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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자기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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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논단

설교자의 자기반성

[삼위 하나님 중심의 구속사] 종교개혁 506주년 기념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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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일차적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소개하는 일이다. 이는 성경이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고안해서 만들어낸 막연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이여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다. 


이러한 믿음이 전제될 때 그리스도교가 성립된다. 설교자는 성경을 원천으로 하여 설교를 한다. 그 설교는 결국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소개하는 것이 일차적인 임무다. 이러한 임무를 소홀히 할 때 그 설교는 설교로서 기능이 상실된다.


설교자가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성경 구절을 제시하는 형식의 설교 유혹을 받는다. 성경은 성경 스스로가 입증한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임을 성경이 스스로 입증한다. 이 입증이 권위가 있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천 년 기독교 역사는 이 성경을 특별계시로 접근하면서 신적 권위와 그 권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성육신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체계화 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모든 성경”을 포함한다. 모든 성경, 즉 구약과 신약인 66권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는 그리스도교, 즉 기독교에서만 가능한 진리이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유일한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를 대신하고 우리 모두를 대표한 대속의 죽음이었다. 이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이다. 여기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가 성립된다. 이러한 세 가지 교리, 즉 삼위일체, 성육신, 이신칭의 교리는 성경의 핵심 내용이며, 이는 오직 그리스도교에서만 가능한 교리이다. 


신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유대교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우리가 말하는 구약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이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율법의 행위로 주어진다고 믿는다. 유대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 인간으로서 선지자일 뿐이다. 그는 한 인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하나님의 계시자 등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구원관 역시 모세율법을 지켜야 구원이 임한다고 주장한다. 즉 행위 구원을 주장한다.


어떠한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구원이 달라지는데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신지식을 부인하고 거부한다.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복음에 근거하면 유대교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유대교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교(기독교)는 구원이 없다. 이는 특별계시인 성경과 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되 어떠한 하나님, 어떻게 계시된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구원관이 달라진다.


설교자는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이 있다. 본문 없이 설교하는 경우는 없다. 모든 설교자는 성경 본문을 읽고 그 본문을 통해서 설교한다. 설교자의 강박관념은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오직 청중들을 설득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성도의 실천적 행위를 강조한다. 그래서 언제나 설교는 세상적인 이야기, 교훈적이고 도덕 윤리적이고 훈계식이다. 물론 설교는 이런 요소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오직 이런 것으로만 설교가 구성되어 있다면 문제가 된다.


여기서 필자가 제한하는 것은 설교자는 먼저 청중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실천적 행위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으로 소개(계시)되고 있는가”라는데 초점을 맞추어 보자는 것이다. 첫째, 본문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이야기하기 위해 본문이 속한 각 권을 살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 더 넓게는 본문이 구약성경일 경우, 구약성경 전체를 살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셋째,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 속에서 살펴야 한다. 넷째, 본문이 신약성경일 경우, 신약성경 전체 속에서 살펴야 한다. 다섯째, 구약성경 전체 속에서 살펴야 한다.


이러한 설교를 위해 신구약 성경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성경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에 관해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본문에 등장한 다양한 인물, 사건, 역사 등을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이 부분을 청중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을 간단명료하게 해야 한다. 설교자도 이해하지 못한 이야기를 청중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설교에서 적용은 두 번째 이야기이다. 먼저 본문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전후 문맥과 맥락, 각 권과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면서 핵심적인 내용을 설명해 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는 설교자의 성경 해석에 대한 일차적인 책무이다. 이 부분을 바르게 수행하지 못하면 설교자로서 그 직무를 바르게 수행하지 못한다. 이런 부분을 무시한 설교는 설교자가 아니어도 설교를 흉내 낼 수 있다. 설교자가 아니어도 일반 신도들도 설교를 흉내 낼 수 있다.


설교자가 많은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장점이다. 그러나 많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알고 있는 것을 성도들의 수준에 맞게 쉽게, 이해되도록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핵심을 요약해서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점정리’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런 요점정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학습해 왔다. 대화를 나눌 때 핵심적인 요점이 중요한 것과 같이 설교할 때 본문의 내용의 핵심적인 요점을 청중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할 경우, 일차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는가? 그것은 청중들이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알게 되고 믿게 된다. 이러한 믿음은 내적 변화를 일으킨다. 물론 이는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에 관해 소개를 받을 때 성령께서 설교를 듣는 자들을 감동하게 한다. 내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면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셔서 성도들의 감동과 내적 결심과 결단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으며(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엡 6:17)이다. 성령의 검인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말씀을 증거하면 성령께서 듣는 청중들의 삶을 변화할 수 있도록 적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소개한 후 구체적으로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가?" 구체적인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본문의 모범적인 교훈을 통해 성도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설교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특별한 자신의 의도된 목적을 위해 강연 형식의 이야기를 한 후 마지못해 성경 본문을 인용하는 식의 설교는 2천 년 교회 역사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교회 최대의 위기는 이 문제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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