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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어제와 오늘(7) 남산 장로회신학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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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어제와 오늘(7) 남산 장로회신학교 설립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자 기념.jpg
남산 장로회신학교 개교 기념(1948. 6. 3.)

 

박형룡 박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 9.) 직전에 일본을 거쳐 만주로 망명을 갔다. 해방 이후 다시 귀국하였는데 그 명분은 고려신학교의 학장이었다. 그는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하면서 사도적 신학소론(神學小論)”라는 제목으로 취임사를 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로 선교사들이 자진하여 폐교했다. 보수적인 전통인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남궁혁, 박형룡, 박윤선 등의 보수신학자들은 모두 망명으로 이 땅에는 없었다. 한국 주재 모든 선교사가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당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장로회를 이끌어갈 신학자가 없었다. 그 시기를 틈타 일제에 아부하며, 정통신학에 반대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후 평양신학교와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여 신학교육을 자신들의 의도하에 주도적으로 운영해 갔다.

 

그런 상황에서 박윤선 박사와 한상동 목사는 부산에 고려신학교라는 사설신학교를 설립했다. 그 신학교에 박형룡 박사가 1947923일에 귀국하여 다음 달인 1014일에 부산 고려신학교에 교장으로 취임했다. 교장으로 취임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는 1948527일에 박형룡 박사는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귀향하였다.

 

고려신학교를 사임한 지 1주일 만인 194863일에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여 개교하였으며, 교장에 박형룡 박사가 취임했다. 이 신학교가 목표하는 것은 교단의 직영신학교인 조선신학교를 몰아내고 보수신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를 목표로 두고 있었다. 이를 위해 먼저 비록 사설신학교였지만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

 

남산 장로회신학교는 후 평양신학교나 조선신학교를 계승한 신학교가 아닌 옛 평양신학교의 역사적 신학적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설립되었다.

 


남산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식.jpg
남산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식

 

 

박형룡 박사의 고려신학교 사임과 서울 상경은 고려신학교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 남산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자 당시 고려신학교 120명의 학생 중에 약 60명이 박형룡 박사를 따라 나왔다. 고려신학교는 교장을 잘못 선임하여 교장도 잃고 학생들 절반을 잃었다.

 

박형룡 박사를 따라 조선신학교를 나온 34명의 학생이 고려신학교에 편입하였지만 떠날 때는 그들을 포함하여 60명이 떠났다. 첫 학생 모집은 편입생만을 뽑아 1개월간 교육한 다음 19487925명의 졸업을 했다.

 

박형룡 박사는 이제 선교사들에 의한 신학교가 아닌 순수한 교단총회가 자유주의 신학을 배척하고 강력한 정통보수신학을 표방하는 신학교를 서울에 세웠다. 박형룡 박사 중심의 보수신학을 교육하는 신학교가 문을 열게 되자 김재준 박사 중심의 자유주의 신학을 교육하는 조선신학교를 거부한 사람들과 옛 평양신학교에 재학했던 학생들, 그리고 부산 고려신학교에 다니다가 박형룡 박사와 함께 올라온 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194863일에 109명의 편입생으로 개교하여, 한 달 만인 79,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1951525일 오후 2시에 부산 중앙교회에서 속회된 제36회 속회총회에서는 총회가 개회되기 전 신학교 문제 특별위원회가 모여 의논한 내용인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 직영 취소와 새로운 총회 직영신학교의 신설을 위한 과도이사 선정의 안건이 총회에서 가결되었다.

 

[크기변환]남산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식.jpg
남산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식 순서지(1948. 7. 9.) 

 

장로회신학교는 보수신앙을 가지고 있던 총회의 인사들은 물론이고 미국 남북장로교 선교사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94863일 남산에 세워진 장로회신학교의 정통성은 1952918일 대구에서 새로운 이름인 총회신학교로 개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1952년이 개교된 총회신학교 졸업생들은 과거 평양신학교의 전통에 따라 졸업기수를 계승했다. 총회신학교라는 이름으로 1952년 본과 84명이 제1회 졸업을 했다. 1회 졸업생은 평양신학교를 계승한 제45회가 되었다. 그러나 남산 장로회신학교 졸업생은 장신 제1(1948)에서 제4(1951)를 끝으로 남산 장로회신학교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신학교의 졸업생은 총신 전체 졸업 기수에서 제외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총신대학교 역사 기록이다.

 

정규오 목사 중심의 51인 신앙동지회가 NAE를 조직했다. 이때 지도는 박형룡 박사였다. NAE 1950년 대 WCC를 대항했다. NAE를 부정할 경우, 정규오 목사와 그와 함께 NAEWCC를 대항했던 1950년대의 교단의 정체성 계승을 위한 노력을 부정해야 한다.

 

박형룡 박사와 남산 장로회신학교 제1, 2회 졸업생들은 정규오를 중심으로 호남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목사 안수를 받아 황해도 출신 목회자들과 함께 총회 내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이들과 함께 1960년대 후반까지 교단총회의 주류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총회 내 영남의 이영수 목사의 등장은 총회의 교권의 질서를 뒤집어 놓았다. 주류 세력이었던 호남과 정규오 목사, 황해도 출신 목회자들과 박형룡 박사 그룹은 총회 내에서 무소불위의 교권을 갖게 되었다.

 

이 교권이 교단 내에서 WCC를 지지하는 세력들과 전면전을 펼쳤다. 결국 1959년은 WCC 문제로 지지 측과 반대 측으로 나누어져 연동 측(통합), 승동 측(합동)으로 분열되었다. 그 분열의 총회가 제44회 총회(1959)이다. 박형룡 박사와 호남권과 정규오 목사, 그리고 황해도 세력은 교단의 정통보수신학의 기치 아래 교단을 재건했고, 여기에 1951년에 분열했던 고신측을 설득하여 합동하였지만 1961~1962년에 다시 되돌아가고 말았다.

 

총회 주도 세력은 오로지 정통보수신학이었다. 이 신학에 반대할 때는 총회 내에서 살아남지를 못했다. 교단 내에서 정통 보수신학만 내걸면 만사가 형통했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와 그의 교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영남의 이영수 목사의 등장은 총회 내 교권의 재편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영남의 이영수 목사는 평안도 세력의 선봉장이었던 김윤찬 목사와 함께 주류 세력을 견제하여 새로운 교단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이런 주도권 변화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집중되었다. 이제 박형룡 박사의 총신의 교장에서 의원면직 되고 그 후임으로 평안도 출신의 김희보 박사가 박형룡 박사 대신에 총신 교장이 되어 영남, 평안도의 주도 세력의 지평을 열었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법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