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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3] 고린도 교회 파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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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3] 고린도 교회 파벌들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꾸미기]고린도 바울기념교회.jpg
고린도 바울기념 교회

 


본문 / 고린도전서 1:10-17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침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침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침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지난 시간에 바울의 감사기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은사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통해 각종 은사로 충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가 우리 각자에게 은사로 나타났습니다. 그 은사는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둘째는 교회를 위하여, 셋째는 이웃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고린도 교회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언변과 모든 지식의 풍성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거로 견고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고함으로 소망으로 가득하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본문인 1:10-17절 말씀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각 파벌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원래 파벌이란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따로따로 갈라진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런 파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안타까움에 대해 바른 진리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하는 방법은 믿음이 같아야 합니다. 믿음이 같다는 말은 믿음의 근거가 되는 성경 말씀에 대한 관점이 같아야 합니다.


1. 분쟁의 원인(10)


본문 10절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이미 9절까지 말씀을 마치고 이제 본격적으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목적에 따라 구체적인 문제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10절은 반의어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과 상당히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첫째, 권면의 근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10, 상)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합니다. 권면할 때 사도 바울의 인간적인 권면이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하고 있습니다. 권면에 대한 권위의 근거입니다. 여기 ‘권면하노니’라는 단어는 ‘격려하다’, ‘권고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더 강한 표현으로 ‘간청하다’, ‘탄원하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사도는 이러한 강한 의미의 단어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부모가 자녀에게 말하듯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호소합니다. 모두 하나가 된 의견으로 서로의 편을 나누지 말라고 합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가 되라고 합니다. 이렇게 될 때 분쟁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도는 이 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둘째,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10, 중)


본문에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라는 말은 서로 마음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하나 되어야 서로 말하는 취지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말’은 같은 취지의 주장입니다. 서로 분열이나 파당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셋째,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10, 하)


교회 구성원들에게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분쟁’이라는 단어는 첫째, 갈라진 틈(욘 2:6, 사 2:19,21), 둘째, 옷이 찢어짐(마 9:16), 셋째, 의견 차이로 일어난 분쟁(요 7:43, 9:16), 넷째, 몸이 조화를 이루지 못함(고전 12:25)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분쟁’이란 서로 다른 지도자를 따름으로 일어난 분열을 가리킵니다.


교회 내에서 ‘분쟁’과 ‘분열’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분쟁이란 하나의 집합체가 서로 의견 대립으로 다투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분열이란 하나의 집단이 분쟁으로 두 개의 집합체로 나누어진 상태를 지칭합니다. 분쟁이 분열로 이어진다는 말을 사용할 때 교인들이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싸우면서 두 개의 별도의 장소에서 모인 상태를 분열이라 합니다.


넷째,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 하)


본문은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온전히 합하라”라는 말씀은 “올바른 상태로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그물을 수선하여 원래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마 4:21).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상태로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 분쟁이 발생합니까? 먼저는 같은 복음으로 하나 되지 못한 결과입니다.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다른 주장들을 하므로 분쟁이 발생합니다. 서로 다른 주장은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자들은 주변에 사람이 없습니다. 함께한 사람들마저 떠납니다. 떠날 뿐만 아니라 함께 하겠다고 접근하지 않습니다. 똑똑한데 주변에 사람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로 이런 강한 자기주장으로 분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분쟁으로 갈라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분쟁으로 갈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복음으로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같은 생각을 하게 될 때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령의 역사는 분쟁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 되는 데 있습니다. 분쟁은 사단의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분쟁은 파멸을 가져옵니다. 그 파멸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사단의 장난일 수가 있습니다. 


서로 싸우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분쟁과 하나님의 영광은 번지수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권고한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고린도 교회의 분파들(11-12)


본문 11절에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라는 말씀에서 ‘분쟁’이란 단어 역시 같은 10절과 같은 단어로서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나누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분쟁은 ‘말다툼’이나 ‘논쟁하여 하나 됨을 파괴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서로 다른 견해로 심각한 대립한 상태에서 논쟁을 합니다.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지나치게 내세웁니다. 자신의 의견과 주장이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대방과 치열한 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본문 12절에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글로에의 권속들(노예들이나 해방된 노예들)로부터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 성도들 사이에 다툼이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저마다 “나는 바울을 따른다.”, “나는 아볼로를 따른다.”, “나는 베드로를 따른다.”, 심지어 “나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대단한 성경 지식과 수사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후 고린도를 방문하였습니다(행 18:24-19:1).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행 18:24-26)


철학과 수사학을 자랑하던 고린도의 전통을 이어받아 성령의 영감으로 주어진 지식과 언변에 대해 열광하던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아불로를 선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고후 10:10). 글은 권위가 있는데 말할 때, 설교할 때는 말재주가 없는 눌변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라고 했습니다(고후 11:6). 사도는 비록 말에는 능숙하지 못하지만, 지식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모든 면에서 자신이 가진 지식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베드로를 보통 그의 아람어 이름인 게바로 지칭합니다(고전 3:22, 9:5, 15:5, 갈 1:18). 게바파는 ‘연약한 백성들’로서 특정 음식 삼가 규칙 등을 강조한 베드로의 가르침을 선호하여 베드로를 그들의 선생으로 따르는 부류입니다. 율법을 무시한 바울의 복음과 사도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고전 8:1-13, 9:1-12, 10:14-23).


그러나 아볼로파와 게바파에 대항한 고린도 교회 일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원래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사도였던 바울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성도들은 바울, 아볼로, 게바 등 인간들의 가르침에 얽매일 필요 없이 성령을 통하여 직접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류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망을 지었습니다.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 자들을 상대로 말싸움과 논쟁을 했습니다. 대립한 상태에서 서로를 불신합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3. 사도 바울은 세 가지 질문으로 분파의 부당성 질타(13)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3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도대체 그리스도가 나뉘었습니까? 둘째,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셋째,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사도는 고린도 교회 분파 행위에 대해 이러한 세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 교회의 하나 됨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례를 받아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모두 몸의 지체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파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여러 갈래로 찢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세례를 통한 연합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롬 10:9, 골 1:13), 비싼 값을 치르고 산(고전 7:23)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물인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 아볼로, 게바 등에 ‘속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4. 사도 바울의 사도직, 오직 복음(15-17)


첫째,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14-15)

 

본문 14절에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라고 합니다. 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 오직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도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갈 1:16). 그래서 사도는 오직 복음 선포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리스보는 고린도 유대 회당장으로서 고린도의 첫 회심자입니다. 사도행전 18:8절에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일부 성도들은 자기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세례에 대한 의미의 본질을 잃고 세례를 단순히 당파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세례를 자기 당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도직이 세례를 베푸는 데 있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데 있었습니다. 


본문 15절에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 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둘째, 왜 세례를 베풀지 않았는가? (16)


본문 16절에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합니다. 스데바나는 고린도 교회의 대표단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7절에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셋째, 바울의 사도직은 오직 복음을 위하여(17)


본문 17절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도는 ‘말의 지혜’가 아닌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했습니다. ‘말의 지혜’란 ‘말의 명석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인들은 지혜의 달변으로 철학과 수사학이 발달한 배경속에 익숙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고백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용은 없으면서 겉만 화려합니다. 알맹이가 전혀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 분쟁의 원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의 지혜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서로의 지혜를 자랑하므로 분쟁이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헛된 말의 지혜로 신앙을 포장합니다. 교회를 포장합니다. 인간적인 기교를 통해서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교회가 무력해집니다. 신자의 삶이 무력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분쟁으로 인한 교회의 아픔입니다.


교훈과 적용


고린도 교회 분쟁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와 유사합니다. 고린도 교회 분쟁의 원인이 오늘날 현대 교회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령의 나타남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데 관심은 없고 오직 교회에서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서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비전이 있겠습니까?


성령의 사람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충만합니다. 항상 회개하며 자기반성에 충실한 자들입니다. 복음으로 인한 절대적 가치를 가진 성도들은 비본질적인 것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상대적인 가치에 생명을 걸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함께 성도들과의 관계는 언제나 은혜롭습니다. 이런 교회에 분쟁이 자리 잡을 수가 없습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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