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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휴전협정 70주년(1953.7.27.-2023.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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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논단

한국전쟁 휴전협정 70주년(1953.7.27.-2023.7.27)

 휴전 협정 조인식 © 리폼드뉴스


한국 전쟁 정전협정(1953년 7월 27) 70주년을 맞이했다(2023. 7. 27)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Eisenhower)는 미국의 34대 대통령(1890~1969)이다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유럽 연합군 최고 사령관을 맡기도 했다그는 1952년 11월에 한국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이어 1956년에 재선되었다.

 

아이젠하워(좌)와 스탈린(우)  © 리폼드뉴스

당선 직후 아이젠하워는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한국인들은 한국에 온 미국의 대통령을 열열히 환영했다당시 미국과 소련에서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952년 11월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53년 3월 5일에는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했다강철에 사나이라는 공산권 최고 통치자가 죽음 것이다.

 

이는 곧 전쟁 종식이 멀지 않았음을 뜻했다스탈린의 장례식 직후 소련은 긴급 각료회의를 열었고 그 자리에서 휴전대담 재개를 결정했다새 지도부는 소련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그래서 휴전 회담은 급물살을 탔다. 

 

1953년 4월 10일에 유엔측과 공산측은 부상포로 협정에 서명했다회담장에서 포로 문제가 논의된지 1년 4개월 만이었다부상포로 교환은 4월 20일부터 시작되었다유엔측은 6천 6백 70명을 보냈고 공산측은 684명을 돌려보냈다.

 

  이승만 © 리폼드뉴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부상포로들도 북으로 돌아갔다. 포로들은 이동중에 인공기를 흔들며 비록 포로의 신분이지만 아직 공산주의 정신이 건재함을 드러내려 했다그들은 유엔측이 제공한 옷과 신발담배 등 자유 진영의 모든 것을 벗어던졌다. 

 

부상포로 교환이 시작되자 한국에서는 휴전 반대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서울에서는 연일 휴전 반대 집회가 열렸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만 명의 군중이 집회에 참석했다북진통일을 주장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일 벌어졌다.이들이 외친 구호는 통일없는 휴전은 결사 반대였다.

 

남한 사람들은 피흘리는 이 전쟁이 그만 끝나기를 바랬다그러나 지금 휴전을 받아들이기에는 불안감이 너무나 컸다그것이 사람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정전을 코 앞에 둔 6월 18일부터 약 5일간, 2만 6천 명이 넘는 반공포로들을 석방해 버렸다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특사까지 파견해 가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설득했다이때 미국은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로버트슨 특사를 파견해 이승만과의 타협을 모색했다.

 

한국전쟁 발발 3년이 되는 1953년 6월 25일 로버트슨 특사가 한국에 도착했다이튼날부터 이승만과 로버트순 특사와 작은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보름간의 줄다리기 끝에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상호방위조약과 경제원조를 보장받는 대신 휴전을 방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휴전협정을 눈 앞에 둔 7월 공산군의 마지막 대 공세가 펼쳐졌다공산군의 공세는 한국군의 방어하고 있는 중부전선 금성지구에 집중되었다남한의 유일한 전력 공급은 화천발전소가 그곳에 있었다이 시기 포탄 소비량은 전쟁 기간 중 최대치를 기록했고 사상자도 15만 명에 달했다금성 전투는 한국 전쟁 말기인 1953년 7월 휴전이 임박해지고 있을 때금성 지역 북방에 위치한 금성지구에서 대한민 국군과 중공군이 치른 전투이다.  7·13 공세라고도 한다.

 

휴전햡정 서명지  © 리폼드뉴스

 

전쟁의 끝그날이 다가왔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159회 본회의를 끝으로 정전 협정이 조인되었다양측 대표인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 중장과 북한과 중국 공산군을 대표한 남일 조선인민군 대장은 2년 전 첫 화담 때처럼 인사 한마디 없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현정 문서에 서명을 했다이날 협정의 정식 명칭은 정전협정이었다현정문은 한국 충돌을 정지하기 위하여라고 언급된 전문과 5조개 64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협정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조미전쟁 휴전협정-정전협정본문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하기의 서명자들은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서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기조항에 기재된 정전조건과 규정을 접수하며 또 그 제약과 통제를 받는데 각자 공동 상호동의한다이 조건과 규정들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며이는 오 한국에서의 교전 쌍방에만 적용한다.

  

한국 전쟁을 종결하는 조인식장 어디에도 남한 관계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수석 대표들의 서명 후 군사협정문은 군사 지휘관들에게 전달되었다유엔군 사령관 클라크가 문산 유엔군 전방 사령부에서 협정문에 서명했다북한의 김일성은 그날 오후 10시 평양에서 서명했다.

 

다음날 개성에서 중공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가 서명하므써 휴전조인이 마무리 되었다협정문에 서명하면서 1950년 북한 공산군의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3년 1개월 2일 만인 이날 밤 10시에 한반도에서 긴 총성이 멎었다이승만만이 참전 당사국 중 유일하게 협정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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