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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파업과 장기려 박사

의사 파업과 장기려 박사

1976년 남미의 콜롬비아에서는 의사들이 52일 동안 파업을 하여 응급치료 이외의 진료 활동을 전부 중단한 적이 있었다. 당시 신문을 비롯한 언론 매체는 의사의 파업으로 야기된 예기치 못한 놀라운 사실을 보도했다. 의사들이 파업을 해서 사망률이 35%가 감소하였으며 일손을 놓게 된 국영장의협회는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사실이다”라는 논평을 냈다. 같은 해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도 의사들 파업이 있었다. 그로 인해 17개의 주요 병원에서 수술 건수가 평소보다 60%가 줄었는데 그 결과 “전체 사망률이 18%나 감소했다”라는 발표가 보고되었다. 의사들 파업이 끝나고 진료가 다시 시작되자 사망률은 다시 파업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40년 동안 진료에 임하고 있는 일본 의사 곤도 마코토는 솔직하게 임상 경험을 고백한 책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에서 말했다. “병원에 자주 갈수록 불필요한 약이나 과잉 진료행위로 오히려 수명이 단축될 수 있다.” 환자를 상품으로 취급하듯 병원 환자를 떠나 파업하는 의료 현실은 병원 위주의 진료가 아닌 진정한 환자 중심의 헌신적인 진료의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2024년 개혁 자유주의자 윤석열 대통령의 의료 개혁에 반발해 일어난 초유의 전공의 집단 사직 ‘의료 파행’은 하루빨리 해결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파행이 역설적으로 상급종합병원, 중형병원(병원·종합병원), 의원으로 이어지는 의료 전달 체계를 정상으로 돌려놓고 있는 점은 하나님 은혜다. 전공의 의존도가 높은 서울 ‘빅5′ 병원 등 상급종합병원들은 수술실 가동률을 절반으로 줄이고 중증·응급 환자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증상이 경미한 환자들은 중형병원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환자가 자연스럽게 ‘분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정상적인 의료 전달 체계 모습이다. 평소 응급실을 찾는 환자의 절반 안팎이 응급실에 올 필요가 없는 경증 환자라고 한다. 전공의 집단 사직이 상급종합병원이 제 역할을 찾게 한 것이다. 대형병원들은 하루빨리 전문의 중심으로 바꾸고 이번 사태가 끝나더라도 중증·응급환자 중심으로 운영해야 한다. 이번에 역할을 재발견한 곳이 전문병원을 비롯한 중형병원이다. 중형병원은 평소에도 전문의 위주로 운영해 전공의들 집단행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번 사태와 관계없이 정상 진료와 수술도 가능하다. 대형병원 수준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는 곳도 많아 대형병원의 공백을 잘 메우고 있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특정 질환이나 진료 과목에 대형병원 수준의 전문성을 갖춘 ‘전문병원’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번 사태로 그동안 빅5 병원에 경증 환자가 지나치게 많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지난 2023년 서울대학교병원 노조는 국립대 병원인 서울대병원이 의료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의사 성과급제를 폐지하고 환자들에게 적정 의료시간을 보장해야 한다며 파업을 단행하였다. 서울대병원이 검사 건수에 따라 수당을 받는 의사성과급제를 도입한 이후 의사들이 환자 한 명 한 명을 제대로 진료하기보다 검사 건수를 늘리는 데 주력해왔고 이에 따라 ‘1분 진료’가 관행처럼 굳어졌다는 것이다.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는 3월 14일 오전 회의를 열어 정부와의 협의체에서 논의할 큰 주제로 보건의료정책 개선, 건강보험체계 개선, 전문성 강화, 기타의료제도 개선 등 네 가지를 정했다고 한다. 의사들 총파업이 추구하는 속뜻을 헤아릴 길이 없지만 의사의 역할인 사회의 공공성을 무시하여 총파업을 빌미로 이윤 추구를 노리고 있다면 국민들은 의료 업계에 냉철하게 등을 돌릴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공공병원으로서 역할을 포기하겠다는 의사협회 자세는 국민의 지탄을 면키 어렵다. 병원 수익금을 늘리기 위해 환자에게 위험하고 불필요한 검사를 하면서 어떻게 ‘신뢰받는 병원’, ‘생명의 미래를 여는 병원’, ‘의료선진화’를 추구하겠다는 것인가. 더 나아가 독일 출신 프랑스의 의사, 음악가, 철학자,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인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년 1월 14일 ~ 1965년 9월 4일)가 실천한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그의 고유한 철학을 본받을 수 있을까. 그는 아프리카 의료 봉사에서 더 나아가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작금의 형태는 핵 소유 북한 도당을 코앞에 두고 있는 대한민국의 의사라면 장기려(張起呂, 1911년 8월 14일 ~ 1995년 12월 25일) 박사의 헌신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당대 최고의 외과 의사였던 백인제 교수의 지도를 받아 외과학에 입문했다. 1936년까지 약 270건의 실험에 바탕한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로 1940년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 12월 한국동란의 혼란 중에 처자를 두고 차남 장가용과 함께 월남하였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가 되었다. 1951년 1월 부산 서구 암남동에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을 무료진료하면서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인술을 베풀었다. 그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외과 의사였지만 평생 낮은 곳에서 청빈한 삶을 살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베푼 사회봉사자였다. 1951년 복음진료소(현재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개설을 시작으로 청십자사회복지회, 장애자재활협회 등 각종 복지단체를 세우고 1976년에는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소외계층과 지역사회의 복지증진에 헌신했다. 일생동안 불우한 이웃을 위해 몸소 사랑을 실천했다. 특히, 가난한 환자를 구제하기 위해 1968년 한국 최초의 사설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해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이자 현행 의료보험제도의 효시를 탄생시켰다. 기독교 신앙에 기반해 65년간 인술을 베풀며 봉사, 박애, 무소유를 실천했으며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자신의 돈으로 수술을 해주고 그마저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밤에 몰래 환자를 탈출시키기도 했다. 평생 의사로 일하면서 그는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겠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평생 자기 집 한 채 가지지 않고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았던 그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서울백병원에서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현재까지 이영춘, 문창모, 안영모, 김찬우, 이태석, 안수현 등과 함께 "한국의 슈바이처"라 칭송되고 있다. 지난 2월 28일 김영태 서울대병원장과 송정한 분당서울대병원장, 이재협 서울시보라매병원장은 이날 소속 전공의 전원에게 이메일로 ‘서울대병원 전공의 여러분께’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보냈다. 이들은 호소문에서 “전공의 여러분, 병원장으로서 저희는 당부드린다”라며 “이제 여러분이 있어야 할 환자 곁으로 돌아와 달라”고 했다. 이어 “여러분의 진심은 충분히 전달이 됐다. 중증·응급 환자와 희소 난치 질환을 가진 환자들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많은 환자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는 돌아와 달라”고 했다. “전공의 여러분의 꿈과 희망은 환자 곁에 있을 때 빛을 발하고 더욱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믿고 있다”라고도 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5-8) 김영배 목사(더굳뉴스 발행인)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복음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복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다. 예수님은 성경에 약속된 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다메섹도상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구원 사건으로 선포했다. 바울은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서 십자가 사건을 구원의 사건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확신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일어났으며 이를 선포하고 기록했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다.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시므로 율법을 다 이루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해방 시켜 주셨다. 역사적으로 예수의 율법 요구를 준수하는 것과 관련하여 많은 논의와 토론이 있었다. 소위 예수의 율법 준수를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피동적 순종이라고 했다. 예수의 율법 준수로 의를 획득하여 우리에게 전가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영생을 얻었다는 주장은 배척받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우리의 죄값을 다 치르시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영생이 임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여(빌 2:8) 그의 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삼일절 105주년 기념] 1919년 삼일운동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

[삼일절 105주년 기념] 1919년 삼일운동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

역사학계(민경배, 서정민)에서는 일제강점기의 각 시대별 관계 구도에서 제1기 : 선교사와 일제의 제휴-한국기독교 배타시기(1905- 1919), 제2기 : 선교사와 한국교회의 제휴-일제 배타 시기(1919- 1938), 제3기 : 일제와 한국교회의 제휴-선교사 배타 시기(1938- 1945) 등으로 구분하였다. 치열했던 과거 한국과 한국교회 역사는 한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소용돌이치는 역사였다. 그 역사 한 중앙에 교회가 있었다. 1919년 삼일운동은 일제에 의해 잃어버린 나라의 국운을 되찾기 위한 목숨을 건 일제에 저항운동이었다. 1910년 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한국은 일제의 무력통치로 독립을 시도하지 못하자 독립에 뜻을 품은 이들은 해외로 나가 독립을 모색했다. 대표적인 움직임이 미국과 중국 러시아연해주 등지에서 일어났으며 미국에서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조직되었다. 대한인국민회가 벌인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 1908년 친일파인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었다. 통감부 고문관이었던 스티븐스는 친일 반한 성향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에 도착하자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는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여 미국에 있는 한국교민들에게 분노가 일어나게 하였다. 그는 한국인을 향해 ‘한국은 독립을 유지할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일본이 아니었으면 한국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였다. 이에 장인환과 전명운은 스티븐스를 제거하기로 결의하고 스티븐스가 오클랜드 항구에 도착했을 때, 정명운이 권총을 쏘았으나 불발이었다. 다시 장인환이 권총을 발사하여 스티븐스를 쓰러트렸다. 결국 스티븐스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었다. 국내에서는 한일병탄으로 울분으로 통탄하며 많은 이들이 교회로 찾았다. 이들은 자주성과 자존성을 되찾으려는 새로운 힘을 얻으려 했고 민족애에 대한 새로운 구국운동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일제는 이러한 교회와 기독교를 일본의 식민통치를 위협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위협감을 느꼈다.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된 후에 그들이 중심이 된 ‘신민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서는 신문, 잡지, 서적을 통하여 백성들을 일깨웠고 국외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에 대비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한 애국사상을 바탕으로 했고 독립운동단체로 한국 유일의 비밀 결사대였다. 민족학교로 알려진 평양 숭실학교, 대성학교, 선천 신성학교, 정주 오선학교, 정주 선천교회는 반일감정과 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신민회와 항일운동에 적극 하였다. 엄청난 성장과 반일감정에 대해 일제는 교회와 기독교가 식민지지배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다. 민족운동 교육에 앞장선 선천 신성학교와 강제로 해산된 독립협회의 지도자들이 조직한 신민회야말로 일본에게는 기독교와 더불어 식민통치를 방해하는 상당한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105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일제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을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반일 세력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세웠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11년에 일어난 105인 사건으로 알려진 ‘데라우치총독모살미수사건’이다. 일제는 전혀 있지도 않은 데라우치 총독 살해 음모사건을 날조하여 반일 세력 수백 명을 체포했다. 체포된 123명을 기소했고 그 중 98명이 기독교인이었다. 98명 중 장로교인은 89명이었고 그 중에 88명이 서북지방인 선천과 평양지역 출신이었다. 이 사건은 합법을 가장한 불법 재판, 국내 반일민족세력, 신민회, 서북 출신 기독교 제도자를 제거하려는 음모의 사건이었다. 특히 이 사건으로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 된 후 신민회를 조직하여 여기에 참여한 인사들을 말살하려는 음모였다. 105인 사건 관련자들이 대거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이 발흥할 때 장로교만 아니라 이들 지역의 감리교 지도자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1919년 삼일운동은 처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하여 빠른 속도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삼일운동이 어느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지역과 신분과 연령을 초월하여 한국인들 모두가 참여하는 거국적이고 거민족적인 운동이었다.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3.1운동으로 인해 7,509명이 사망했고, 46,306명이 투옥되었다.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내용이 국내에 전달되었고 국내에서는 학생과 모든 종교계 인사들로 하는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이 결의되자 일은 빠르게 발전되었다. 2019년 2월 18일까지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었고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통고서도 작성되었다. 2월 27일에는 이미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고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적국으로 배포되었다. 학생들은 군중 동원 방법과 시위 방향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전국적인 배포 등의 계획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지도자들은 시위 날짜를 3월 2일로 다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날이 주일(일요일)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측에서 반대하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결정한 날짜는 또 다시 하루가 앞 당겨진 3월 1일로 결정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가 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였다. 원래 계획에는 학생들과 함께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긴급하게 열린 전날 밤 회의를 통해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 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자신들은 따로 태화관에서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태화관에 모인 종교지도자들은 한용운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일제 경찰에게 자신들이 독립선언을 하였다고 자진해서 알렸다. 이를 보고받은 일제 경찰은 기다렸다가 이들을 연행하여 체포하였다. 이 시간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오기만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자 할 수없이 모인 시민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고종의 장례식 참관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지역 사람들은 자연스레 3.1운동을 목격 하게 되었고, 살포된 인쇄물을 몰래 주워 자기들의 지역으로 돌아갔다. 다음날인 3월 2일 정오가 되자 서울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한 종로거리에 400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종로경찰서를 향하여 나갔다. 일제경찰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약 20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다수는 노동자였고, 여러 명의 학생들이 함께 하였던 시위였다. 드디어 3월 5일 서울역 앞에서 학생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오전 8시부터 각 학교 학생들이 서울역 앞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시민들이 함께 모여들기 시작했다. 9시경에 이르자 이들 모임은 수만 명의 대군중을 이루었다. 이 때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인력을 타고 등장했다. 연희전문학교생 강기덕이 나타나 ‘조선독립’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높게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를 계기로 모였던 수만의 군중이 호응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시위는 2일에는 함흥, 해주, 수안, 강서 등으로 번져나갔다. 3일에는 예산과 개성, 곡산과 통천 등으로 확산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3월20일부터 4월9일까지 지속된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절정에 달했다. 곳곳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은 학교와 교회, 천도교의 종교시설을 근거지로 하여 시위를 펼쳐 나갔다. 농민들은 마을과 장터를 근거지로 하여 시위를 벌였고 이것을 본 시민들과 노동자층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한국에는 5일장이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이때는 인근 도시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장터에 모인다. 장터는 일부러 사람들을 모으려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기회였다. 지역의 만세운동은 주로 장터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이러한 역사 가운데 한국의 교회를 관리감독하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미국 선교사들과 함께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디. 이런 가운데 1919년 삼일운동 직전 해에 제7회 총회가 열렸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7회 총회(2018. 8. 31)에서 김선두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부총회장은 창립 독노회에서 노회장이었던 마포삼열 목사가 부총회장이 되었다. 이듬해인 제8회 총회(2019. 10. 4)가 평양부선문밖교회에서 소집되었다. 이때 “회장이 미참”하여 마포삼열 선교사가 개회를 공포했다. 회장의 서간 낭독 : 회장[총회장] 김선두 씨가 본년 3월1일에 조선 독립사건으로 경성대문감옥에 수금되어 본 총회로 보낸 편지에 문암함과 축복함과 회장 직무를 부회장 마포삼열 씨에게 위임한 말씀을 서기가 낭독하매 회중이 슬픈마음으로 받고 부회장이 회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다. 제8회 총회에 보고한 평남노회는 평양부시찰 보고에서 길선주 목사와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경성 감옥에 구금되어 예심중에 있다고 보고했다(제8회 총회록, 2019, 86) 김선두(金善斗, 1876~1949) 목사는 평안남도 평양 출생,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길선주 목사가 시무하는 장대현교회 장로로 임직하였으며, 1909년 장로로서 평양 서문밖교회 목회를 하면서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1913년에 졸업(제6회)하였다. 곧이어 평양 서문밖교회의 청빙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김선두 목사는 총회장 재임 시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삼일독립만세운동을 직접 지휘하였으며, 독립만세 주모자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선교사들은 가석방이라도 얻어 그가 총회를 개회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9월 초에 모이는 총회를 1개월 늦추어 10월 초에 개회하기로 공고되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해방을 맞자 그는 곧 월남하여 박형룡 박사와 함께 서울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재건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평양의 만세시위는 일경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3월 2일부터 3월 5일까지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일제 헌병 경찰은 3월 2일 새벽부터 주동자 체포에 들어갔으며, 3월 8일까지 검거한 인원수만 해도 400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 154명은 태형 혹은 즉결로 처분하고, 주동자로 여긴 48명은 기소하기 위해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겼다. 이날 평양 숭덕학교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에는 모펫(S. A. Moffett), 모우리(E. M. Mowry), 번하이젤(C. F. Bernheisel) 등 네 명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가 참관하였다. 그중 한 사람인 번하이젤(한국이름,편하설 선교사)은 이날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이날은 이 나라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날이다. 전 대한제국 황제 이태왕(李太王, 고종)이 최근에 죽었으며, 모레는 장례식 날로 예정되었다. 그 장례식은 일본제국의 황족의 자격으로, 국장(國葬)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그 장례식은 신도의식(神道儀式)에 따라 엄수되어질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에 매우 분노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장례식이 자기 나라 의식에 따라 치러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례식 때에 서울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많은 소문이 떠돌고 있다. 고(故) 고종 황제를 애도하는 봉도회(奉悼會)가 이 도시에서 열릴 것이라고 며칠 전에 발표되었다. 한 모임은 숭덕학교(기독교계 남학교), 다른 모임은 감리교회, 그리고 세 번째 모임은 천도교 본부에서 각각 열릴 것이다. 천도교는 전국에 널리 퍼져있는 반(半) 종교적이고, 반(半) 정치적인 조직이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요 며칠 동안 분명히 억누른 흥분이 감돌고 있고, 우리는 그때에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 B(S. A. Moffett) 씨와 C(E. M. Mowry) 씨, 그리고 나(C. F. Bernheisel)는 그 모임에 직접 참가해서 우리 눈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기로 했다. AA(선천)의 F(S. L. Roberts) 씨도 후에 늦게 와서 운동장 뒷켠에 서 있었다. 운동장은 3,000명의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는 아주 앞쪽의 한쪽 열 옆으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모든 교회학교와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참석했다. 입구 정면에는 강단이 있었고, 그 주위와 뒤에는 몇몇 목사들과 이 도시의 장로교 임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에는 제5교회(서문외교회)의 목사이며 장로회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4교회(산정현교회)의 강규찬 목사는 이미 고종황제의 생애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친 후 김선두 목사는 이제 송영가를 부르고 축도를 하며 봉도회를 마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다음 순서가 남았으니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어 달라고 말했다. 축도를 한 후, 김선두 목사는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로마서 9장 3절의 두 성경 본문을 봉독했다. 그가 이 말씀을 엄숙하게 읽는 것을 볼 때, 심각한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4교회(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는 정일선이 연단에 올라서서, 읽어서 알려드려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이 그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날이며,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읽지 않고는 못배기겠다고 말했다. 청중들은 굉장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사실상 한국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낭독이 끝나자, 한 사람이 올라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것을 설명했다. 불법적인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모두 주어진 지시에 따를 것이며, 관헌에게 저항하지 말고 일본인 관리나 민간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강규찬 목사가 민족 독립에 대한 연설을 했다. 연설이 끝날 때 즈음에 몇 사람이 태극기를 한 아름씩 건물에서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커다란 태극기 하나가 연단에 걸리자,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태극기가 물결쳤다. 그러고서 우리 모두가 대열을 지어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자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한국교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2024년 시대 속에서 나라와 민족과는 별개의 선교운동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함께 가야하는 공동운명체인가? 정교분리의 원칙은 교회가 국가와 분리된 선교 정책을 펼치는 것인가?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2024년 4월 10일은 총선이 있는 날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국회의원 300명을 선출한다. 어떤 국회원의원을 선출해야 하는가? 아니면 교회는 이러한 민주적 절차의 행위에 무관심 해야 하고,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하는가?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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