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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 생명 15년 연장과 하나님의 구속사“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왕하 20:6) 하나님 말씀이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전해 주었다는 의미이다. 신학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한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자신의 구속경륜을 알려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되 삼위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어떻게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적용되게 해 주셨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아 그분께 경배와 영광을 돌리며,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는가를 알아 순종해야 한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구약은 신약의 계시에 대한 약속이며 근거가 되고 신약은 구약의 약속에 대한 성취이다. 그 약속과 성취의 한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신구약 성경은 삼위 하나님과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계시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고 구원을 이루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효과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는 이러한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부분은 전체를 통해서 확증되고 전체는 부분에 근거를 제공한다. 이러한 통일성의 맥락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해석할 경우, 잘못된 적용이 이루어져 우리의 삶의 파괴한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파괴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해석한 결과이다. 열왕기서의 대상 남 왕국과 북 왕국 열왕기서는 많은 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왕은 이방 나라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수단으로 사용된 이스라엘 나라 왕이다. 여기서 말한 이스라엘이란 하나의 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을 의미하지 않고 분열 왕국을 말한다. 국가 이스라엘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왕 때까지 하나의 국가였으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에 나라가 남쪽과 북쪽으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 남쪽은 남 왕국, 혹은 남 유다라고 했다. 북쪽은 북 왕국, 혹은 북이스라엘이라고 했다. 북 왕국의 실권 지파가 에브라임이어서 약칭으로 에브라임이라고 했다. 남 왕국은 실권 지파가 유다이기 때문에 남 유다라고 했다. 열왕기서를 읽을 때 본문이 북 왕국을 지칭한 것인지 남 왕국을 지칭한 것인지를 잘 확인해야 한다. 열왕기서는 남 왕국과 북 왕국을 번갈아 가며 말씀한다. 역대기서는 남 왕국 중심으로만 기록한 성경이다. 열왕기서와 하나님의 구속사 열왕기서는 남 왕국의 왕들도 하나님께 죄를 범했고 북 왕국의 왕들도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그 죄의 결과 북 왕국은 앗수르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으나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남 왕국은 북 왕국과 같이 그들의 죄악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서의 저자는 남 왕국과 북 왕국의 포로 이후에 과거를 회고하며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 역사는 신약의 구속을 위한 약속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구속사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사는 남 왕국이 북 왕국과 같이 죄를 범했지만, 남 왕국인 유다 왕국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유다 왕국을 통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왕기서나 역대기서는 남 왕국, 남유다 중심이다. 이 유다를 통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였으며, 이러한 역사를 통해 신약에서 약속의 성취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왕들의 모범적 행위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의 왕들의 모범적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라는 성경이해와 묵상을 “모범적 해석과 적용”이라고 한다. '모범'의 사전적 의미는 ‘본받아 배울 만한 본보기’라는 의미가 있다. 왕들의 모범적 행위를 통해서 본받아야 할 것과 본받지 말아야 하는 것을 열왕기서에서 찾아내고 이를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예컨대 왕들이 여호와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 그러자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심판을 받는다. 또한 왕들이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을 잘 섬겼다. 그러자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다. 우리도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순종하자는 형식 논리였다. 소위 왕들의 역사를 위인전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이런 형식의 성경이해와 적용을 우리는 ‘모범적 해석과 적용’이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이런 형식의 모범적 성경해석과 적용은 성경을 인물중심의 자서전적 해석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해 왔다. 소위 성경을 하나님이 아닌 인물 중심의 위인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라고 이를 반대해 왔다. 왕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 모범적 성경해석을 반대하며 구속사적 성경해석을 주장한 사람들은 성경은 왕들 중심의 인물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사를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의미하므로 열왕기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부 구속사 학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강조한다고 해서 구속사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 중심의 구속사를 주장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고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를 개인에게 효과적으로 적용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며, 삼위 하나님 중심의 구속사를 언급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논의된 내용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외면한 모범적 해석과 모범적 해석을 거부한 구속사적 해석은 문제가 있다는 주장들이 있어 왔다. 이런 관점을 이해한다면 열왕기서 왕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혹은 각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계시의 의도를 본문 말씀 속에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본문, 혹은 열왕기서를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경 전체의 통일성 속에서 확인한 후 우리의 삶의 자리로 적용해야 한다. 이때 얼마든지 모범적 적용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 전체의 통일성 속에 하나님의 계시나 구속적 진리를 외면한 채 오로지 인물의 위인전 형식의 모범적 해석과 적용은 주의해야 한다. 히스기야의 생명 15년 연장받은 사건 히스기야 왕이 심한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다. 아모스의 아들인 예언자 이사야가 그에게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너는 이제 죽을 것이다. 그러니 네 집안일을 정리하라. 너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러자 히스기야 왕은 벽 쪽을 바라보며 여호와께 기도를 드렸다. 기도 내용은 자신이 언제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께 복종하고,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슬프게 울며 기도했다.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했다. 이때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었고 그의 눈물을 보았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병을 고쳐 주시겠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히스기야가 병 고침을 받아 15년 동안의 생명을 연장받았다. 이 사건 해석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집을 정리하라고 한다. 문자적 의미는 “너는 네 집에 대하여 명령하라”라는 뜻이다. 곧 죽기 전에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왕으로서 국정(國政) 인계를 하라는 뜻이다. 평행 구절인 이사야 38:1에는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이다. 왕상 20:1절에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미래형 동사로서 임박한 가까운 미래를 가리킨다. 또 이러한 임박한 죽음은 병 때문인데 이 병으로 인한 임박한 죽음의 이유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며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했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여호와께로만 향하겠다는 믿음이다. 또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스기야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왕으로서 모든 일정을 중지하고 오직 여호와께만 전심전력(全心全力)하여 매달린 모습을 보여준다. 히스기야는 남 왕국의 왕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창세기에서부터 흐르는 하나님의 약속과 구속은 유다를 통해서 이루어진다(창 3:15, 49:10 등 참조). 북 왕국은 언약 밖의 계열로 왕위가 정통성 없이 배반과 쿠데타로 이어졌다. 결국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가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남쪽 유다 왕국은 창세기에서부터 약속한 하나님의 구속의 라인인 유다 지파를 통한 유다 왕국을 통하여 왕위가 계승되며, 이 왕위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이어진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대한 마태복음 1:12절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라는 본문을 주해하면서 “다윗의 후손들이 왕 노릇을 하다가 종살이와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 복음서 기가는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포로 생활은 죽은 거나 다름없었는데, 이 유대인들이 다시 한 백성으로 모이고 또 아 왕권의 어떤 남은 자들이 다윗 계통을 통해 존속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뛰어난 섭리가 아니면 불가능했었다는 것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야곱이 ‘홀(왕의 지팡이)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창 49:10)라고 예언한 그대로다. 이 백성의 분산이 아무리 비참하고 슬픈 것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꺼지지 않고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히스기야 왕은 반드시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아들이 없을 때 죽음의 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15년 생명 연장을 받았다. 연장받은 15년 동안 아들 므낫세를 낳았다. 히스기야에게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생명을 15년 생명 연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열왕기하 21:1에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12세였다. 그렇다면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받은 후(6절)에 얻은 아들임이 분명하다. 히스기야의 15년 생명을 연장받은 기도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경륜 가운데 주어진 사건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할지라도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중단시킬 수 없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 적용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는데 간절히 기도하자 생명을 15년 동안 연장받았다.” 우리도 “간절히 기도하면 생명을 15년 동안 연장받은 응답을 받는다”라고 적용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해석을 모범적 해석과 적용이라 한다. 이런 식의 해석은 히스기야 왕의 15년 생명 연장받은 사건을 잘못 해석하므로 나타난 현상이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잘못 적용되고 만다. 물론 우리는 히스기야 처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어려운 상황이 올 때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아야 한다. 제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기도 본문을 읽고 곧바로 나에게 가지고 오기 전에 먼저 구속사적, 성경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나에게 가져와 적용해야 한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은 생명을 15년 연장해 주시므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중단되지 않고 이어져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히스기야의 기도와 생명 연장받은 사건은 우리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주권적으로 이끌어가신다. 역사의 현장에서 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을 통해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는 신앙고백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그 응답의 내용과 시기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우리는 그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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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역사적 성경연구 제10강 : 출애굽기(하나님의 능력과 왕권 율법)구속 역사적 성경연구 제10강 : 출애굽기(하나님의 능력과 왕권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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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통일당의 정치-종교적 신념의 실험대자유통일당은 제22대 국회의원 투표(2024. 4. 10)에서 지역구는 물론 당득표율은 총 64만 2천433표로 2.26%를 얻어 비례대표 한 석도 내지 못했다. 제20대 총선에서 기독자유당으로 도전하여 2.63%, 제21대 총선에서는 기독자유통일당으로 도전하여 1.8%를 얻었다. 이번 제22대 총선에서는 2.26%를 얻는 데 그쳤다. 자유통일당은 지역구에 10명의 후보를 냈으며, 비례대표는 20명의 후보를 내세웠지만, 당선의 벽은 높았다. 전광훈 목사의 자유통일당은 이승만의 4대 건국 정신인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 입국론의 기치를 들고나왔다. 정의로운 사회는 정치를 통해 실현된다면, 교회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가? 교회는 정치에 대한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어도 정치에 직접 관여할 수는 없는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정교분리원칙은 교회는 정치에 직접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그리스인들의 인식 저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전광훈 목사 중심의 자유통일당은 정교분리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제기하며 그 논리적 모토를 이승만의 4대 건국 정신을 가지고 왔으며, 이를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근거로 내세웠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보수 교단은 교회의 현실적인 사회 참여를 육적이며 세상적인 가치로 평가하지만, 오로지 교회는 영적인 일에만 참여해야 한다는 영•육 이원론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시각과 관점은 교회가 정치에 참여한 것은 영적인 신앙생활에 반한 세상적인 일로 치부했다. 따라서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치 참여는 개인적인 내심의 문제로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런 이유로 국회의원 투표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투표는 종교적 신념보다 개인적인 정치 신념이 판단의 근거로 투표하기에 이르렀다. 자유통일당의 이승만의 4대 건국 정신에 반한 당론을 가지고 있거나 그런 성향을 지닌 후보일지라도 선택의 기준은 종교적 신념이 아닌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는 정치적인 신념이 우선이었다. 이런 이유로 교회의 우파와 좌파 구분은 의미가 없어졌다. 교회 신자 중에 좌파적 정치 성향이 있고, 반대로 우파적 정치 성향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호남의 더불어민주당의 전폭적인 지지, 영남의 국민의힘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는 그리스도인의 종교적인 판단이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표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전광훈 목사의 자유통일당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종교적 신념이 정치적 신념보다 앞서야 한다며, 정치 현실이 되어 버린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 입국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이를 현실정치에 투영하기를 원한다. 이에 반대한 정치적 이념을 특정하여 좌파로 공격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며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이는 남북으로 대치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 상황과 맞아떨어졌다. 이러한 정치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는 자유통일당 지지자들은 다른 정당 지지자들보다 더욱더 적극적이다. 이들은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신념이 결합하면서 좌파들로부터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상황에서 분연히 일어선 시대의 불침번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번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당투표에서 64만 2천433표의 지지를 받았다. 이 지지는 마치 우리나라 60만 명 군대와 같은 지지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통일당의 60만 지지자는 다른 정당 지지자들과는 그 성향이 다르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신념과 종교적 신념이 결합한 자유통일당 60만 명은 스스로 현 정부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자처하고 있다. 자유통일당이 한 명의 국회의원과 비례대표를 국회에 진출시키지는 못했지만, 이승만의 3대 건국 정신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좌파와 공산화를 막는 마지막 보류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자평하고 있다. 여론을 형성하며 주도적으로 정치와 종교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유통일당의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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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국회의원 김포시 더불어민주당 김주영, 박상혁 후보 당선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2024. 4. 10.에 진행되어 300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김포시는 더불어민주당 김주영 후보와 박상혁 후보가 당선됐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포시 김포갑 선거구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주영 후보(62세)가 당선됐다. 더불어민주당 김주영 후보는 69,836표(54.27%)를 얻었으며, 국민의힘 박진호 후보는 58,841표(45.72%)를 얻어 김주영 후보가 10,995표 차이로 당선됐다. 김포갑 총 선거인수는 186,262명이었으며, 투표수는 129, 846명이었다. 무효투표수가 1,169표였으며,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기권자 수는 56,416명이었다. 투표율은 69.71%였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포시 김포을 선거구에서 더불어민주당 박상혁 후보(51세)가 당선됐다. 더불어민주당 박상혁 후보는 74,556표(55.52%)를 얻었으며, 국민의힘 홍철호 후보는 59,717표(44.47%)를 얻어 박상혁 후보가 14,839표 차이로 당선됐다. 김포을 총 선거인 수는 209,555명이었으며, 투표수는 135,635명이었다. 무효투표수가 1,362표였으며,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기권자 수는 73,920명이었다. 투표율은 64.72%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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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설교] 허탄한 듯 보이는 예수님의 부활기독교는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던마크 철학자 키엘케고르는 기독교 신앙을 역설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역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요, 그 역설 때문에 거리껴 넘어지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파라독스”라고 하는 이 역설이라는 말은 표면상 논리적인 모순인 것 같은데 사실은 아주 높은 차원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이런 역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낮은 자가 높아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자가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같은 것들은 꼭 정 반대 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같은 이야기의 이면에는 더 깊은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설적인 진리를 우리들은 믿는다. 주후 2-3세기에 살았던 로마의 법률까요, 평신도 신학자였던 ‘터툴리안’은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 즉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논리적이면 오히려 믿을 가치가 별로 없지만 그것이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믿을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것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이것은 엄연한 진리입니다. 이같은 부활의 복음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는 부활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부활을 허탄한 이야기로 믿지 않는 사도들 오늘 읽은 누가복음 24장에는 부활 사건을 역설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가보니 무덤은 비어있고 천사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여자들이 처음에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나중에 제자들에게 가서 보고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이 24:11절에 기록됩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즉, 그 여자들이 말하는 것이 허탄하게 들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허탄하다”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무의미하다, 난센스다, 혹은 쓸데없는 소리다”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시대에서는 의학 용어로 어떤 사람이 열병에 걸려 병이 너무 심해서 중얼중얼 헛소리 하는 것을 이 “허탄”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소리를 제자들은 마치 열병 걸린 사람이 제 정신을 잃고 헛소리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허탄한 이야기가 아니다 첫째, 제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직접 보았고 그 무덤밖에 큰 돌을 갖다 놓고 심지어 거기에 봉인하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무시하고 믿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기준을 자신들이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이 ‘허탄하다’는 말은 ‘난센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무의미한 말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빈 무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은 헛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그 헛소리가 나중에 가장 말이 되는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의미의 근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허탄하다고 말하는 그 소리가 오히려 허탄한 말이 되었습니다. 부활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가정 큰 의미를 제공해 준 우리 삶의 모든 의미의 근본이 되는 의미입니다. 셋째, ‘허탄하다’는 말은 “쓸데없는 소리, 아무 도움도 안되는 소리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무엇이 쓸데 있다’ 또는 ‘쓸데 없다’라는 기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쓸데없는 소리’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사실로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쓸 데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무 소용없는 것 같이 들렸을지 모르지만 사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고전15:14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입니다. 3. 사도들은 왜 허탄한 행동을 하고 있는가? 눅 24:5절에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합니다. 이들의 행동이 허탄한 짓입니다. 본문 24:6절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7절에서는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같은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허탄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허탄한 짓을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 사실 자체를 허탄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부활을 믿지 못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생각의 기준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때 출세하려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천군 천사들을 불러다가 로마를 다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려는데 한몫 참여해야겠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경험과 자기들의 생각으로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얼마나 허탄한 생각입니까? 자기 나름대로 생각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은 어리석음을 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자꾸 잊어버리니까 기억하라고 한 것입니다. 결 론 우리들이 세상적으로 너무나 똑똑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허탄한 이야기로 듣는 허탄한 사람이 되면 안 되겠습니다. 세상의 똑똑함이 오히려 나에게 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허탄한 사건으로 돌림으로 인생의 참된 삶을 살지 못한 자들이 되면 안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예수님과 같이 부활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같은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허탄한 인생을 사는 자들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말씀사역원 - 소재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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