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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17] 누룩, 확산하는 죄의 영향력본문 / 고전 5:6-8 [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5:1-5절 말씀을 통하여 “사단에게 내어 준 자(음행)”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거룩한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성결성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5장에서부터 6장 20절까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방종과 도덕적 타락을 지적합니다. 고린도 지역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나타난 도덕적 타락, 성적 타락이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특별히 교인 중에 아버지의 여자(부인)를 취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이방인도 멀리하는 일이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서 이러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아니할 때 출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교회 내 분쟁과 범죄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의 거룩성을 위해 이들에 대한 권징(권선징악)으로 징계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러한 말씀에 이어서 본문 말씀을 통하여 “누룩과 같이 확산되는 죄”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면서 어떻게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여야 하는가? 우리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1.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한 누룩을 주의하라(6) 본문 6절,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교회의 거룩성이 무너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6, 상) 사도 바울은 먼저 6절을 시작하면서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라고 합니다. 무엇을 자랑한다는 말입니까? 지금 고린도 교회는 구성원 가운데 음행한 자로 인해 교회의 거룩성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자만과 자랑에 빠져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디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나 영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이 드러나야 하고 자신들의 세상적인 가치관을 자랑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지역의 문란한 성적 타락의 환경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살고있는 지역적인 환경은 언제나 문란한 성적 타락이 정상적인 생활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그런 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 중에 고린도 지역의 사람들도 끔찍한 음란, 즉 계모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런 행위를 그냥 모른 척 하고 묵인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건은 하나님의 거룩성, 교회의 순결성을 훼손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교회가 이런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음행의 사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훼손됩니다. 또한 이런 사건은 고린도 교회의 공동체 전체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데 그들은 교만과 자만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랑이 아니면 살맛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교린도 교회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잘못하고 있는 아들을 꾸짖듯이 꾸짖고 있습니다. 둘째, 죄는 누룩처럼 번지는 속성이 있습니다(6, 하). 본문 6절 하반절에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적은 누룩이 반죽 덩어리 전체를 부풀게 한다”라는 격언을 언급합니다. 이러한 언급은 결국 죄라는 속성은 주변을 물들게 하는 퍼지고 확산하는 속성을 말하면서 그 위험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9절에서도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격언은 죄는 마치 적은 누룩과 같지만 온 덩어리에 퍼지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죄를 방치하였을 때 온 교회를 물들게 합니다. 온 교회에 퍼져 교회의 거룩성이 훼손됩니다. 이런 교회는 영적인 진리에 대한 문제, 거룩성에 대한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세상적인 방법이 동원됩니다. 그 결과 교회는 분쟁으로 혼란을 겪습니다. 분쟁하는 교회의 특징은 하나님의 거룩성이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복음적이지 못합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매듭이 풀리지 않습니다. 매듭이 더욱 단단해져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분쟁 가운데 있는 고린도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도는 이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2. 교회의 거룩성을 위해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7) 본문 7절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분에서 ‘누룩’을 언급합니다. “누룩 없는 떡”에 대한 유월절을 떠오르게 됩니다. 출애굽기 12:14-15절에 “너희는 이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라고 합니다. 이어서 15절에서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라고 합니다. 이날은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마지막 날 밤에 지켰던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해방 받은 날에 지켰던 유월절을 기념하며 이 절기를 광야 생활 이후 계속 지켰습니다. 7일 동안 계속된 유월절 절기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교병만을 먹어야 했습니다. 이 관습에서 ‘누룩’은 더러움의 상징, 죄의 영향력에 대한 상징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 의해서 고린도 교회 교인에게 누룩 없는 새 반죽 덩어리가 되기 위해서 죄악의 묵은 누룩을 버리라고 합니다.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셨으므로 우리는 누룩 없는 사람, 즉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교회 내에서 죄를 멀리하고 성결성을 유지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덕적 순결성 회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롬 6: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절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3.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거룩성을 지키자(8) 고전 5:8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라고 합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이러므로”, 즉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이 말씀에 8절 이전에서 말씀한 내용에 대한 어떤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것이 8절에서 말씀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악의 묵은 누룩은 우리에게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오직 순결함과 진실함, 누룩 없는 빵으로 유월절을 지키듯이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구원의 축제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듯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축제 속에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악독함과 사악함의 묵은 누룩을 쓸어 버려야 합니다. 교훈과 적용 누룩은 확장되어 퍼져가는 것을 의미할 때 사용합니다. 좋은 의미로 퍼져 확산하여갈 때도 ‘누룩’이라는 말씀을 사용합니다. 또한 반대로 안 좋은 방향으로 퍼져 확산하여갈 때도 누룩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3:33절에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라고 하면서 천국을 설명했습니다. 막 8:15절에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누룩은 부정적인 의미의 잘못된 교훈, 혹은 진리의 반대 개념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5:6-8절에서 누룩은 죄악을 의미합니다. 죄악은 누룩과 같이 확산하여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죄악이 확산하지 않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라는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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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목사의 『신비의 계시 로마서』 출간『신비의 계시 로마서』 -소재열 지음, 신국판 양장, 브엘북스刊, 960쪽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롬 16:25-27) 목사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선포한 일은 소중한 일이요, 거룩한 일이다. 이 거룩한 복음의 선포 사역을 진행하면서 로마서를 출판할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칼빈은 “성경은 로마서에 비춰볼 때 비로소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라고 했다. 로마서의 신지식의 근거는 신적 계시에 두고 있다. 로마서는 종교개혁자들의 가슴을 움직여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라는 이신칭의 교리는 종전의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와 함께 교회를 지탱하는 초석이 되었다. 이신칭의 교리는 성경의 신적 계시와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 결국 이 두 교리를 이해하고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신득의 교리는 이해할 수 없다.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 그리고 이신칭의 교리는 하나님의 신비한 계시에 근거하고 있다. 로마서는 “신적 계시”에 근거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변화에 대해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라고 한다(갈 1:12).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가서 그곳에서 3년을 지냈다(갈 1:17-18). 비기독교인들은 바울이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수도 생활을 하여 깨달은 바를 전하여 바울의 종교를 창건했다고 이를 기독교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 은혜와 평강의 원천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진다고 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격으로 말씀한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방인의 구원 계시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다’라는 유대인들의 논리를 반박해야 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행위 구원론을 반박하면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진리를 말해야 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행위 구원의 조건인 율법 준수를 반박해야 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율법에 관해서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교리와 성육신 교리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로마서는 삼위일체 교리와 성육신 교리, 이에 근거한 이신칭의 교리를 신적 계시로 설명한 내용이 바로 로마서이다. 이런 관점은 로마서를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명제를 남겼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가’라는 구원받은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혹은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라는 관점으로부터 로마서를 리딩해야 한다. 필자는 입대하기 전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재학생들이 모여 하기 수련회에서 로마서를 공부할 때 봉사자로 참여하면서 로마서를 공부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공부했다. 목사가 된 이후 5회 정도 로마서를 강해한 경험이 있다. 그때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된 복음과 율법,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목회적 차원에서 성도들에게 어떻게 쉽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늘 고민이었고 숙제였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율법의 기능과 은혜 아래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율법의 기능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이런 고민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의도한 계시라는 맥락, 즉 하나님 중심적 접근으로 해결하였다. 필자는 민법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칼빈의 로마서의 율법에 대한 접근을 이해할 수 있었다. 로마서는 지금도 학자들마다 관점의 다른 형태의 논지를 주장하면서 계시 이해가 점진적으로 발전되고 있다. 본서는 필자의 신앙고백과 같은 측면이 있기도 하다. 본서의 독자들이 성경의 중심 맥락을 이해하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로 역동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추천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이신칭의’에 있음을 말씀한다. 소재열 박사는 이신칭의 교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말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교리임을 밝히고 있다. <김종준 목사 추천서 중에서> 『신비의 계시 로마서』는 저자가 로마서의 렌즈를 통해서 성경 전체를 볼 수 있다는 칼빈의 혜안(慧眼)을 깨닫고 로마서를 해설한 책이다. 『신비의 계시 로마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믿을 뿐 아니라 복음대로 살면서 복음을 전파함으로 복음 감격의 파문이 일어날 것을 기대한다. <권성수 목사의 추천서 중에서> 저자인 소재열 목사는 본문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드러내는 하나님 중심적 접근을 추구하였다.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하였고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로마서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김창훈 교수의 추천서 중에서>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의 구속역사 관점으로 성경과 설교를 연구하신 소재열 박사님께서 이번에 펴내신 &#65378;신비의 계시 로마서&#65379;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쉽게 로마서의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김순정 목사의 추천서 중에서> 목 차 본서를 펴내면서 _ 3 목차 _ 11 로마서, 하나님 중심적 관점 이해를 위한 전제들 _ 19 삼위일체론 적인 성경 이해 _ 21 로마서의 복음과 율법 _ 26 하나님의 자기계시 _ 44 창조 계시 기록과 영감 _ 50 창세기 3:15, 49:10의 메시아 약속 _ 55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 교리 그리고 이신칭의 교리 _ 60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 _ 68 하나님의 주권과 죄 _ 75 히브리어 성경과 구약성경 _ 85 로마에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_ 95 로마서를 위한 인간론 _ 99 바울의 삼위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 _ 106 로마서 강론 _ 109 로마서 제 1 장 제1강 서론, 로마서의 기록목적과 복음 (1:17) _ 111 제2강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 (1:1-2) _ 120 제3강 하나님의 아들(1:2-4) _ 134 제4강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 (1:5-7) _ 144 제5강 로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감사기도 (1:8-15) _ 153 제6강 빚진 자 (1:13-15) _ 162 제7강 부끄럽지 않은 복음 (1:16) _ 170 제8강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1:17) _ 179 제9강 하나님의 진노 (1:18-20) _ 188 제10강 창조 계시와 특별계시 (1:18-20) _ 198 제11강 핑계치 못한 구체적인 구체적인 죄의 모습들 (1:21-23) _ 206 제12강 진노, 심판의 구체적인 모습 (1:24-2) _ 215 제13강 부끄러운 욕심, 성적 타락 (1:26-27) _ 222 제14강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 (1:28-32) _ 230 로마서 제 2 장 제15강 그러므로 판단하지 말라 (2:1-3) _ 238 제16강 하나님 진노의 그 날 (2:4-5) _ 250 제17강 하나님 심판의 기준 (2:6-11) _ 257 제18강 심판의 원칙에 충실하신 하나님 (2:12-16) _ 267 제19강 하나님 이름을 모독한 유대인 (2:17-24) _ 278 제20강 할례가 구원의 조건인가? (2:25-29) _ 287 로마서 제 3 장 제21강 신실하시며 의로우신 하나님 (3:1-8) _ 297 제22강 다 죄 아래 갇힌 인간 (3:9-18) _ 309 제23강 율법 아래 있는 자, 율법의 기능 (3:19-20) _ 320 제24강 이제는, 하나님의 한 의 (3:21-26) _ 335 제25강 구원의 근거, 세 가지의 질문과 답변 (3:27-31) _ 348 로마서 제 4 장 제26강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4:1-8) _ 358 제27강 아브라함의 믿음과 할례와의 관계 (4:9-12) _ 371 제28강 믿음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 (4:13-16) _ 379 제29강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 (4:17-22) _ 392 제30강 십자가와 부활은 구원의 사건 (4:23-25) _ 404 로마서 제 5 장 제31강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5:1-2) _ 414 제32강 환난과 인내 그리고 소망 (5:3-5) _ 423 제33강 하나님의 사랑 (5:6-8) _ 432 제34강 십자가의 피와 저주 (5:9-11) _ 439 제35강 세상과 죄, 죄와 사망 (5:12-13) _ 447 제36강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 (5:13-14) _ 455 제37강 아담에서 그리스도까지 (5:15-19) _ 463 제38강 넘치는 은혜, 율법과 복음 5:20-21) _ 472 로마서 제 6 장 제39강 죄에 대해 죽은 우리 (6:1-4) _ 480 제40강 세례와 연합 (6:5-7) _ 487 제41강 믿음의 근거십자가와 부활 (6:8-11) _ 494 제42강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라 (6:12-14) _ 502 제43강강 죄의 종과 순종의 종 (6:15-19) _ 510 제44강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6:20-23) _ 518 로마서 제 7 장 제45강 저주와 율법의 권세로부터 해방 (7:1-4) _ 525 제46강 그때와 지금 (7:5-6) _ 533 제47강 율법이 죄냐 (7:7-12) _ 541 제48강 신령한 율법과 드러난 죄 (7:14-20) _ 553 제49강 둘로 분열된 자아오직 예수 (7:21-25) _ 562 제50강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7:25) _ 570 로마서 제 8 장 제51강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1-6) _ 577 제52강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성육신 (8:3-4) _ 585 제53강 육신과 사망, 성령과 생명 (8:5-11) _ 595 제54강 양자의 영, 아바 아버지 (8:12-17) _ 605 제55강 구원의 회복과 소망 (8:18-25) _ 614 제56강 성령의 기도 (8:26-27) _ 621 제57강 구원의 섭리와 경륜 (8:28-30) _ 629 제58강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8:31-34) _ 637 제59강 끊을 수 없는 사랑 (8:35-39) _ 645 로마서 제 9 장 제60강 그 리스도 안에서 참 이스라엘 (9:1-9) _ 653 제61강 주권적 하나님의 선택 (9:10-13) _ 661 제62강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9:14-18) _ 669 제63강 토기장이와 그릇 (9:19-23) _ 677 제64강 남은 자 (9:24-29) _ 684 제65강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 (9:30-33) _ 692 로마서 제 10 장 제66강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10:1-4) _ 699 제67강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 (10:5-10) _ 707 제68강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10:11-13) _ 715 제69강 좋은 소식인 복음 (10:11-15) _ 723 제70강 말씀을 전파해도 믿지 않는 자들 (10:16-21) _ 730 로마서 제 11 장 제71강 은혜로 택함 받은 남은 자 (11:1-6) _ 737 제72강 택하심을 입은 자와 완악한 자 (11:7-10) _ 744 제73강 부르심과 소망 (11:11-16) _ 752 제74강 주제넘게 굴지 말라 (11:17-24) _ 760 제51강 하나님의 비밀 (11:25-32) _ 766 제76강 깊도다 그 풍성함이여 (11:33-36) _ 773 로마서 제 12 장 제77강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12:1-21) _ 778 제78강 산 제물과 영적 예배 (12:1-2) _ 786 제79강 몸의 지체 (12:3-5) _ 793 제80강 은혜의 은사 (12:6-21) _ 801 로마서 제 13 장 제81강 선한 시민의 의무, 권세와 복종 (13:1-7) _ 810 제82강 사랑은 율법의 완성 (13:8-10) _ 822 제83강 마지막 종말의 때 (13:11-14) _ 830 로마서 제 14 장 제84강 서로 비판하지 말라 (14:1-12) _ 838 제85강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 (14:13-23) _ 850 로마서 제 15 장 제86강 그리스도를 본받으라 (15:1-6) _ 863 제87강 모든 사람을 환영하라 (15:7-13) _ 873 제88강 바울의 이방인 선교 사역 (15:14-21) _ 881 제89강 바울의 선교 여행 계획 (15:22-33) _ 890 로마서 제 16 장 제90강 사도 바울의 보호자 뵈뵈 자매 (16:1-2) _ 900 제91강 사도 바울의 문안인사 (16:3-16) _ 908 제92강 사도 바울의 마지막 경고와 축복 (16:17-20) _ 922 제93강 바울의 동역자들의 인사말 (16:21-23) _ 930 제94강 _ 로마서 마지막 송영 (16:24-27) _ 938 부록 / 바울의 오직 십자가 설교 _ 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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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16] 교회 음행과 출교본문 / 고전 5:1-5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지난 시간에 본문 고전 4:14-21절 말씀을 통하여 ‘바울의 권면과 방문 계획’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처음 부분인 1장에서 4장까지의 말씀을 통해 강조한 것은 그릇된 세상 지혜였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분쟁의 원인은 바로 이러한 세상 지혜, 헬라 지혜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의 지혜를 거부한 결과 교회는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이를 지적하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를 통한 성도의 신앙을 언급했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바로 잡겠다는 뜻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본문 5:1~5절 말씀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 음행 사건(사단에 내어 준 자’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는 이제 5장에서부터 6장 20절까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잘못된 자유로 인한 방종, 도덕적 타락을 지적하며 교정합니다. 앞으로 6장 2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확인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에서 온 소식에 대해 지혜와 분쟁, 음행, 소송, 분쟁의 근거에 대해서 설명합니다(고전 1:10-6:20절). 다음은 사도는 고린도로부터 온 편지에 대에 답변합니다(고전 7:1-16:4). 결혼, 우상에 바친 제물, 그리스도인의 집회, 성령의 은사, 부활, 헌금 등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음행에 대한 말씀으로 사도가 고린도로부터 온 소식에 대해 세상 지혜와 분쟁이라는 주제에 이어 음행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게 됩니다. 1. 사도 바울의 음행 지적(1) 본문 1절에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5장으로 이어지면서 고린도 교회의 거룩성을 위해 구체적인 죄의 모습을 지적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위 권징 시벌입니다. 권징이란 권선징악의 준말입니다. 첫째, “너희 가운데 음란함이 있음을 내가 확실하게 들었으니”라고 합니다(1, 상). 본문 1절 상반절에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라고 합니다. 본문은 ‘심지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사도가 들은 소식에 대해 확실함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사도는 말하고자 하는 음행 사건은 직접 목격한 사건이 아닙니다. 전해준 사람의 말을 듣고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지만 확실한 증거를 갖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듣게 된 일에 대해서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자신이 들은 일은 매우 긴박하고 예상치 않았던 일입니다. 경악해야 할 일입니다. 이 일은 음란에 관한 일입니다. 사도는 이 음란을 “이런 종류의 음란”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실 음란 자체에 놀랐기보다는 이런 음란이 “너희들 가운데”, 곧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라는 데 경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고린도전서 3:16-17절을 살펴볼 때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임을 말했습니다. 어떤 자가 “하나님의 전을 멸한다면 하나님이 그를 멸할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특별히 교회는 한 사람의 범죄는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사도는 이 음란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러한 음란은 이방인들 가운데도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1, 중). 본문 1절 중반절에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일이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의 심각성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이방인과 비교하면서 음란의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로 간주하여 책망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다양한 음란의 형태를 지적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성결을 강조하였습니다(레18:1-30). 사도는 이방인도 하지 않는 음란의 일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방인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셋째, “누가 아버지의 여자(부인)를 취하다”라고 합니다(1, 하). 사도 바울은 본문 1절 하반절에서 이 음란이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음란은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어떤 부인”을 취한 일이었습니다. 여기 쓰인 “여자를 취한다”라는 표현은 결혼과 같은 관계를 의미할 때 사용됩니다. 사도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이 일이 단순한 스켄들 이상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여기 표현된 “아버지의 부인”은 계모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계모와 같이 산다는 의미입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한 사람이 그의 계모를 데리고 산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식의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 감히 행해지지 않는 악질적인 일입니다. 음행을 저지른 남자에게만 그 책임을 추궁한 것으로 보아 그 계모는 아마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 남자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2. 사도의 책망(2) 본문 2절에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통회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하여졌다”라고 합니다(2, 상). 사도는 곧바로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런 음행을 두고 통곡하고 그 행위자를 쫓아내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영적 부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한 교만함 때문에 복음과 거룩함이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악한 죄악을 보면서 그 어떤 대응도 없이 잠잠히 있습니다. 그들의 영적 심령이 무디어졌습니다. 거룩함의 거치나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잃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슬퍼하고 통회해야 할 때인데 고린도 교회는 오히려 교만이 가득합니다. 이 ‘교만’은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결과입니다. 그러니 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구원과 거룩에 대한 개념이 모호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과 분쟁으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둘째,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않고 있다”라고 합니다(2, 하). 본문 하반절에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정상적인 교회라고 한다면 그런 사건이 있다면 ‘통한히’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라고 책망합니다. 여기서 사도는 “너희 중에서”, 혹은 “너희 가운데서”라고 언급합니다. 이 일 행한 사람은 여전히 고린도 교회 구성원으로 있습니다. 음행하자는 여전히 교회의 가운데 있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교제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배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사도는 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통한히 여기지 않았다”라고 판단했습니다. ‘통한히’라는 단어는 ‘통회하라’라는 의미입니다. 곧 통회 자복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된 지체인 교회로서 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끌어내라”, “쫓아내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음란을 교회에서 제거하는 내용은 누룩과 반죽의 비유로 계속 반복적으로 말씀한 내용입니다(5:6-8). 사도는 동일한 이야기를 무교병의 비유를 통해 말하면서 모든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을 제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누룩과 같은 존재로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누룩 없는 ‘순전한 떡’이 되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추방되어야 함을 사도는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3. 사도의 심판(3-4) 본문 3절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라고 합니다. 첫째, “내가 이미 심판하였다”라고 합니다(3). 본문 3절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절에서 이 일 행한 사람을 내어 쫓으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본문 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이미 심판하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그들을 교회에서 쫓아내고 끌어내야 할 이유는 “이미 내가 이렇게 이 일 행한 사람을 심판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가 내린 심판의 특징을 두 가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도의 심판은 ‘즉각적인 심판’이었습니다. 사도는 ‘이미’라고 하여 심판이 지체 없이 긴급하게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사안이 지체할 수 없는 긴급을 요하는 사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는 누룩처럼 퍼저가 교회의 거룩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도의 심판은 ‘완료적 심판’이었습니다. 사도는 이 사람에 대한 심판이 이미 완료되었음을 고린도 교회에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사도의 ‘완료’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경고한 이유는 이미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에서 떨어진 것으로 그 자체로 심판과 징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판은 결국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사도는 이 사람의 음행이 다시는 재론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너무도 분명한 중범죄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그에 대한 판결이 끝났으므로 다시는 재론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이미 ‘심판의 완료’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미 완료된 심판의 긴급성을 언급하면서 회개 역시 긴급성이 요구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둘째, “육으로 떠나 있으나 영으로 함께하여”라고 합니다(4, 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떠나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교회에서 말씀으로 양육했습니다. 사도의 표현대로 육체로는 고린도 교회에 있지 않고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육으로는 함께 하지 않았지만, 영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마치 함께 있는 것처럼 이런 일 행한 자를 심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영으로 함께하여 내린 이 심판의 정당성입니다. 이 심판은 사도가 밖에서 판단하여 내린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 안에서 내린 심판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심판은 사도의 개인적 판단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고린도 교회의 판단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내리는 판단은 고린도 교회와 함께 한 공신력 있는 정당한 심판이었습니다. 또한 이 심판은 육체를 따른 판단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의 영이 함께 하여 내린 판단입니다. 이러한 영의 판단은 보편적으로 영의 속성 가운데 온전성과 거룩성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판단은 영적인 판단으로 흠이 없이 완전하며 교회의 계속된 거룩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셋째, “나의 영과 너희가 함께 모일 때”라고 합니다(4, 하) 본문 4절 하반절에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라고 합니다. 사도와 고린도 교회의 영적 일체성을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부가적으로 이 심판이 그의 영이 고리도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모일 때 이루어졌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회 모임의 신비로운 성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육체적으로 이 사람의 심판을 위해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이 모임은 전적으로 육체에 속하지 않은 영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도의 영과 고린도 교회가 함께 모인 ‘영적인 모임’과 같은 효력이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모여서 결정하였다면 당연히 징계의 심판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반대할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모와 함께 사는 자를 어떻게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넷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합니다(4, 하). 사도는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라는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서들에서도 중요한 선언적 진술을 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이 명칭은 신자들이 주를 부를 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공식적인 명칭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교회에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교회는 존재의 가치를 얻으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심판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교회가 내리는 심판의 법제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하고 합니다(4, 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는 이 교회를 통하여 내려지는 심판의 효력에 대한 입증입니다. 이 심판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 수행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세상 권세를 이기신 참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교회의 머리되 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며 교회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사도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언급하면서 이 심판이 가지게 되는 구속력 및 실효성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 안에서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 한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그 심판의 실효성 있는 심판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 이런 일 행한 자에 대한 심판이 완료되었음을 보여줍니다. 4. 교회의 징계(5) 본문 5절에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첫째, “이 사람을 사단에게 내어 주라”라고 합니다(5, 상). 본문 5절은 성경신학자들에 의해 난해한 구절로 논의된 말씀입니다. 즉 5절 말씀을 단일구절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3절과 연결된 본문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3절과 “이미 판단하였노라”라는 말씀과 연결된다면 5절에 “사탄에게 내주었으니”라는 말씀은 사단에게 내어 준 행위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5절이 독립적 명령형으로 이해할 때 사단에게 내어 준 행위는 이제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미래로 아직 완료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대체로 교회의 실제적인 징계는 3절에 언급된 “심판하였다”와 연결되어 이해합니다.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5절에 이미 심판하여 사단에게 넘겨준 것이 됩니다. 즉 완료형으로 이미 그렇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오면 미래에 구원이 완성될 때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심판이 이미 완료되었다는 의미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 심판과 사단에게 내어 줌이 동시에 완료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남은 것은 실제로 이 사람을 분리하여 교제권 밖으로 쫓아내는 것만 남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단에게 내어 주는 것을 미래적으로 남겨둘 경우, 심각한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사단에게 넘겨줌은 ‘출교(excommunication)’에 해당합니다. 출교의 목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사도 바울이 말씀한 “적은 누룩이 전체의 떡 반죽을 부풀린다”(고전5:6-8)라는 말씀에서 “적은 누룩을 조심하라”라는 경고의 말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단에게 넘겨주었다”라는 말씀은 교회의 권세와 보호 밖으로 쫓아내었음을 의미함이 계속된 문단의 진행에서 밝혀집니다. 둘째, “육체를 진멸하도록”라고 합니다(5, 중). 본문 5절에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 중에 “육체를 진멸하도록”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는 멸망(‘올레트로스’)하는 단어를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살전5:3; 살후1:9; 딤전 6:9)를 참고해 볼 때 매우 강한 실제적인 멸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실제적 멸망을 위해서 이 사람은 사단에게 넘겨집니다. 셋째, “그 영이 구원받도록”라고 말씀합니다(5, 중). 본문 5절에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여기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징계에 있어서 육체의 멸함과 영의 구원을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이 대립은 평등한 문장 구조에서의 등위 대립이 아니라, 문장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사이에서의 대립입니다. “영을 구원하기 위해서 육을 사단에게 내어 주라”라고 말합니다. 그 음행자를 사단에게 넘겨주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단을 꺾으심으로 성립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함으로써 사단의 주권 영역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쫓아낸 것은 예수 그리스도 주권의 영역에서 사단의 주권 영역으로 쫓겨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면 종말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망의 권세’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2:14에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사망의 세력을 주시고 이것을 죄인들에게 행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음행자를 교회 밖으로 쫓아내야 하는 이유는 심판과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순결성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는 구약 성경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약적 배경에서 한 사람의 범죄는 언약의 관계를 훼손하여 이스라엘 언약의 공동체 전체에 재앙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음행자 같은 행악자는 교회 공동체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훼손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5, 하). 영의 구원은 “주의 날(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완성됩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는 이러한 일을 행한 자의 처리가 주의 날, 곧 심판의 날에 완성됨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먼저 음란을 한 자를 사단에게 주어 그 육체를 멸하게 하는 것은 시간적 긴급함을 요구하는 사항이었습니다. 사도는 “이미”와 “내가 심판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종말에 심판과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음행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앞으로 종말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에 기회가 주어져 있음을 보여준 말씀이기도 합니다. 5. 교훈과 적용 성경에서 ‘교회’라는 개념은 ‘건물’이나 ‘예배당’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배를 드리는 장소나 예배당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는 믿는 무리의 모임, 집합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주님의 몸된 교회, 주님을 몸으로 하여 성도들은 그 몸의 각 지체라고 합니다. 각 지체가 심각한 범죄에 빠졌다면 이를 권면하고 회개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교회는 그를 출교해야 할 것입니다. 출교는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독립된 교회 교인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상실시키는 개념이 있습니다. 둘째는 아예 그리스도와 교제를 단절하여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 개념이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후자의 경우입니다. 이런 종류의 출교는 본문에서와 같은 범죄는 회개하지 아니하면 사단에게 내어 주는 의미에 해당한 출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에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용서를 받아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권징은 결국은 영적으로 회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종교개혁교회가 교회를 운영하는 원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가 말하는 이방인도 하지 않는 그러한 음행의 범죄는 결국 교회의 거룩성과 성결성 훼손을 막기 위해 교회 밖으로 쫓아야 합니다. 문제는 교회가 영적으로 무디어져 있습니다. 거룩에 대한 개념과 이를 지키고 운영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심각하고 통탄한 범죄도 묵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교회의 거룩성과 성결성 유지를 위해 헌신한 주의 백성들에게 크신 능력과 은총을 주신다는 점도 본문이 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축복 속에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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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15] 바울의 권면과 방문 계획본문 / 고전 4:14-21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지난 시간에 본문 고전 4:6-13절 말씀을 통하여 “자만하는 교인들과 고난받은 일꾼들”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꾼들이 누구에게서 고난과 시험을 받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바로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처를 받은 듯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비롯한 동료 사역자들의 비참한 고난받은 삶을 이야기 하면서 허황된 교만으로부터 돌아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사명이기 때문에 묵묵히 고난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은 늘 교만과 허황된 자만심에 빠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난 받은 삶을 통해 신자들에게 심지어 자신의 생활비를 자신이 벌면서 사역을 감당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일꾼들을 무시합니다. 그들은 일꾼들을 비교하며 그 일꾼을 자신의 잘났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번에는 본문 고전 4:14-21절 말씀을 통하여 “바울의 권면과 방문 계획”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제1부인 1장에서부터 4장까지 고린도 교인들의 그릇된 ‘지혜 자랑’(세상의 지혜)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진정한 지혜를 말했습니다. 이제 제2부에 해당된 5장에서 6장 20절까지에서는 그릇된 그리스도인의 그릇된 자유(잘못된 자유)에 의한 도덕적 타락을 지적합니다. 이런 지적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의 거룩성을 말씀합니다. 구체적으로 제1부에 해당한 마지막 부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권면의 정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14-16) 첫째,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면합니다(14). 본문 14절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지난 시간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교만을 지적했습니다. 이런 지적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했던 권면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본문 14절의 내용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쓰는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처럼 훈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 이유는 그들이 교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을 갖고 생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권면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권면하는 것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를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신을 그들의 아버지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바울과 같이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사도와 함께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가 전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과 같았습니다. 고린도에 온 다른 사역자들은 선생이었지만 적어도 사도는 아버지와 같았고 그들은 자녀와 같았습니다. 영적인 아버지인 바울 앞에서 그들은 자녀였습니다. 영적인 아버지인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가 그의 자녀와 같았습니다. 자녀가 곁길로 갈 때 그냥 방치한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자녀에게 바른길로 가도록 권면합니다. 적극적으로 회초리를 듭니다. 이는 다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버지와 같이 권면합니다(15). 본문 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영적 아버지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강조한 이유는 사도가 그들을 권면한 그 권면이 보통 의례적 권면이 아니라 얼마나 간절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권면이냐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라고 합니다. 스승, 즉 선생은 얼마든지 모실 수 있지만, 아버지로 모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자 그들이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영적인 아버지였습니다. 셋째,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16) 본문 16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합니다. 여기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14~15절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사도는 14~15절 말씀에서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의 그림 언어를 통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적 아버지가 되고 그들은 자녀가 되는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아버지가 자녀에게 권면하는 것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이런 권면을 하고 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6절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결론적인 권면은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마땅히 그들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의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모범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주 안에서 정리한 삶의 원리입니다. 그 모습은 오직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을 위해 그가 당한 환난을 참고 견디며 사는 삶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서 본받아야 것이 있다면 부모님의 진지한 삶의 여정일 것입니다. 많은 고난과 환난 속에서 참고 견디며 자녀들을 위해 헌신한 사랑의 모습은 자녀들이 분명히 본받아야 할 덕목입니다. 바울에게서 바로 이런 점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이 수난의 길을 가는 모범자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본받았다면 그런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2. 사역의 연속성, 믿음의 아들 디모데 파송(17) 본문 17절에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합니다. 본문 “이로 말미암아”는 “이를 인하여”라는 말입니다. 이를 인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본받는 데 돕게 하려고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에 보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사랑하고 신임하는 믿음의 아들과 같은 자입니다. 함께 사명을 감당한 조력자입니다. 디모데는 조력자로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개척에 동역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었습니다. 본문은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인 디모데와 신실하지 못한 자녀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 역시 주안 안에서 신실한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는 권면이 숨어 있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바울의 ‘행사’, 혹은 ‘길들’과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파송을 받아 바울의 행사, 즉 행동양식, 또는 삶의 방식을 모든 교회에서 가르칠 것입니다. 본문에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게 된 복음의 규범은 지역을 초월합니다. 어느 지역 어느 국가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동일한 규범적 원리가 적용됩니다. 우리 모든 신자의 모범으로 유효하게 적용됩니다. 3. 디모데만이 아닌 자신의 직접 방문 계획(18-21절) 첫째, 고린도 교회 어떤 이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까?(18절). 본문 18절에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라고 합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소속을 이미 듣고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일부 교인들은 계속하여 교만해져 있습니다. 바울의 권면은 무시합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과 이제는 대면할 일이 없으므로 바울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교만하여졌다“라고 말합니다. 둘째,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속히 방문할 계획을 전합니다(19절). 본문 19절에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라고 합니다. 본문 18절과 19절 사이에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연결됩니다. 앞 절인 18절 말씀에서 일부 교인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러나’라고 합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바울이 방문하여 그들의 교만한 행동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그곳 교인들의 문제들을 바로 잡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가르침을 받은 복음의 길,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다른 곁길로 가고 있는 그들을 교정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문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본분에 대해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허황된 자만 속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의 방문 계획을 전하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모든 계획이 주님의 주권적인 뜻에 달려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도는 자신의 모든 사역이 주님의 섭리와 계획 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복음의 사역자는 자신의 사역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어느 지역을 방문하여 누구를 만날 것인지까지 주님의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사역자는 주님의 손에 쓰임 받을 뿐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전도자로 쓰임을 받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미 고전 4:8절(“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에서 자랑하며 날뛰는 자들을 주목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그들의 교만하고 허황된 주장(‘말’)이 아니라, 그들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필 것입니다. 셋째, 말 많은 교인이 아닌 능력으로 사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20절). 본문 20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말만 앞서는 자가 누구이며, 능력있는 삶을 사는 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의 판단기준은 말이나 주장들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 있는 삶입니다. 이 기준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기준이 모호하면 삶의 패턴도 모호한 삶이 됩니다. 우리는 항상 삶의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도는 고난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과 기쁨을 가지고 능력을 갖추고 살고 있는지를 확인할 것이라는 분명한 의지를 보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는 허황된 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사도는 나쁜 자녀를 훈계하듯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복음과 믿음으로 그 어떠한 고난과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 된 본분을 지키며 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넷째, 징계와 사랑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합니다(21절). 본문 21절에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라고 합니다. 이제 사도는 모든 권면과 그 권면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마지막으로 바울이 제시한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말은 너희가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더 원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두 가지는 매와 사랑입니다. 즉 회초리를 원하는가, 아니면 사랑을 원하는가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할 경우, 사도 바울의 회초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할 때는 사랑이 그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의 방문을 받을 때 책망을 받으며 만날 것인지,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만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4. 교훈과 적용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떠나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분쟁과 혼란은 바울로 하여금 염려하고 걱정하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자신과 고린도 교회 교인의 관계를 마치 아버지와 자녀와 같은 관계로 설정합니다. 그런 사랑의 관계에서 아버지가 자녀에게 타이르듯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권면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듣고 배웠던, 그리고 바울이 파송한 디모데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그 복음으로 인해 그 어떠한 환난과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말로만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길게 늘어놓은 자기주장으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오직 능력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환경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 환경은 언제나 환난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찾아온 환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 환난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습니다. 즉 불리한 환경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이런 능력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순종의 모습이요, 감사의 모습입니다. 이런 삶을 본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런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주변을 환하게 밝혀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삶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는가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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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14] 자만하는 교인들과 고난받은 일꾼들본문 / 고전 4:6-13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4:1-5절 말씀을 통하여 “변명하고 싶은 바울의 심경(인간의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는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사역에서 조금도 불충실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양심에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충성스러운 일꾼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자신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책잡힐 그런 행동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꾼은 항상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일꾼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들 앞에 낙심이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 같이 하나님의 판단과 심판에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람 앞에서의 사역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본문 고린도전서 4:6-13절 말씀을 통하여 “자만하는 교인들과 고난받은 일꾼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일꾼들을 한 줄로 줄을 세워 값을 매기며, 그로 인한 치졸한 교만 경쟁을 통해 일꾼들을 낙심하게 합니다. 이때 사도는 오히려 고난받는 일꾼들의 현주소를 설명하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교만을 버리고 복음 안에 거할 것을 말씀합니다. 1. 치졸한 교만 경쟁을 하지 말라(6) 본문 6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본문 6절에서 사도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부터 이해해 보겠습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자신과 아볼로를 예로 들어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3:5절 이하에서 자신과 아볼로에 대해서 심은자, 건축자, 청지기 등의 그림 언어를 통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국은 “성장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복음 선포자의 책임 등을 강조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과 아볼로에게 “기록된 것들을 넘어가지 말 것”을 배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인들이 서로 한 사도를 다른 사도 보다 치켜세우므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강조한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교만 경쟁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교만 경쟁은 이렇습니다. 서로 자신들이 지지한 사역자가 상대편에서 지지한 사역자보다 더 위대하므로 위대한 사역자를 지지한 자신들이 대단하는 자랑과 교만입니다. 이런 식으로 서로 치졸한 교만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교만’이라는 단어를 “바람이 잔뜩 들어가 부풀어 있다”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1절에 언급된 그런 교만입니다. 이미 사도는 고린도전서 3:5절 이하에서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사역자들을 비교하여 우월한 사역자를 지지한 자신들을 자랑하고 치졸한 교만 경쟁에 빠지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도 많이 일어난 현상입니다. 복음의 선포자는 모두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누가 더 낫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역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역자는 멸시하고 무시합니다. 복음 선포자를 줄 세워 값을 매깁니다. 그래서 어떤 사역자는 유명하다고 자랑합니다. 칭찬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역자는 별 볼 일 없다고 합니다. 무시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사역자를 지지한 자신도 유명하다는 자랑은 치졸한 교만이며 이런 교만 경쟁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사도가 이미 3:5절 이하에서 말씀한 것처럼 바울 자신이나 아볼로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한 사역자일 뿐입니다. 2. 은혜를 무시한 자들의 교만과 자랑 경쟁(7-8) 첫째, 교만과 자랑은 은혜를 무시한 행동입니다(7). 본문 7절에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라고 합니다. 사도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교만의 문제를 일반화시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질문 형식을 통하여 되묻는 질문 방식으로 그들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 질문 형식은 “누가 너를 남달리(유별나게) 구별하였느냐?” 이 질문은 “누가 너를 남보다 더 돋보이게 했느냐?”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남다름과 돋보이게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마치 받지 않는 것처럼 자랑한 것은 교만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 역시 이웃과 마찬가지로 기껏해야 용서받은 죄인일 따름입니다. 특히 남다른 은사를 가졌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생각하여 감사하고 겸손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받았다면 그것은 자기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자랑을 위해서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문제입니다. 자기 자랑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까지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기 자랑에 의한 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29-3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 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또한 로마서 3:27절에서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라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의 법 앞에서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이런 교만은 죄의 모습입니다. 둘째, 교만한 자들의 착각을 지적합니다(8). 본문 8절에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은 ‘역설 논리’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 교단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받았습니다(고전 1:15). 그들의 영적 교만은 하나님의 구원을 다 얻은 것처럼 영적인 풍요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모습은 밑바닥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만 속에서 영적인 풍요를 즐기며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이제 사도와 같이 사역자들이 없어도 왕 노릇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영적인 황홀경 속에 무아지경으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직도 죄악과 고난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황홀경에 빠져 도무지 고난과 싸워 복음을 증거하는 역동적이며 실천적인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쓴웃음을 보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미 왕들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랬으면 우리도 너희의 왕 노릇에 동참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비꼽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도 똑같은 현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좀 오래 다녔다고 생각된 일부 교인들이 영적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담임목사까지라도 자신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들을 판단하고 심판합니다. 영적인 엘리트 의식의 교만에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고칠 약이 없습니다. 자신은 순종하고 영적인 지도를 받아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히려 자신은 고도의 수준과 영적 지식의 경지에 올라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 착각을 깰 수 있는 비책은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쓴웃음을 짓고 말한 것처럼 “그래 네가 왕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왕이 아닌데 왕이다’라는 말은 망하라는 뜻입니다. 망해야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시정되지 아니하면 어쩌면 지금 구약의 사울 왕과 신약의 가룟 유다와 같이 하나님께서 버림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복음으로 쓰임 받지 않고 심판의 회초리로 사용한 후 버림받을 수도 있습니다. 3. 복음의 선포자를 괴롭게 하지 말라(9-13) 사도 바울은 본문 9-13절 말씀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영적인 황홀경에 빠져 자기도취 상태에서 깨어나도록 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철저히 고난의 삶임을 말씀합니다. 이제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취지로 사역자인 자신의 고난받는 생활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사역자는 사형장의 죄수들처럼 제일 천한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9절). 본문 9절에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라고 합니다. 본문에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라고 합니다. 사도는 자신을 비롯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의 삶의 현장이 바로 고난의 자리임을 말씀합니다. 영광을 받은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이야기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역자들의 복음 선포 사역이 사단의 세력과의 전쟁입니다.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여기 사투(死鬪)는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역자들은 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사역자들을 이웃집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여 아무렇게나 판단하고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은 사단의 세력과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복음 선포자들은 죽기까지 고난받는 자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둘째, 역설적 논법으로 자만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10절). 본문 10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라고 합니다. 사도는 ‘고난받은 복음 선포자들은 어리석고 너희는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약하고 천대를 받지만, 너희는 강하고 존경을 받은 자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논리는 실제로 고린도 교회 교인은 지혜롭고, 강하며, 존경을 받는 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는 지금 역설적으로 그들의 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셋째, 복음 선포자들의 실제적인 고난의 삶을 진술합니다(11절). 본문 11절에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라고 합니다. 사도는 10절에서 역설적인 설명을 끝내고 이제 실제로 자신을 비롯하여 복음 선포자는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다”라고 합니다. 정처가 없다는 말은 집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사역자들입니다. 넷째, 사도 바울은 스스로 벌어서 생계를 유지하며 사도직을 감당했습니다(12절). 본문 12절에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라고 합니다. 사도는 생활비를 위해 수고하며 손수 일해 왔습니다. 그리고 욕을 얻어먹어도 축복하고 핍박을 당해도 참고 견디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다섯째,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13절). 본문 13절에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사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아도 좋은 말로 달랬습니다. 복음 때문에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살아왔습니다. 이런 생활은 “우리가 지금까지”라는 말속에서 항상 그런 삶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활이 바로 복음 선포자의 삶이었습니다. 사도는 영적인 황홀경에 빠져 교만하고 자만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훈계하고 교만합니다. 복음 선포자들을 줄 세워 값을 매깁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지하는 사역자로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 그들에게 복음 선포자들의 고난 받은 삶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사역자를 놓고 서로 비교하여 우월적 지위에 있는 일꾼을 자랑하므로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교만이 헛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복음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4. 교훈과 적용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자만심과 바울 등 복음 선포자들의 고난을 대조시켜 갈등과 분쟁 중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권면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 한국교회와 당시 고린도 교회 상황을 비교해 보면 어쩌면 너무나도 흡사한 분쟁과 갈등으로 교회가 본연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 선포자에 대한 교인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교인에 대한 복음 선포자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 본문은 많은 진리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한 사역자를 놓고 서로 지지하는 사람끼리 파동을 지어 분쟁을 일삼는 그들에게 사도는 이미 3:5절 이하에서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3:6-7)라고 했습니다. 네 파로 나뉘어 자신들이 선호하는 사도가 다른 사도보다 우월하다며, 그 우월한 사도를 모시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못난 사도를 모신 자들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는 자랑과 교만은 고린도 교회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도는 이에 대해 쓴웃음을 지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롯한 복음 선포자가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받은 상황을 이야기하며 더 이상 사역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도는 치졸한 교만 경쟁에 빠지지 않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유사 분쟁과 갈등들이 존재합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를 가지고 논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더 이상 목회자를 괴롭게 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목회자는 사명의 본질을 외면하고 곁길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갈등 양상을 제거하고 교회의 복음 선포 사명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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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13] 변명하고 싶은 바울의 심정(인간의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본문 / 고전 4:1-5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3:18-23절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라는 문제로 자신을 드러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음을 말씀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자신들이 선호한 사역자들 중심의 파당을 만들어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다’라는 파벌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 파벌 의식은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교회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시 ‘복음과 세상 지혜’를 대조하며 복음이 가치를 설명합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신을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서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평가를 받고 싶으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본문 고린도전서 4:1-5 말씀을 중심으로 ‘변명하고 싶은 바울의 심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변명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그 이유를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 때문에 어떤 심정으로 자신을 변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충성스러운 일꾼(1-2)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자 믿는 무리가 생겼습니다. 그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따르고 함께 뜻을 모아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나자 바울에 대해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다시 인간의 판단과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합니다. 첫째, 바울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알아달라고 합니다(1, 상반절) 본문 1절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먼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알아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일군”이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 ‘일꾼’은 ‘종’을 의미합니다. 그 종은 세상의 종도 아니요, 바울의 종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여기 종이란 헬라 세계에서 주인이나 상관을 수종 드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 기록될 때 그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종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청지기와 같은 동의어가 바로 종입니다. 이들을 본문은 일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교회에서 일꾼이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은 자신의 주인에 복종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종이 주인보다 더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은 문제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언급된 일꾼이 곧 주인을 수종 드는 종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주인은 자동차가 없는데 종은 값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주인은 걸어서 가고 종은 자신의 자동차를 타고 갑니다. 이것이 곧 한국교회의 현실은 아닙니까? 둘째, 사도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알아 달라고 합니다(1, 하반절) 본문 1절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합니다. 하반절에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비밀”이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가 그의 종들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최초의 서신에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 내용이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16에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라고 했습니다. 18절에 보면 그곳에서 3년 동안을 보냈습니다. 도올 김용욱은 사도 바울이 불교 수도승이 도를 닦듯이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동안 도를 닦아 깨달은 바가 있어서 전파하는 것이 바울 종교라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민중들이 이런 사상에 환호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시대 전형적인 거짓 교사임이 틀림없으며 거짓 교리입니다. 이단적 사상입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 철학자 칸트(Kant, I., 1724~1804)의 우산 아래 있는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라비안 광야에서 3년 동안 철저히 자신을 반성하며 경건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 그리스도의 계시에 충실하고 순종하기로 했다. 이 훈련은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피조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계시를 받아 여기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기로 결단했습니다. 바울은 3년 동안의 훈련을 마친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철학자 칸트나 현대신학자들, 이들의 후예인 도울 김용욱 같은 철학자는 하나님의 계시, 그리스도의 계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의 신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의한 진정한 일꾼, 사역자, 종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그 하나님의 비밀을 복음으로 선포하는 선포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해 계시받은 자입니다. 이 계시(복음)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업을 경영하는(경륜) ‘청지기’였습니다. 셋째, 자신들을 충성스러운 일꾼임을 알아 달라고 합니다(2절). 본문 2절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합니다. 청지기들에게 요구된 것은 충성입니다. 누구에게 충성합니까?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일꾼들에게 자신에게 충성해 달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무서운 범죄입니다. 자신들이 주인이 받아야 하는 대접을 받겠다는 심보입니다. 이러한 생각하는 자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함께 망하기 때문입니다. 청지기(일꾼, 종, 비밀을 맡은 자)는 자기 일을, 자기 멋대로, 적당하게 두루뭉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일을 해야 합니다. 주인으로부터 받은 권한 내에서 성실하게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모든 일꾼에게 따라오는 오는 의미는 ‘집사’입니다. 이 집사의 의미는 식탁에서 수정 드는 종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를 ‘식모’(食母) 라고 했습니다. 식모란 남의 집에 고용되어 그 집에서 먹고 자면서 주로 부엌일이나 청소 따위를 맡아 하는 여자를 의미했습니다. 요즘은 이 식모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가사 도우미’라고 합니다. 모두 다 집사에 해당한 의미의 일꾼으로서 종입니다. 교회 모든 일꾼은 ‘내가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종이요, 청지기’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를 보이고 순종하는 자가 바로 진정한 일꾼입니다. 거짓 일꾼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포장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기 전에 빨리 그런 행동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2. 사도 바울의 변명(오직 하나님의 심판에 맡김) (3~4절)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변명하고 싶어 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에 관한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는 직접 말을 하지 못하고 사도 바울 뒤에서 자기들끼리 바울에 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2~4절에서 자신의 견해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책잡힐 그런 행동을 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말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첫째,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3, 상반절). 본문 3절에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 여기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상반절)라고 합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종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사명에 대한 충실도일 것입니다. 사도는 이미 3:14절에서 “만일 세운 것이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있으면 상을 받을 것이나”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인간들이 복음의 선포하는 자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주님의 일꾼, 청지기들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런 판단과 심판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꾼을 판단하고 심판할 자들은 성도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월권입니다. 둘째,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3, 하반절). 본문 3절 하반절에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일꾼들의 판단과 심판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꾼의 사명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사도는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감 놔라 배 놔라 했을까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신자들의 판단을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그들의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의 투정 정도로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꾼이 실패한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한 판단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나를 판단하여 무너진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나를 좌절의 늪으로 끌고 갑니다. 자신이 자신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사역을 포기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예도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나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입니다. 내 안에 나의 아집과 교만을 버립니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성찰합니다. 자신을 비판합니다. 그러면 내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앞서갑니다. 그 주님의 은혜 때문에 나의 존재 의미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라며 자신의 심정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심정 고백은 주님의 은혜임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학대하면 안 됩니다. 사역자가 자신이 자신에게 좌절과 공포감을 주면 안 됩니다. 오뚝이처럼 일어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내가 양심에 가책을 받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4, 상반절) 본문 4절에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 상반절에 보면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깨닫다’로 번역된 동사는 원래 ‘양심’이란 명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4절을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내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로써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사역에서 조금도 불충실하게 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양심에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14-15절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8:10절에서도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면서 양심의 중요성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그가 윤리적 규범을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이를 어기고 있는가를 의식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긴 경우, 가책을 느끼게 할 뿐이지, 의를 이루는 기능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으로 그가 의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넷째, 그렇다고 내가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4, 중반절) 본문 4절 중반절에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하여 그는 의로운 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도가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신에 관해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로 문제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의롭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이런 논리는 우리가 보통 “내가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의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교인들에게 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로 잘못을 한 일은 없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섯째,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님이라고 합니다(4, 하반절) 본문 4절 하반절에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라고 합니다. 결국 모든 판단과 심판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사도는 이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 5: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최후 심판 때에 주님이 바울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또한 그가 그를 의롭다 선언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급하게 자신의 견해에 따라, 자신들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사도 바울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난 일입니다. 늘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행위에 관한 점검을 받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나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축복임이 틀림없습니다. 3.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심판(5절) 사도 바울은 본문 4:1절에서부터 시작한 이야기에 대해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첫째,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5, 상반절). 본문 5절 상반절에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주님 재림과 더불어 일어나게 될 최후의 심판 전에, 인간들로서 서로를 심판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심판할 자격도 없습니다. 또한 올바른 심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심판과 판단은 자기 관점에서,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오판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다신 오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둘째,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다 밝혀질 것입니다(5, 중반절). 본문 5절 중반절에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라고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고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누가 드러냅니까? 우리가 드러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들어내실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 때에 다 드러날 것입니다. 심판의 빛에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인간의 비판과 판단이 중요치 않듯이 인간의 칭찬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에 절대적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칭찬한다고 하여 우쭐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비판하고 판단한다고 하여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 때에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복음 선포자는 교인들의 비판이나 칭찬에 좌우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복음 선포자인 목회자가 자신이 주의 종임을 내세워, 양심의 깨끗함을 내세워 독선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런 경우 교회 규범은 이들을 시벌하는 경우가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교훈과 적용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주신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여전히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계시’로 말미암아 주어졌습니다. 그 계시를 전하는 복음 선포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영원 전에 감추어졌는데, 이 역사의 현장에 드러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계시를 받아 이를 전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를 증거하고 전파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사도는 이러한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불필요한 행위, 즉 남을 판단하고 주의 종인 사도 바울을 판단하여 사역자가 낙심케 하는 경우들에 대해 지적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복음의 선포자를 격려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최후 심판 때에 그의 행위를 인정해 주시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고귀한 가치관에 의해 사명을 감당하는 주의 종들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이를 믿고 믿음 안에서 역동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주의 종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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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입국은 부활절 아침이 아닌 오후한국 가톨릭교회는 기독교회(개신교)보다 100년 앞선다. 최초의 선교사는 1884. 9. 20. 알렌(Horace Newton Allen, 한국명 안연(安連), 1858~1932) 선교사를 비롯하여 다음 해인 1885년 4월 5일에 미국 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와 감리교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가 입국했다. 알렌은 평신도 의료 선교사였다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목사 신분이었다. 그래서 최초의 선교사 입국은 알렌 중심이 된다. 그러나 최초의 목사 선교사 입국은 언더우드 선교사 중심이다. 최초의 목사 선교사는 1885.4.5.에 입국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이다. 1885.4.5.은 부활절이었다. 제물포항에 도착한 두 선교사 중 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곧바로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아펜젤러 선교사는 곧바로 서울로 들어오지 못하지 못하고 호텔에서 머물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1884.12.4.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개화파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으며,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 공사관의 대리 공사인 폴크(George C. Foulk 福久 1856~1893)는 당시 임신 중인 아펜젤러 선교사의 부인의 입국이 위험하다는 조언 때문이었다. 한국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그해 6월에 다시 제물포에 도착하여 7월 29일에야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제물포 호텔에 머물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선교편지로 미국 북감리회 선교부에 보냈다. 미국 북감리회 <해외 선교 보고서>(Annual Report)에 전문이 실리게 되었다. 아펜젤러 선교 편지 말미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우리는 부활절에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신 구세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라고 적고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한 1884. 4. 5.이 부활절임을 알려준다. 두 선교사가 제물포에 닻을 내린 것이 오후 3시였으므로 육지에 오른 것은 3시-4시로 추정할 수 있다. 두 선교사가 부활절 아침에 입국한 것이 아니라 오후에 입국하였으므로 “부활절 아침에 입국하였다”라는 말은 맞지 않다. 한국의 최초의 선교는 1884. 8. 8. 20.에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알렌이 한국 선교사로 발령을 받고 입국한 날이 최초의 선교사 입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목사 선교사의 최초 입국은 알렌이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한 1885. 4. 5. 일이다. 감리회 선교사인 아펜젤러 선교사는 언더우드와 함께 입국하였지만 제물포 호텔에 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1885. 4. 5. 입국한 최초의 선교 목사는 언더우드라 할 수 있다. 언더우드는 결혼을 하지 않는 미혼이었으므로 곧바로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임신한 아내와 함께 입국한 아펜젤러 선교사는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그해 7월 29일에 다시 입국하였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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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필독] 교회 분쟁을 예방하는 길새해가 밝았다. 코로나19 사태가 몰고 온 교회 현실은 너무나 어렵다. 그 어려움은 일제 강점기와 6ㆍ25와 같은 어려움과 환난이 아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감염병으로 인한 환난이다.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국가적인 조치는 사회적 거리두기이다. 이는 교회의 대면 예배를 제한하는 정책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행위인지에 대한 문제는 변론으로 하고 일단 교회에 교인이 모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모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교인이 모이지 못하면 자동으로 헌금이 모이지 않는다. 헌금이 모이지 않는다면 교회 운영에 치명상이다. 이런 이유로 명분상 대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신앙의 원칙을 말하지만, 이 역시 한계로 보인다.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 감염을 우려한 사람들이 교회 출석을 꺼리고 있다. 또한 예배에 참석 인원을 제한한 정부 정책 때문이기도 하다. 〇 의결권자 확정 문제 이제 교회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교회 교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전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교인들이 많다. 언제까지 출석하지 아니할 때 교인의 지위가 상실되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는 교회 의결권자를 확정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교회 재산처분과 교단 탈퇴, 정관변경에 대한 문제를 의결할 때 의결권자 확정 문제는 결의의 효력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〇 재산처분 교회 담임목사는 교회를 운영할 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교회 재산을 처분해야 할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는 반드시 그 적법성에 대한 원칙이 무엇인지를 사전에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 정관에 재산처분에 방법이 있으면 그 방법에 따르면 된다. 재산처분이 당회에 위임되었을 때 당회가 재산을 처분할 수 있다. 이때에는 재산을 처분한 후 반드시 교회 명의의 통장에 입금한 후 근거를 남기고 나서 집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공동의회에 보고하여야 한다. 처분 권한은 당회에 위임하였을지라도 처분 후 재정에 대한 집행 권한은 반드시 공동의회에서 승인해 준 예산의 범위 안에서 집행해야 한다. 특별한 집행이 필요할 경우, 공동의회 결의를 통해서 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교회는 예산편성 외에의 특별한 경우 집행 권한까지 당회에 위임된 경우가 있다. 이런 정관을 갖고 있는 교회는 당회가 집행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〇 재정집행 담임목사가 재정집행을 하기 위해 재정위원장(혹은 부장)과 의논하여 집행할 때 반드시 집행의 근거를 확인해야 한다. 집행하고자 하는 내용이 전년도 공동의회의 예산편성에서 예산 항목이 있느냐를 확인해야 한다. 공동의회에서 편성해 준 예산의 범위 안에서만 집행하여야 한다. 편성된 예산 항목이 없는 부분을 집행하려고 할 때는 교회 정관에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지를 확인하여야 한다. 추가예산, 항목 간 변경, 목적헌금 사용 방법 등에 관한 규정이 없을 때 당회를 통해 임시 공동의회를 개최하여 처리하여야 한다. 이것도 녹록지 아니할 때 차기 공동의회에서 승인을 받고 집행해야 한다. 담임목사는 재정집행을 하기 전에 반드시 집행의 근거가 있는지 그것부터 확인하여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재정 사고로 문제가 될 수 있다. 공동의회에서 재정집행 승인 결의 때 이를 문제로 삼아 승인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〇 각종 결의의 적법 절차 교회 분쟁 중에 교회의 각종 주요 문제를 결의하는 과정에서 그 위법성 여부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공동의회, 당회, 제직회 등에서 결의할 때, 소집 절차와 의결 방법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담임목사가 이러한 회의 원칙을 잘 몰라 불법 결의를 하는 경우가 있다. 모든 회의 전에 반드시 무엇이 회의 절차인지를 확인하고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참고, 소재열 목사, <교회 표준회의법> 참조) 특히 당회 결의 때 모두가 합의하면 그만이지만 합의가 되지 않아 다수결로 표결할 경우, 적법한 소집 절차와 결의방법에 하자일 경우, 무효 사유가 되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〇 담임목사는 소통해야! 담임목사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여도 당회에서 의논한 후 처리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처리가 위법일 경우, 담임목사 혼자 책임이 아니다. 그 문제를 지적할 당회원은 없을 것이다. 교회 분쟁은 담임목사가 장로들과 소통이 되지 아니하므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당회원은 담임목사가 처리한 것이 불법이어서가 아니라 의논하지 않고 장로들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처리했다는 사실을 더 큰 문제로 삼는 경우가 있다. ‘ 모든 분쟁의 원인은 담임목사가 장로들과 교인들과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담임목사의 불통과 고집은 결국 교회가 분쟁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〇 교회는 집합체 교회는 개인의 소유가 아닌 교인들, 단체의 소유이다. 단체의 운영방식을 따라야 한다. 교회 명의 통장을 개설하여 그 통장으로 재정이 관리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실명제법이 적용되고 있다. 실소유자 명의의 통장으로 금융거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일부 교회에서 담임목사 개인 통장으로 교회 재정을 관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또한 장로 개인 통장으로 관리하는 경우도 있다. 교회 재정을 담임목사나 장로 개인 통장으로 관리해서도 안 된다. 반대로 담임목사나 장로의 개인 재정을 교회 통장으로 관리해서도 안 된다. 이는 탈세 의혹을 받을 수 있다. 교회 명의의 통장에 입금된 재정은 담임목사가 임의로 집행하면 안 된다. 반드시 교회 재정집행 절차를 따라야 한다. 외부 교회나 기관에서 교회 명의의 통장으로 각종 지원비를 제공해 주었을 때 담임목사 개인을 위한 지원인가, 아니면 교회에 지원하는 지원비인지를 정확히 구분하고 집행해야 한다. 교회 명의로 통장을 개설하여 실소유자 명의로 금융거래를 할 수 있도록 교회마다 사업자 번호를 발급했다. 이때 개인으로 보는 단체가 아닌 법인으로 보는 단체로 사업자 번호를 발급받아야 한다. 〇 담임목사의 소득에 대한 과세 담임목사는 다양한 방법으로 소득이 발생한다. 심지어 은퇴할 때 받은 각종 격려금, 위로금, 사택 제공 등이 있다. 이 문제는 증여에 대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제아무리 격려금이나 위로금, 선교비로 지급받았을지라도 종교인의 기타소득에 해당할 수 있으므로 주의가 요망된다. 〇 결론 담임목사는 본인이 교회를 개척하였으니, 혹은 누구도 담임목사의 행정에 반대한 교인이 없는 교회일지라도 담임목사는 철저한 원칙에 따라 목회를 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상상의 법으로 교회를 운영할 때 나중에 법의 원칙을 적용할 때는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교인들이 출석하지 않는 틈을 타 교회 재산을 매각해 버리는 등의 일들은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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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어제와 오늘(7) 남산 장로회신학교 설립박형룡 박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 9.) 직전에 일본을 거쳐 만주로 망명을 갔다. 해방 이후 다시 귀국하였는데 그 명분은 고려신학교의 학장이었다. 그는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하면서 “사도적 신학소론(神學小論)”라는 제목으로 취임사를 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로 선교사들이 자진하여 폐교했다. 보수적인 전통인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남궁혁, 박형룡, 박윤선 등의 보수신학자들은 모두 망명으로 이 땅에는 없었다. 한국 주재 모든 선교사가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당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장로회를 이끌어갈 신학자가 없었다. 그 시기를 틈타 일제에 아부하며, 정통신학에 반대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후 평양신학교와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여 신학교육을 자신들의 의도하에 주도적으로 운영해 갔다. 그런 상황에서 박윤선 박사와 한상동 목사는 부산에 고려신학교라는 사설신학교를 설립했다. 그 신학교에 박형룡 박사가 1947년 9월 23일에 귀국하여 다음 달인 10월 14일에 부산 고려신학교에 교장으로 취임했다. 교장으로 취임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는 1948년 5월 27일에 박형룡 박사는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귀향하였다. 고려신학교를 사임한 지 1주일 만인 1948년 6월 3일에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여 개교하였으며, 교장에 박형룡 박사가 취임했다. 이 신학교가 목표하는 것은 교단의 직영신학교인 조선신학교를 몰아내고 보수신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를 목표로 두고 있었다. 이를 위해 먼저 비록 사설신학교였지만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 남산 장로회신학교는 후 평양신학교나 조선신학교를 계승한 신학교가 아닌 옛 평양신학교의 역사적 신학적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설립되었다. 박형룡 박사의 고려신학교 사임과 서울 상경은 고려신학교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 남산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자 당시 고려신학교 120명의 학생 중에 약 60명이 박형룡 박사를 따라 나왔다. 고려신학교는 교장을 잘못 선임하여 교장도 잃고 학생들 절반을 잃었다. 박형룡 박사를 따라 조선신학교를 나온 34명의 학생이 고려신학교에 편입하였지만 떠날 때는 그들을 포함하여 60명이 떠났다. 첫 학생 모집은 편입생만을 뽑아 1개월간 교육한 다음 1948년 7월 9일 25명의 졸업을 했다. 박형룡 박사는 이제 선교사들에 의한 신학교가 아닌 순수한 교단총회가 자유주의 신학을 배척하고 강력한 정통보수신학을 표방하는 신학교를 서울에 세웠다. 박형룡 박사 중심의 보수신학을 교육하는 신학교가 문을 열게 되자 김재준 박사 중심의 자유주의 신학을 교육하는 조선신학교를 거부한 사람들과 옛 평양신학교에 재학했던 학생들, 그리고 부산 고려신학교에 다니다가 박형룡 박사와 함께 올라온 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1948년 6월 3일에 109명의 편입생으로 개교하여, 한 달 만인 7월 9일, 제1회 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1951년 5월 25일 오후 2시에 부산 중앙교회에서 속회된 제36회 속회총회에서는 총회가 개회되기 전 신학교 문제 특별위원회가 모여 의논한 내용인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 직영 취소와 새로운 총회 직영신학교의 신설을 위한 과도이사 선정의 안건이 총회에서 가결되었다. 장로회신학교는 보수신앙을 가지고 있던 총회의 인사들은 물론이고 미국 남북장로교 선교사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948년 6월 3일 남산에 세워진 장로회신학교의 정통성은 1952년 9월 18일 대구에서 새로운 이름인 총회신학교로 개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1952년이 개교된 총회신학교 졸업생들은 과거 평양신학교의 전통에 따라 졸업기수를 계승했다. 총회신학교라는 이름으로 1952년 본과 84명이 제1회 졸업을 했다. 제1회 졸업생은 평양신학교를 계승한 제45회가 되었다. 그러나 남산 장로회신학교 졸업생은 장신 제1회(1948)에서 제4회(1951)를 끝으로 남산 장로회신학교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신학교의 졸업생은 총신 전체 졸업 기수에서 제외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총신대학교 역사 기록이다. 정규오 목사 중심의 51인 신앙동지회가 NAE를 조직했다. 이때 지도는 박형룡 박사였다. 이 NAE 로 1950년 대 WCC를 대항했다. NAE를 부정할 경우, 정규오 목사와 그와 함께 NAE로 WCC를 대항했던 1950년대의 교단의 정체성 계승을 위한 노력을 부정해야 한다. 박형룡 박사와 남산 장로회신학교 제1회, 제2회 졸업생들은 정규오를 중심으로 호남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목사 안수를 받아 황해도 출신 목회자들과 함께 총회 내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이들과 함께 1960년대 후반까지 교단총회의 주류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총회 내 영남의 이영수 목사의 등장은 총회의 교권의 질서를 뒤집어 놓았다. 주류 세력이었던 호남과 정규오 목사, 황해도 출신 목회자들과 박형룡 박사 그룹은 총회 내에서 무소불위의 교권을 갖게 되었다. 이 교권이 교단 내에서 WCC를 지지하는 세력들과 전면전을 펼쳤다. 결국 1959년은 WCC 문제로 지지 측과 반대 측으로 나누어져 연동 측(통합), 승동 측(합동)으로 분열되었다. 그 분열의 총회가 제44회 총회(1959)이다. 박형룡 박사와 호남권과 정규오 목사, 그리고 황해도 세력은 교단의 정통보수신학의 기치 아래 교단을 재건했고, 여기에 1951년에 분열했던 고신측을 설득하여 합동하였지만 1961~1962년에 다시 되돌아가고 말았다. 총회 주도 세력은 오로지 정통보수신학이었다. 이 신학에 반대할 때는 총회 내에서 살아남지를 못했다. 교단 내에서 정통 보수신학만 내걸면 만사가 형통했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와 그의 교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영남의 이영수 목사의 등장은 총회 내 교권의 재편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영남의 이영수 목사는 평안도 세력의 선봉장이었던 김윤찬 목사와 함께 주류 세력을 견제하여 새로운 교단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이런 주도권 변화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집중되었다. 이제 박형룡 박사의 총신의 교장에서 의원면직 되고 그 후임으로 평안도 출신의 김희보 박사가 박형룡 박사 대신에 총신 교장이 되어 영남, 평안도의 주도 세력의 지평을 열었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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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9] 육신적인 분쟁의 모습을 보인 교회본문 / 고전 3:1-4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지난 시간에 고전 2:10-16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지혜를 깨닫게 하신 성령’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하나님의 구원계획으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인 구원계획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설명했습니다. 사도는 성부 하나님만을 인정하는 유대인들과 다르게 성자, 성령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며, 이러한 구원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와 구원계획은 ‘육에 속한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본문 고전 3:1~4절 말씀을 통하여 “육신적인 분쟁의 모습을 보인 교회”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는 이미 1:10-17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지적했습니다. 지적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라는 분파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쟁은 신령한 자가 아닌 육신적인 자들의 모임에서 발생한 것들입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의 초보적인 이야기만을 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그 초보적인 단계에서 서로 파당을 만들어 교회를 혼란케 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한 내용이 바로 본문 말씀입니다. 1. 신령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 신자와 교회(1-2) 첫째,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신령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1). 본문 3:1절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교회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신령한 사람, 곧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 수준이 낮은 마치 어린아이들을 대하듯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은 과거 시제로 ‘하였노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당도하여 복음을 선포하야 교회를 세울 때에 고린도인들은 육적인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만에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었기에 초보적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에게 심오한 하나님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에 관해 수준 높은 진리를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기본적인 복음의 핵심만 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그들은 과거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수준이 결국은 시기와 분쟁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달라져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에서 파당과 분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문제를 지적하며 계속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2: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 되기 때문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육에 속한 사람을 언급합니다. ‘육에 속한 자’(프슈키코스)란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 본문인 3장 1절과 3절은 ‘육에 속한 사람’인 불신자와 같은 사람이 아닌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언급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육신에 속한 자’(싸르키노스 혹은 싸르키코스)란 육적 신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2:15에서 언급된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란 ‘신령한 신자’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고전 2:15). 그런데 본문 3:1절에 와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신령한 자”라고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2:14절에서 언급된 불신자에 속한 ‘육에 속한 자’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는 각 분파로 분쟁을 일삼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본문 3:1절과 3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인 ‘육신에 속한 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3절과 4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 ‘지금 나는 신령한 자입니까?’, 아니면 ‘육신적인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는 하나 전혀 믿지 않는 자는 아닙니까? 혹은 믿음을 흉내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절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둘째, 영적인 수준을 젖 먹는 어린아이와 같이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2). 본문 3:2절에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 하리라”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영적 수준은 단단한 음식을 먹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영적으로 믿음이나 복음의 진리에 관해서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너무나 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믿음이 약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 이유가 정확히 드러납니다. 에베소서 1:17-19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도들이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그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위해 바르게 믿고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알아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사도는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그것만큼 성장합니다. 성숙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세상적인 지혜가 아닌 오직 계시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해 주셔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는 하나 아직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런 자들은 영적인 단단한 음식으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너무나 쉽게 오해합니다. 그리고 시험에 듭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사탕 하나 줄까’라며 접근하는 수준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오묘한 하나님의 신비의 세계를 말씀으로 접근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식대로 살아갑니다. 자기 고집대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자기 수준으로 판단합니다. 2. 분쟁을 좋아하는 육신에 속한 신자와 교회(3) 지금까지 신령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 신자와 그들로 구성된 교회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분쟁을 좋아하는 육신에 속한 신자와 그들이 소속된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3:3절에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먼저 신령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 신자가 있는데 그들은 신령하지 못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풍성한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분쟁을 좋아합니다. 본문은 ‘시기와 분쟁’이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의견으로 다툼이 일어납니다. 서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용서하지 못 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 할 일이 없습니다. 용서와 이해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내려놓은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것은 감정싸움, 자존심 싸움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나를 쳐 복종시키면 됩니다. 이러한 시기와 분쟁은 신령한 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면 안 됩니다. 신자가, 영적인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믿음과 은혜로 살아가지 않고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의 모든 판단과 평가는 세상적인 기준이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문제가 된 것이 교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세상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두 영역은 적용하고 평가하는 기준이나 가치관이 다릅니다. 3. 육신의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파당 싸움(4) 본문 3:4절에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상황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파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파다.’ 하고 말하면서 파당을 짓습니다. 이런 파당은 세상 사람과 다를 바 뭐가 있겠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끊임없이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라고 하면서 분쟁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복음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예수를 믿고 성령은 받았지만, 시기하고 파당을 짓는 것은 바로 육신에 속한 신자들에게서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부정적으로 ‘육신적인 자들’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도 시기하고 분쟁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고 성령에 따라 사는 ‘영적인 자’가 아닌 ‘육신적인 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그 정신으로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이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후회의 차원이 아닙니다. 철저한 마음 중심으로 우러나오는 회개는 나의 삶을 변화시켜 줍니다. 변화의 힘은 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때 믿음과 성숙한 삶은 우리를 복되게 할 것입니다. 이제 악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내가 선한 영향력으로 행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김포시에서 재난 지원금을 각 종교단체에 지급ㄹ한다고 합니다. 코로나19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예방 용품 구입비로 일관적으로 교회에 75만 월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특정 개인이 이런 지원비를 받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 기관으로부터 이런 비용을 받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교회의 방역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의 방역 활동을 교회가 앞장서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의 이웃 사랑의 실천과 국가와 정부, 국가 기관을 향하여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과연 가톨릭교회가 과연 이런 비용을 신청하겠습니까? 교회가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교회가 국가의 행정관청으로부터 구제를 받아야 할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이웃들이 코로나의 확산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행정관청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종교단체에 제공할 그런 예산이 있다면 어려운 우리 이웃을 도우라고 말할 수 없습니까? 교회가 세속적인 육신적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면 교회는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교회이든 교회 구성원이든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 성숙한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 수준은 세속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회 내 분파는 상당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누구와도 같이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의 공적인 일은 사심이 개입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직분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공적인 직무에 있어서 언제나 객관적이어야 하며,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월권 해서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그것은 곧 복음의 초보적인 단계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초보적인 어린 단계에서 아이와 같이 젖을 먹는 단계가 아니라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는 단계로 성장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배우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분파는 결국 세속적인 인성과 가치관을 따르게 되므로 일어난 현상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2-14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육신적인 행실을 멀리하고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성령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로마서 8:15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라고 합니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것을 한번 묵상해 봅시다. 그리하면 감사가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사람으로는 교회에서 올바른 신앙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파당을 지어 자신들의 존재감이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태도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대로 그것은 육신적인 자의 세속적인 모습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 이런 세속적인 가치관이 침투해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분쟁이 발생합니다. 서로 사기하고 질투합니다. 이제 이런 옛 모습으로부터 탈피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는 하나입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