에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치열했습니다. 사도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오직 예수였고 그 예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증거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에 어떤 방법으로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까? 본문 4절에 의하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습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자나 설교자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이름으로 온갖 세상의 지혜나 이야기로 설교 시간을 보냅니다. 설교 시간에 성경 본문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 예화를 사용합니다. 많은 설교학자는 예화는 건물의 창문과 같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예화가 본문 말씀을 압도합니다. 방안에 창문이 하나면 족합니다. 그런데 그 조그마한 방안에 창문 5-10개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설교 시간에 너무나 예화가 많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세상의 방법으로 설득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식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오직 성령을 의지했으며, 성령을 사모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좁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힘있게 증거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복음 선포와 설교여야 합니다. 2. 설교(전도) 내용(2) 본문 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왜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 알기로 작정했습니까? 고린도 사람들의 내면세계에 자리 잡은 그리스 철학이나 지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면 족합니다. 사도는 왜 오직 십자가입니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설교 내용이 달라집니다. 바울을 비롯하여 초기 기독교 전도자들과 신자들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동일한 하나님, 동일한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독립된 종교로 출발하기보다 오히려 유대인 안에서 예수 전도 운동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짓된 메시아로 알고 십자가에 처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들이 내놓은 말씀은 신명기 21:23절입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 말씀에 따라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므로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그 메시아를 따랐습니다. 이 점이 유대인들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주후 40년쯤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종과 지역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까지 확산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유대인들과 관계, 이방인들과 관계 등이 커다란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지식, 신앙과 믿음, 복음 선포 형식에 대한 문제가 늘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를 각 지역에, 교회들에 전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사도는 원래 유대인으로 유대교가 믿은 하나님과 구원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과 성령의 체험을 통해 예수가 구약이 약속하고 종말에 오실 그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약속된 종말론적인 성령이 이미 오셨으며, 예수와 성령을 통해 일찍이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새로운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갖고 계시를 받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이 아닌, 세상의 지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만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 없이 하나님 백성의 신분과 삶을 결정한다는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런 복음 선포 앞에 이방인들이 교회에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나 목회자들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 ‘오직 예수 십자가’, ‘오직 성령’ 등으로 강조합니다. 강조점에 따라 교회 성격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목회 스타일이나 설교 스타일이 달라집니다.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유대주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되 그 강조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였고 구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지식, 구원 등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이처럼 삼위일체론 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런 복음 선포에 유대인들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에 의해 바울은 이단인 셈입니다. 헬라 철학에 의하면 이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유대인들과 다르며, 이방 헬라 철학의 지혜와는 달랐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고 이를 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구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지식과 계시, 구원은 성령이 함께하지 아니하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이 예수를 증거하고 믿게 합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는 성령께서 함께한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의 설교 내용은 참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의 계시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학습된 이론에 의한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은 사건이었습니다. 교회가 아니어도 들을 수 있는 내용을 왜 무엇 때문에 교회에서 해야 합니까?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교회에 몰려듭니다. 그러한 교인들에게 세상의 이야기로 설교할 때 교인들은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3. 설교자(전도자)의 삶과 행동(3-5) 첫째, 두려움과 떨림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3). 본문 3절에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주로 노예였거나 현재 노예인 자들이었습니다. 사회적인 신분으로 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들 앞에만 가면 두렵고 떨렸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전혀 힘과 권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이들 앞에 서기만 하면 ‘두렵다’, ‘떨린다’라는 말은 얼마나 그가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자신의 신분과 힘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힘은 인간적인 힘입니다. 이런 힘은 하나님 앞에 무너질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힘은 하나님의 힘이 아닙니다. 사도는 자신이 철저히 낮아지고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이 약해질 때, 자신이 증거한 복음이 많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약함에서 온전하여 짐”을 확신했습니다(고후 12:9). 고린도 후서 12: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 짐의 원리입니다. 내 능력이 약할 때 도리어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의 여러 약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점과 고난을 수치스러운 결점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사용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자가 자신을 높이면 높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 가려집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과시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가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더 크게 드러납니다. 복음 선포자, 설교자,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 앞에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인간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삶에 배 있어야 합니다(4). 본문 4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합니다. 사도가 전한 말이나 선포한 것들은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말들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설교자, 복음 선포자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야 합니다. 유능한 설교자는 삶의 전 과정이 설교의 준비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늘 설교를 준비하여야 합니다. 골방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 준비가 습관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설교 준비, 성경 연구를 아예 포기한 설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 대필자를 둡니다. 이들은 ‘목회 비서’로 활동합니다. 본인이 설교를 작성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작성해 준 설교 원고를 강당에 가지고 올라가 설교합니다. 설교는 늘 준비하고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진행되어야 합니다. 준비하여야 합니다. 셋째, 오직 성도들을 생각하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5). 본문 5절에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는 것은 성도들의 믿음을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두게 하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들을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늘 성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온전한 신앙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그 희망과 비전은 복음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비전과 희망을 위해서 복음을 연구하고 그 복음을 설교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복음이 성도들을 힘있게 합니다. 세상을 능력있게 살아가는 힘과 역동성이 생긴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교회에서 설교 시간에 교인들은 경제 이야기, 정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은 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마음속에 갈급함이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절규가 있습니다.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정신을 가지고 나가서 또 다른 복음 증거 자가 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그 십자가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영적인 연약함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확신을 갖고 담대하게 세상 가운데 나아가서 생명의 말씀을 소개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삶의 모든 것들이 다 변화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능력으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헛된 껍데기를 벗어버린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사도가 본문에서 말씀한 세상의 지혜는 빈껍데기입니다. 이를 벗어던지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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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5]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라본문 / 고린도전서 1:26-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지난 시간에 1:18-25절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무능과 패배의 상징으로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최고의 힘보다 강합니다. 인간의 최상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서 고린도 지역의 그 어떠한 철학적 지혜보다 우월함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그 어떤 지혜의 힘이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임을 말씀합니다. 바울은 1:18-25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의 지혜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미련함과 무능의 상징인 그리스도의 십자를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본문 말씀을 통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이 편지를 읽을 때 그들의 시선을 한 곳으로 주목하게 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바라보면서 “나와 우리를 구원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실제적인 상황을 예로 들면서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 없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26) 본문 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합니다. 26절은 명령형의 문장이 아니라 직설법입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도록 부르셨음을 살펴보면 내가 여기서 말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일부 부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가이오, 그리스보, 에라스도(롬 16:23) 등 소수의 부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고전 11:17-34). 그러나 대부분 교인들은 노예나 노예였던 자들, 수공업자들이나 소상공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즉 본문에서 언급한 대로 ‘육체를 따라’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혜있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부를 가졌거나 관직을 가져 힘있는 자들도 아니었습니다. 무슨 가문을 자랑할만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미련한 자들”, “무지한 자들”입니다. 천민 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 구성원들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육체를 따라”, 즉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많은 학식에 의한 지혜로운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힘있는 권력을 가졌거나 그렇다고 가문이 좋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하시고 부르셨습니다. 부자들이나 학자들이 아니라 무식하고 연약한 천한 자들을 부르셔서 은혜로 구원을 얻도록 하여 교회 일원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들을 거룩한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노예나 천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거룩한 자녀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구성원들, 성도들의 현 상태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세상적인 지혜나 힘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나의 세상적인 지위나 학식,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고린도 지역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출생신분, 즉 유대인으로 출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간적인 조건을 내걸어 그것이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착각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 선민이라는 우월의식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또 다른 형태의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역설적인 선택(27-29) 첫째, 미련하고 약한 자들을 택하신 이유를 설명합니다(27). 본문 27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여줍니다. 그 부르심은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둘째는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런 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첫째, 세상의 “지혜있는 자들”과 “강한 것들(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적인 것들, 본문에서 말씀한 지혜나 힘있는 어떤 능력이 인간을 구원하는 데 아무런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세상적인 가치인 지혜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그것들을 자랑합니다. 이런 형태의 생각은 서로의 파당을 만들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등으로 파당을 지었습니다. 상대를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분쟁이 찾아온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되어야 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식과 성령의 은사로 받은 언변 즉, 말 잘하는 은사 등을 세상적인 관점으로 평가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을 자랑합니다. 이런 식으로 고린도 교회에 분쟁과 분파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잘못된 신앙을 바르게 잡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말씀합니다. “지혜있는 자들”, “힘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지혜가 없고 힘이 없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셨다고 강조합니다. 이렇게 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 정체성을 확립케 하고 있습니다. 삶의 가치관을 복음에서 찾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어떤 지혜나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우리를 부셨음음을 의미합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남다른 특별한 어떤 조건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마치 그러한 세상적인 지혜나 힘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착각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서로 파당을 지어 싸우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으로 서로 하나될 것을 말씀합니다. 파당을 짓는 것이 복음 안에서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둘째, 천하게 출생하고 멸시받은 자들을 택하신 이유를 설명합니다(28). 본문 28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셨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을 택하신 목적은 “있는 것들”을 패하려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힘 있다고 자랑하며, 잘난 체하는 자들을 낮추시고 무력하게 하시기 위해 역설적으로 세상의 비천한 자들, 업신여김을 받은 자들을 택하셔서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택하셔서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의 지혜, 능력, 문벌 등을 “폐하려”하십니까? 그것은 이것들이 마치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처럼 환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환상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 저변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결국 하나님을 오해하게 합니다. 잘못된 신앙을 갖게 합니다. 교만하게 합니다. 자기 자랑에 빠지게 합니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서로 비교하고 이런 것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싸웁니다. 서로 파당을 짓습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29). 본문 29절에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28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육체라도”, 즉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믿음의 대상이 될 때 서로 파멸에 빠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랑은 언제 나옵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무엇인가 더 낫다라고 할 때입니다. 그래서 자랑거리가 됩니다. 내가 너보다 모든 면에서 더 낫다고 할 때에 우월의식이 생깁니다. 자랑거리가 있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이런 자랑거리가 대단했습니다. 고린도 지역의 주류인 헬라철학과 지혜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차등적가치관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이는 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복음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께 구원을 받습니다. 차별없이 누구든지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차별없이 믿는 자에게 주어진 구원을 말하자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할말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들은 이러한 복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세상적인 지혜와 힘을 최상급으로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허물고 있습니다. 오직 겸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잘났다고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못났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면 됩니다. 여기에 진정한 삶의 능력이 있습니다. 자기가 드러날 때, 세상적인 지혜와 우월적인 힘을 자랑하는 자들은 겸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지혜와 힘은 복음을 위한 사용되지 아니하면 그것이 오히려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최상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들의 본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3. 고린도 교회의 유일한 자랑, 오직 예수(30-31) 첫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30). 본문 30절에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합니다. 사도는 이제 본문의 결론적인 말씀으로 본문 30-31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각종 파벌과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세상적인 지혜, 힘, 자기 자랑은 결국 그리스도인이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모든 분쟁을 피하고 하나되기 위해서는 오직 복음밖에 없습니다. 그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은혜입니다. 이 구속은 나를 대신하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였습니다. 그 십자가 보혈의 피는 우리의 범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받으시고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본문 30절에서 말씀한 복음의 증거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깨닫지 못할 때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가문이나 학벌을 중시합니다. 오로지 자기 자랑을 하지 아니하면 살맛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분쟁을 일으킵니다. 끼리끼리 파당을 지어 하나됨을 파괴 시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것들은 무익하다고 합니다. 오직 은혜의 복음이 우리의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할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느냐에 따라 감사로 충만할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자신이 받은 은사로 이웃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둘째,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31). 본문 31절에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나의 가문과 학벌, 그리고 세상적인 지혜로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칭찬하고 자랑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해 내 죄가 사해졌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 죄값을 지불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한 것같이 자랑하는 사람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합니다. 여기 기록된 말씀은 예레미야 9: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 9:23) 우리는 구원과 모든 은사를 선물로 주신 ‘주’만 자랑하여야 합니다. 교훈과 적용 말씀을 증거하다 보면 때로는 역설적으로 설명해야 할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유대인들에게 마태복음 5장에서 “마음으로 욕만 해도 이는 살인죄로 지옥 불에 들어간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악합니다. 그렇다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 없습니다. 아것을 강조하기 위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5장은 예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부자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물을 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 19:23-25) 이 이야기는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혹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로 읽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부자가 천국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천국 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부자는 천국에 가지 힘들다고 말씀한 것은 결국 자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은 세상에서 미련한 자를 택하여 지혜 있는 자를, 세상에 약한 자를 택하여 세상에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에 천한 자들, 멸시받은 자들, 없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폐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천한 자들, 멸시받은 자들, 없는 자들이 구원받은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이런 자들만을 구원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천한 자, 멸시받은 자든 아니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현 상황을 예로 들면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땅에는 다양한 교회 구성원들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면서 가문, 학벌, 권세 등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사람이 교회의 하나 됨을 훼손합니다. 이는 아직 은혜의 복음에 대한 본질을 외면한 결과입니다. 바른 복음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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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본문 • 고전 1:18-26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1:10-17절 말씀을 통해 “고린도 교회 분파들”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나는 바울을 따른다.”, “나는 아볼로를 따른다.”, “나는 베드로를 따른다.”, 심지어 “나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라고 말하면서 서로 파당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파당으로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경우 서로 분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나같이 복음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분쟁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신앙의 공동체에서 제명과 출교를 당할지라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나와 다른 성도들도 같은 주님의 지체입니다. 지체는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싸매어 줍니다. 분파로 분쟁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여러 갈래로 찢은 행위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와 세례를 통한 연합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우리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인 고린도전서 1:18-25절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의 지혜나 능력(힘)으로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미련함과 무능함의 상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18) 본문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이미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고린도 교회에 보내주신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는 본문 18절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만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지혜”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십자가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그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두 가지 형태로 적용되어 나타납니다. 첫째는 멸망할 사람들이요, 둘째는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멸망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말씀이 “어리석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전해질 때 갈라지는 심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 멸망할 자들에게는 멸망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이 전해지면 이 두 부류가 그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사울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쓰임 받은 사울은 선하게 등장하면 안 됩니다. 악하게 등장해야 합니다. 사울이 악하게 등장해야만 이스라엘에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사울 왕은 소위 버림으로 쓰임을 받은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블레셋과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합니다(삼상 8:5).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장로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인간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을 통해 이를 확인해 주었습니다(삼상 8:7). 삼상 8: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 사울을 왕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삼상 16:1). 결국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삼상 31:4).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은 자들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이들은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미련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다 드러납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아닌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심판의 도구가 아니라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바로 이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다윗이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 사명은 전도였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반대한 자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도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계시가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하면서 이를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도 온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의 원천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격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복음입니다. 고린도 지역의 지혜, 철학적 사고와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린도 지역의 세상 지혜, 사람의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 해야 합니다. 이런 복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생각과 사고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달라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나를 힘있게 세상을 살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알고 성육신 교리를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단순히 안다는 것으로 모든 신앙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나는 너보다 이러한 지식을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의 능력,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의 은혜를 우리의 삶 가운데 능력으로 보여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2.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19-21) 첫째, 세상을 향한 심판입니다(19). 본문 19절에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사도는 18절에서 언급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에 대해 설명을 해 가고 있습니다. 그 설명은 구약 이사야서를 인용하므로 시작합니다. “기록된바”, 즉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지혜로운 사람들의 지혜를 멸하고, 지식 있는 사람들의 지식을 물리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29:14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13절부터 읽어보면 14절 말씀이 이해될 것입니다. 13절 말씀에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습니다. 속과 겉이 다릅니다. 14절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 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 중에 기인한 일을 다시 행한다고 합니다. 그 기인한 것은 곧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라고 합니다. 가장 무서운 심판 중의 하나는 물리적인 심판도 있지만, 영적인 심판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는 어두움으로 인해 혼란이 찾아옵니다. 분쟁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구체적인 놀라운 일이란 지혜로운 사람들은 지혜를 잃게 될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총명함도 잃을 것입니다. 진정한 지도자가 없어져 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세상 지혜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지혜는 무너집니다. 그 지혜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 지혜로 인한 총명함 역시 사라질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의 현장은 혼란과 어두움이 가득할 것입니다. 진정한 희망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세상의 미련한 지혜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말할 때 우리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미련한 세상 지혜의 영향을 받아 거기에 굴복합니다. 거기에 희망을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에게 임했다고 고백하면서 좋아합니다. 이는 고린도 지역에 철학적인 지혜에 근거한 또 다른 형태의 말장난으로 경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의 차이입니다(20-21).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를 비교한 것처럼 무모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비교를 통해서 고린도 지역의 세상 지혜를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자들을 경계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문 20절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학자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어서 이 시대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와 헬라인의 지혜있는 자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질문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셨다고 합니다. 미련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를 무시한 미련한 자들은 멸망의 사람들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싶어 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고린도 지역에서 전했던 그 복음에 관심을 가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부터 자신은 사도라고 강조합니다. 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고린도 지역에서 전했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고린도 지역의 철학과 수사학에서 언급된 세상의 지혜와 사람의 말과 비교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어서 본문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합니다. 세상이 자기의 지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는 전형적인 사도의 가르침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계시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도, 즉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어리석어 보이는 말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언제나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제아무리 자신이 잘못했을지라도 대단하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세상에 온갖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칭찬합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이용합니다. 설교가 온갖 세상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세상적인 이야기를 정당화 시켜주기 위해 성경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분해 주는 척도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합니다. 또한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복음이 증거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아닌 세상적인 지혜와 지식으로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22-25) 첫째,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22-23). 본문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합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찾습니다. 예수님께 유대들이 표적을 구하나 이를 거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막 8:11-13)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과 지혜를 찾는 헬라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들의 표적과 지혜에 의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참된 구원과 지혜를 찾아야 하는데 그들은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23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둘째, 하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24). 본문 24절에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합니다. 유대인이 되었든지 그리스인이 되었든지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말씀한 내용을 설명하면서 24절에 와서 결론과 같은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누구를 막론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성령을 통해 나타납니다.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회개하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합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독생자는 하나뿐이라는 의미보다 독특한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적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의 독특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게 됩니다. 유대인들만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자긍심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야 하고 율법을 소유한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긍심이 대단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 돼지 취급합니다. 이방인은 절대 구원이 없다고 합니다. 유대 랍비들은 이방인의 존재 자체를 지옥의 땔감을 위해서 준비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방인 중에는 유대인이 그렇게 이방인을 절망적으로 말한다고 할지라도 일부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이 등장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이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이야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사도 바울을 집으로 초청하여 이러한 복음을 더 듣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의 복음 전도 핵심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인들의 철학적 지혜가 아닌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계시가 곧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셋째,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25). 본문 25절에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 바울의 이러한 논리 전개에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영원하시며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대신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피조물의 지혜를 비교할 수 있습니까? 비교 불가입니다. 그럼에도 바울 사도는 교린도 교회 성도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다”라고 합니다. 인간과 그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세상적 지혜로 볼 때 미련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인간의 최상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판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패망의 상징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인간의 최고의 힘보다 더 강합니다. 이로써 바울은 하나님 무한한 능력과 지혜의 우월성을 표현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지혜와 힘이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임을 말씀합니다. 교훈과 적용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세상의 지혜의 일종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오해하다 보니 서로 자신들의 지혜를 자랑합니다. 그 자랑이 지나쳐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교회 분쟁은 아직도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세상적인 지혜와 그 힘 등에 대한 세상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는 이런 이유로 세상의 지혜와 십자가를 극단적으로 대립시켜 양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과 지혜로 자신의 행복과 생명을 도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혜로는 자신의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더욱 인간은 소외되고 불안한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희망과 구원, 그리고 생명은 우리가 만든 지혜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초월자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러나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초월적인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과 함께하는 신은 말하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신을 찾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구원이란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우리 함께 해야 구원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통해 구원이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기쁜 소식인 복음은 십자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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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3] 고린도 교회 파벌들본문 / 고린도전서 1:10-17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침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침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침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지난 시간에 바울의 감사기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은사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통해 각종 은사로 충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가 우리 각자에게 은사로 나타났습니다. 그 은사는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둘째는 교회를 위하여, 셋째는 이웃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고린도 교회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언변과 모든 지식의 풍성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거로 견고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고함으로 소망으로 가득하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본문인 1:10-17절 말씀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각 파벌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원래 파벌이란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따로따로 갈라진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런 파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안타까움에 대해 바른 진리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하는 방법은 믿음이 같아야 합니다. 믿음이 같다는 말은 믿음의 근거가 되는 성경 말씀에 대한 관점이 같아야 합니다. 1. 분쟁의 원인(10) 본문 10절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이미 9절까지 말씀을 마치고 이제 본격적으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목적에 따라 구체적인 문제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10절은 반의어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과 상당히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첫째, 권면의 근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10, 상)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합니다. 권면할 때 사도 바울의 인간적인 권면이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하고 있습니다. 권면에 대한 권위의 근거입니다. 여기 ‘권면하노니’라는 단어는 ‘격려하다’, ‘권고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더 강한 표현으로 ‘간청하다’, ‘탄원하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사도는 이러한 강한 의미의 단어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부모가 자녀에게 말하듯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호소합니다. 모두 하나가 된 의견으로 서로의 편을 나누지 말라고 합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가 되라고 합니다. 이렇게 될 때 분쟁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도는 이 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둘째,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10, 중) 본문에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라는 말은 서로 마음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하나 되어야 서로 말하는 취지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말’은 같은 취지의 주장입니다. 서로 분열이나 파당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셋째,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10, 하) 교회 구성원들에게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분쟁’이라는 단어는 첫째, 갈라진 틈(욘 2:6, 사 2:19,21), 둘째, 옷이 찢어짐(마 9:16), 셋째, 의견 차이로 일어난 분쟁(요 7:43, 9:16), 넷째, 몸이 조화를 이루지 못함(고전 12:25)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분쟁’이란 서로 다른 지도자를 따름으로 일어난 분열을 가리킵니다. 교회 내에서 ‘분쟁’과 ‘분열’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분쟁이란 하나의 집합체가 서로 의견 대립으로 다투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분열이란 하나의 집단이 분쟁으로 두 개의 집합체로 나누어진 상태를 지칭합니다. 분쟁이 분열로 이어진다는 말을 사용할 때 교인들이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싸우면서 두 개의 별도의 장소에서 모인 상태를 분열이라 합니다. 넷째,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 하) 본문은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온전히 합하라”라는 말씀은 “올바른 상태로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그물을 수선하여 원래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마 4:21).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상태로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 분쟁이 발생합니까? 먼저는 같은 복음으로 하나 되지 못한 결과입니다.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다른 주장들을 하므로 분쟁이 발생합니다. 서로 다른 주장은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자들은 주변에 사람이 없습니다. 함께한 사람들마저 떠납니다. 떠날 뿐만 아니라 함께 하겠다고 접근하지 않습니다. 똑똑한데 주변에 사람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로 이런 강한 자기주장으로 분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분쟁으로 갈라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분쟁으로 갈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복음으로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같은 생각을 하게 될 때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령의 역사는 분쟁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 되는 데 있습니다. 분쟁은 사단의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분쟁은 파멸을 가져옵니다. 그 파멸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사단의 장난일 수가 있습니다. 서로 싸우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분쟁과 하나님의 영광은 번지수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권고한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고린도 교회의 분파들(11-12) 본문 11절에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라는 말씀에서 ‘분쟁’이란 단어 역시 같은 10절과 같은 단어로서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나누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분쟁은 ‘말다툼’이나 ‘논쟁하여 하나 됨을 파괴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서로 다른 견해로 심각한 대립한 상태에서 논쟁을 합니다.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지나치게 내세웁니다. 자신의 의견과 주장이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대방과 치열한 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본문 12절에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글로에의 권속들(노예들이나 해방된 노예들)로부터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 성도들 사이에 다툼이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저마다 “나는 바울을 따른다.”, “나는 아볼로를 따른다.”, “나는 베드로를 따른다.”, 심지어 “나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대단한 성경 지식과 수사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후 고린도를 방문하였습니다(행 18:24-19:1).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행 18:24-26) 철학과 수사학을 자랑하던 고린도의 전통을 이어받아 성령의 영감으로 주어진 지식과 언변에 대해 열광하던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아불로를 선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고후 10:10). 글은 권위가 있는데 말할 때, 설교할 때는 말재주가 없는 눌변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라고 했습니다(고후 11:6). 사도는 비록 말에는 능숙하지 못하지만, 지식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모든 면에서 자신이 가진 지식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베드로를 보통 그의 아람어 이름인 게바로 지칭합니다(고전 3:22, 9:5, 15:5, 갈 1:18). 게바파는 ‘연약한 백성들’로서 특정 음식 삼가 규칙 등을 강조한 베드로의 가르침을 선호하여 베드로를 그들의 선생으로 따르는 부류입니다. 율법을 무시한 바울의 복음과 사도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고전 8:1-13, 9:1-12, 10:14-23). 그러나 아볼로파와 게바파에 대항한 고린도 교회 일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원래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사도였던 바울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성도들은 바울, 아볼로, 게바 등 인간들의 가르침에 얽매일 필요 없이 성령을 통하여 직접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류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망을 지었습니다.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 자들을 상대로 말싸움과 논쟁을 했습니다. 대립한 상태에서 서로를 불신합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3. 사도 바울은 세 가지 질문으로 분파의 부당성 질타(13)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3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도대체 그리스도가 나뉘었습니까? 둘째,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셋째,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사도는 고린도 교회 분파 행위에 대해 이러한 세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 교회의 하나 됨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례를 받아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모두 몸의 지체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파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여러 갈래로 찢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세례를 통한 연합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롬 10:9, 골 1:13), 비싼 값을 치르고 산(고전 7:23)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물인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 아볼로, 게바 등에 ‘속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4. 사도 바울의 사도직, 오직 복음(15-17) 첫째,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14-15) 본문 14절에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라고 합니다. 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 오직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도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갈 1:16). 그래서 사도는 오직 복음 선포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리스보는 고린도 유대 회당장으로서 고린도의 첫 회심자입니다. 사도행전 18:8절에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일부 성도들은 자기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세례에 대한 의미의 본질을 잃고 세례를 단순히 당파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세례를 자기 당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도직이 세례를 베푸는 데 있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데 있었습니다. 본문 15절에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 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둘째, 왜 세례를 베풀지 않았는가? (16) 본문 16절에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합니다. 스데바나는 고린도 교회의 대표단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7절에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셋째, 바울의 사도직은 오직 복음을 위하여(17) 본문 17절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도는 ‘말의 지혜’가 아닌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했습니다. ‘말의 지혜’란 ‘말의 명석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인들은 지혜의 달변으로 철학과 수사학이 발달한 배경속에 익숙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고백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용은 없으면서 겉만 화려합니다. 알맹이가 전혀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 분쟁의 원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의 지혜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서로의 지혜를 자랑하므로 분쟁이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헛된 말의 지혜로 신앙을 포장합니다. 교회를 포장합니다. 인간적인 기교를 통해서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교회가 무력해집니다. 신자의 삶이 무력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분쟁으로 인한 교회의 아픔입니다. 교훈과 적용 고린도 교회 분쟁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와 유사합니다. 고린도 교회 분쟁의 원인이 오늘날 현대 교회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령의 나타남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데 관심은 없고 오직 교회에서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서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비전이 있겠습니까? 성령의 사람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충만합니다. 항상 회개하며 자기반성에 충실한 자들입니다. 복음으로 인한 절대적 가치를 가진 성도들은 비본질적인 것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상대적인 가치에 생명을 걸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함께 성도들과의 관계는 언제나 은혜롭습니다. 이런 교회에 분쟁이 자리 잡을 수가 없습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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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1] 바울의 권위 주장본문 고전 1:1-3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권위 주장은 반드시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근거 없는 주장은 권위가 없으며, 그것은 낭설이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권위 주장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는 주장의 진실성을 담보한다. 그리고 권위를 가져온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간혹 이단에 빠진 경우들이 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교회가 있다. 그리고 일정한 신앙 그룹들이 있다. 각 단체는 자기중심적인 해석과 관점을 갖고 성경을 이해한다. 단체 뿐만 아니라 각 사람들은 나름대로 성경을 이해하는 틀을 갖고 있다. 문제는 그 틀의 근거가 문제될 때 엄청난 혼란이 찾아온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를 위해 사도임을 강조했다. 자신의 사도성이 무너지면 복음전도도 무너진다. 이런 이유로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고린도 교회에 자신이 사도임을 밝히면서 그 사도로 부름을 받은 근거를 밝힌다. 그 근거를 통해 사도에 대한 권위를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서두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문을 열고 있다. 1. 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 통용된 편지 양식은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서두 ② 감사 또는 기도 ③ 본론 ④ 말미: 인사와 축복 등으로 구성된다. 첫째 서두는 편지를 보낸 발신인이다. 그리고 수신인으로 누구누구에게 인사하는 형식이다. 다음은 본론이다. 편지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중심 내용으로 구성된다. 말미는 인사와 축복으로 구성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당시 헬라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편지 양식에 따라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다. 사도는 이러한 양식을 준용하여 자신의 신앙에 근거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가 고린도전서가 되었다. 두 번째 편지는 고린도후서가 되었다. 2. 서신의 서두: 발신인이 수신인에게 인사 내용(1) 첫째, 발신인 소개 본문 1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라고 한다.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발신인은 사도 바울이다. 그리고 공동 발신으로 형제 소스데네를 언급한 것은 바울의 겸손함이라 할 수 있다. 소스데네는 ‘힘 안에서 안전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스데네는 교린도 지역에서 유대 회장의 회당장이었다. 사도행전 18장에 의하면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 유대인이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에 세웠다. 이유는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선동했다는 이유였다. 이때 총독 알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신앙 문제이므로 스스로 처리하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법정에 세웠지만 풀려나자 유대인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유대들은 바울 대신 유대 회당장인 소스데네에게 폭력을 가했다. 이는 총독 갈리오의 묵인하에 이루어졌다. 행 18:17에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거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율법을 소유했고, 유대인으로 출생하였다고 하여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며,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전했다. 이를 총독에게 고소하였지만, 총독은 이는 재판건이 될 수 없다며 재판을 거부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회당장인 소스데네를 습격하였다. 공격의 목표를 바울 대신 소스데네로 향한 것이다. 소스데네는 바울 때문에,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당시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에 개척에 함께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있고 디모데도 있다. 그런데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소스데네만을 공동 발신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소스데네는 자신의 복음 사역에 고난으로 동참한 사람이었다. 둘째, 바울의 권위 주장, 사도권 본문 1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라고 한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 부르심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사도의 권위 주장이다. 그 권위의 근거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부르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첫 문안 인사에게 왜 자신의 사도성을 부각하고 강조하고 있는가? 또한 누구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는가를 강조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자신의 사도성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는 주로 편지할 때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하지 않는 교회에 편지할 때는 자신이 사도임을 밝히지 않는다. 특히 빌립보교회에 편지할 때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 1:1)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자신이 사도임을 밝히지 않는다. 그 이유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도 바울이 투옥되었을 때 연보와 옥바라지할 자를 보내 주기도 하는 아주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빌립보교회 외에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할 때도 사도임을 강조하지 않는다. 데살로니가 전서 1:1에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한다. 특히 바울에 의해 개척하지도 않았던 로마교회에 편지하여 스페인 선교를 위해 도움을 받기 위해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사도성을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이방지역의 교회인 로마교회 방문과 이방지역인 스페인 선교를 위한 선교계획을 밝혀야 하므로 사도임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문제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는 자신이 사도임을 밝히고 있다. 그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고 있다. 그 하나님이 뜻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로 불러주셨음을 말씀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사도직은 신약교회에 아주 독특한 직책이었다. ‘사도’라는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여 높임 받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4장, 9장, 고린도후서 4장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자신의 사도직에 관해 오해를 받거나 의심을 받았다. 사도직에 대한 징표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어떤 사람으로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진정한 사도임을 일관되게 내세운다. 고린도후서 1:1과 갈라디아서 1:1절을 참고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고후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3. 바울의 고린도에 있는 교회 정의(2) 본문 2절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라고 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여러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 하나님의 교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 백성, 총회, 공동체를 지칭한다. 신명기 31:30에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라고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총회’는 구약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교회가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무리에게 적용된다. 바울은 ‘교회’라는 칭호를 본문 2절에서와같이 고린도 지역의 각 처소의 그리스도인의 회중에도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집단(집합체)에도 적용한다. 고전 15:9에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라고 한다. 여기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들’이라는 복수로 사용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4:17에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한다. 특별한 한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그 수나 장소와 관계없이 그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로서 그 지역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거룩이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하나님께 솔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상태를 거룩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거룩한 자들’이다. 또한 ‘성도들’이다. 따라서 ‘선택’, ‘부름’, ‘성도들’ 등은 같은 동의로 쓰이는 교회이다. 교린도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이렇게 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들’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오직 자신을 선택하여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삶은 거룩하지 못한 삶이다. 거룩한 사람들의 삶의 열매는 거룩해야 한다. 도덕적, 윤리적 열매가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도덕적 삶에 대한 교정을 바라고 있다. 이를 위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서두에서부터 ‘거룩함’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그분에게 의존하고 예배와 기도 가운데 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자들이다. “그의 제사장들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는 사무엘이 있도다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시 99:6)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요엘 2:32) 4. 바울의 축복기도(3) 본문 3절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한다. 사도는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축원하고 있다. 첫째, 은혜이다. 은혜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 구속의 행위이다. 인간들의 대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져 주어진다. 거저 베푸시는 구원의 사랑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둘째, 평강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구속적 행위의 결과이다. 이 결과는 하나님과 화해된 인간이 누리는 전체적인 안락한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아 누리는 모른 삶의 모습들은 평강의 모습이다. 셋째, 은혜와 평강의 출처이다. 본문 3절에 의하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한다. 여기서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첫째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이다. 둘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는 간단하다. 믿음으로 받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 그러나 유대인 입장에서 살펴보면 심각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은혜와 평강의 출처에 동격으로 보고 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이단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에게 고발을 당했고 총독의 재판정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총독은 종교적인 신앙의 문제에 관해서는 판단하기를 거부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3절 말씀은 엄청난 신앙 고백적 표현이다. 이것이 곧 우리들의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교훈과 적용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교회를 설립했다.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면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다. 첫 번째 편지인 고린도전서는 교회 분쟁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권면하고 있다. 앞으로 고린도전서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한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서두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편지를 보낸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가를 말한다. 우리 역시,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는가? 그리고 나를 직분 자로 세우신 분은 누구이신지를 확인해 보는 시간은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고후 13:5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라고 한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과 신앙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듯 우리 역시 나에게 허락해 주신 직분과 신앙고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