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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기총-한교총의 합병 법리는 없다한기총은 사단법인으로 주문관청은 문화공보부 한교총은 주무관청이 서울특별시에서 문화공보부로 변경 법인의 합병은 불인정, 해산을 전제로 하나의 통합법인은 가능 합병 전략은 한기총 해산 작전 오해받을 수 있는 사안 양측 임원회 합병 합의서 추인결의는 아무런 법적 효력 없다. (리폼드뉴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1989년 4월 28일 한경직 목사 외 300여 명이 서울 영락교회당에서 창립 준비위원회 총회로 모였다. 같은 해 12월 28일에 서울 강남침례교회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36개 교단과 6개 단체에서 대표 121명이 참여하여 출범했다. 1991년 12월 12일에 문화공보부로부터 사단법인으로 설립 허가를 받았다. 초대 대표회장은 박맹술 목사였다. 현재는 법원 결정으로 대표회장 직무대행으로 김현성 변호사가 맡고 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2001년 12월 17일에 인가받은 신학대학교를 운영하는 24개 교단 참여한 가운데 교단장협의회가 창립됐다. 이 교단장협의회는 2016년 11월 24일에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새로운 틀인 교단 중심의 연합기관 설립을 결의했다. 교단장협의회는 2017년 8월 16일에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한교연과 통합 합의로 ‘한국기독교연합’ 출범 ‘창립총회를 가졌다. 그해 12월 5일에 기독교연합회관에서 ‘한국교회총연합’ 제1회 총회를 열었다. 한국교회연합은 2018년 12월 21일에 서울특별시로부터 법인 설립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2020년 02월 27일에 주무관청을 서울특별시에서 문화체육관광부로 변경했다. 사단법인의 분열 불인정 “우리 민법이 사단법인에 있어서 구성원의 탈퇴나 해산은 인정하지만, 사단법인의 구성원들이 2개의 법인으로 나뉘어 각각 독립한 법인으로 존속하면서 종전 사단법인에게 귀속되었던 재산을 소유하는 방식의 사단법인의 분열은 인정하지 아니한다.”(대법원 2006. 4. 20. 선고 2004다37775 전원합의체 판결) 사단법인과 민법의 사단법인에 유추적용되는 비법인 사단으로서 교회 역사 분열은 인정되지 않는다. 하나의 교회가 두 개의 교회로 분열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한 곳에서 두 곳에서 예배를 드릴지라도 두 교회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의 교회라는 법리를 적용한다. 사단법인의 합병 불인정 “우리 민법은 ‘2개 이상의 사단법인이 1개의 법인으로 통합 또는 합병되고 종전 사단법인들에 귀속되었던 재산을 통합 또는 합병된 사단법인이 소유하는 방식의 사단법인 통합 또는 합병’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법리는 법인 아닌 사단에 대하여도 유추 적용되며, 다음과 같은 결과, 즉 ‘2개 이상의 법인 아닌 사단의 구성원들이 각각 집단적 결의를 함으로써 1개의 법인 아닌 사단으로 통합 또는 합병되고 그에 따라 통합 또는 합병되기 전의 법인 아닌 사단의 재산이 통합 또는 합병된 법인 아닌 사단의 구성원들에게 총유적으로 귀속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형태의 법인 아닌 사단의 통합 또는 합병은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했다(서울고법 2010. 4. 7., 선고, 2009나47236, 판결 및 상고 취하로 확정.). 하나의 사단법인이 두 개의 사단법인으로 분열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또한 두 개의 사단법인이 하나의 사단법인으로 합병 역시 인정되지 않는다. 두 개의 사단법인의 합병은 인정되지 않지만 두 개의 사단법인을 해산하고 하나의 사단법인으로 존속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때 해산은 민법 제78조(사단법인의 해산결의, 사단법인은 총 사원 4분의 3 이상의 동의가 없으면 해산을 결의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관에 다른 규정이 있는 때는 그 규정에 의한다.)의 적용을 받아 총 사원의 4분의 3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기존 법인이 해산되고 기존 각 법인의 구성원들이 새로운 통합 법인을 결성하는 절차가 있고, 각 법인의 해산 과정에서는 각 법인의 재산을 신설되는 통합 법인에 귀속하기로 하는 내용의 결의가 있는 경우에 동일하게 얻을 수 있고, 이와 같은 절차와 결의는 법인의 본질에 반한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 허용될 수 있다. 과연 한기총과 한교총 양측의 사원총회를 통해 전 사원의 4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사단법인 한기총, 한교총을 해산하는 결의를 하고 통합 법인을 설립하는 일은 과연 가능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합병 위한 해산은 사원총회의 전권사항 교회 해산결의는 사원총회의 전권사항이다. 법인 정관으로 법인 해산을 이사회나 임원회 등 제삼자에게 위임하여 처리할 수 없다. 또한 정관에 이렇게 달리 규정되어 있을지라도 그 효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원총회에서 결의되어야 법적 효력이 있다. 한기총, 한교총 양측 임원회의 합병 합의서 추인결의는 효력 없다. (사) 한기총, (사) 한교총의 합병은 법리적으로 불가하며, 단지 두 사단법인을 해산하고 통합 법인으로 하는 것은 가능하나, 이는 반드시 법인의 사원총회에서 전 의결권자 4분의 3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한기총과 한교총 안에는 사단법인과 비법인 사단이 공존하고 있다. 비록 비법인 사단인 한기총, 한교총일지라도 법인의 사단법인 규정에 유추적용하기 때문에 동일한 법리가 적용된다. 결론 한기총과 한교총의 합병은 위와 같은 법리를 먼저 검토하여야 한다. 합병결의를 할지라도 곧바로 효력정지 가처분에 들어갈 수 있다. (소재열 목사 지음, <교회의 적법절차> 600페이지 참조) 소재열 목사(한국교회법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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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합동 전체 교인수 238만 명, 2004년 수준으로 추락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전국 교인수가 구 개혁 측과 합병하기 전의 교인수로 추락되었다. 현재 총 교인 수는 2,382,804명이며 이 숫자는 2004년 총 숫자( 2,398,331명)와 같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0회 총회(2005. 9.)에 보고된 2004년 12월 31일 기준 교단 교인의 총수는 2,398,331명이었다. 그러나 제106회 총회(2021. 9.)에 보고된 2020년 12월 31일 기준 교단 교인의 총수는 2,382,804명이었다. 2016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최대의 교인수를 기록했는데 총 2,764,428명이었다. 2017년부터 내리막길이었다. 2017. 12. 31. 기준으로 2,688,858명으로 내리막 길을 걷다가 2020년 12월 31일 기준으로 2,382,804명이 되었다. © 리폼드뉴스 ©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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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제20대 대통령 당선과 종교인간의 본성은 불안한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무속적인 주술(呪術)이 동원된다.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을 빌어 재앙을 물러가게 하거나 앞으로 다가올 일을 점치면서 불안한 마음에 대한 안전장치로 삼는다. 이는 모든 정치인에게서 보인 특징이다. 이번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61세)가 16,394,815(48.56)를 얻어 당선됐다. 지난 9일 대통령 선거에서 전국 투표율은 75%로 이번 총 유권자는 4,419만7692명이었다. 윤석열 후보는 16,394,815표(48.56%), 이재명 후보는 16,147,738표(47.83%)로 247,077표 차이로 윤석열 후보가 제20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역대 대통령 선거 가운데 최소의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윤석열 후보와 이재명 후보의 득표에 종교인의 영향이 얼마나 있었느냐는 문제이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신천지 문제가 이슈화되기도 했다. 이재명 후보는 코로나19 사태에서 보여준 신천지에 대한 적극적인 제재로 집단적인 거부가 있었을 것으로 예측했다. 연세대 신학 동문 155인이 3월 9일 “신천지 교인 30만 명의 선거 동원령을 막아야 한다”라며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성명서는 “20대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신천지 이만희 교주는 이재명 후보에게 수모를 당했다는 보복심에서 신천지에서 30만 명 신도들에게 특정 후보에 투표하도록 동원령이 내려졌다는 경악스러운 보도를 접했다”라는 내용이다. 특히 전광훈 목사 중심의 광화문 집회는 전국의 1천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면서 이번 선거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는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전광훈 목사 측의 표는 이재명 후보에게 가지 않고 윤석열 후보에게 적극적으로 투표한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특정 후보에게 적극적으로 투표하도록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종교인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신들의 정치적인 신념에 따라 투표하였을 것이다. 윤석열 후보와 이제명 후보 모두 1천 600만 이상의 표를 획득했다. 이 득표 속에서는 종교인들의 적극적인 자신의 신념에 따라 투표권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투표 결과 박빙이었다고 본다면 여기에 포함된 종교인들도 양측으로 박빙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전광훈 목사와 신천지의 적극적인 투표권 행사는 결과적으로 윤석열 후보의 근소한 치이로 당선되게 하는 데 어떤 형태로든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신천지보다 전광훈 목사 측은 드러내 놓고 적극적으로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다는 점은 박빙의 치열한 접전에서 일정하게 도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근소한 24만 표 차이로 당선된 상황에서 전광훈 목사 측의 적극적인 지지와 투표 독려는 윤석열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되게 하는 데 일조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호남의 기독교 신자는 이재명 후보에게, 영남의 기독교 신자는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투표를 했으리라 예측된다. 이렇게 예측할 수밖에 없는 것은 광주전남의 80%가 넘게 이재명 후보에게 쏠리고, 대구 경북을 비롯한 영남은 70%가 넘게 윤석열 후보에게 쏠리는 현상 때문이다. 기독교 신자들의 투표 성향은 비신자들의 특정 지역의 정치적인 신념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이번 윤석열 후보의 당선으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명함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재명 후보가 새에덴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였을 때 소강석 목사는 설교를 통해 적극적인 이재명 후보 띄우기는 윤석열 정부에서는 상당한 부담과 거리두기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윤석열 후보의 명성교회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윤석열 정부에서 좋은 관계로 종교계에 일정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여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제 대통령 당선인은 비록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종교적 행위에 대한 성향이 있을 수 있지만, 공적인 대통령으로서 종교에 대한 문제는 상당히 쟁점이 되므로 늘 조심해야 한다. 특히 종교계의 타락한 현상을 가장 떳떳하게 정화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부정부패는 네 편 가릴 것 없이 국민 편에서 엄단하고, 우리 국민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법치의 원칙을 확고하게 지켜나가겠다”라는 일성은 희망찬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는 데 중요한 요건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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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시 제20대 대통령 선거, 윤석열 후보, 136,814표(45.61%) 획득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에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61세)가 16,394,815(48.56)를 얻어 당선됐다. 지난 9일 대통령 선거에서 전국 투표율은 75%로 이번 총 유권자는 4419만7692명이었다. 윤석열 후보는 16,394,815표(48.56%), 이재명 후보는 16,147,738표(47.83%)로 247,077표 차이로 윤석열 후보가 제20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개표단위별 개표결과에 의하면 김포시의 총 선거인수는 391,889명이며, 투표수 302,170명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153,206표(51.07%), 국민의 힘 윤석열 후보 136,814표(45.61%), 정의당 심상정 후보 6,905표(2.30%)로 집계됐다. 김포시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보다 16,392표로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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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16] 교회 음행과 출교본문 / 고전 5:1-5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지난 시간에 본문 고전 4:14-21절 말씀을 통하여 ‘바울의 권면과 방문 계획’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처음 부분인 1장에서 4장까지의 말씀을 통해 강조한 것은 그릇된 세상 지혜였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분쟁의 원인은 바로 이러한 세상 지혜, 헬라 지혜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의 지혜를 거부한 결과 교회는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이를 지적하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를 통한 성도의 신앙을 언급했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바로 잡겠다는 뜻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본문 5:1~5절 말씀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 음행 사건(사단에 내어 준 자’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는 이제 5장에서부터 6장 20절까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잘못된 자유로 인한 방종, 도덕적 타락을 지적하며 교정합니다. 앞으로 6장 2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확인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에서 온 소식에 대해 지혜와 분쟁, 음행, 소송, 분쟁의 근거에 대해서 설명합니다(고전 1:10-6:20절). 다음은 사도는 고린도로부터 온 편지에 대에 답변합니다(고전 7:1-16:4). 결혼, 우상에 바친 제물, 그리스도인의 집회, 성령의 은사, 부활, 헌금 등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음행에 대한 말씀으로 사도가 고린도로부터 온 소식에 대해 세상 지혜와 분쟁이라는 주제에 이어 음행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게 됩니다. 1. 사도 바울의 음행 지적(1) 본문 1절에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5장으로 이어지면서 고린도 교회의 거룩성을 위해 구체적인 죄의 모습을 지적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위 권징 시벌입니다. 권징이란 권선징악의 준말입니다. 첫째, “너희 가운데 음란함이 있음을 내가 확실하게 들었으니”라고 합니다(1, 상). 본문 1절 상반절에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라고 합니다. 본문은 ‘심지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사도가 들은 소식에 대해 확실함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사도는 말하고자 하는 음행 사건은 직접 목격한 사건이 아닙니다. 전해준 사람의 말을 듣고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지만 확실한 증거를 갖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듣게 된 일에 대해서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자신이 들은 일은 매우 긴박하고 예상치 않았던 일입니다. 경악해야 할 일입니다. 이 일은 음란에 관한 일입니다. 사도는 이 음란을 “이런 종류의 음란”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실 음란 자체에 놀랐기보다는 이런 음란이 “너희들 가운데”, 곧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라는 데 경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고린도전서 3:16-17절을 살펴볼 때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임을 말했습니다. 어떤 자가 “하나님의 전을 멸한다면 하나님이 그를 멸할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특별히 교회는 한 사람의 범죄는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사도는 이 음란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러한 음란은 이방인들 가운데도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1, 중). 본문 1절 중반절에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일이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의 심각성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이방인과 비교하면서 음란의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로 간주하여 책망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다양한 음란의 형태를 지적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성결을 강조하였습니다(레18:1-30). 사도는 이방인도 하지 않는 음란의 일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방인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셋째, “누가 아버지의 여자(부인)를 취하다”라고 합니다(1, 하). 사도 바울은 본문 1절 하반절에서 이 음란이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음란은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어떤 부인”을 취한 일이었습니다. 여기 쓰인 “여자를 취한다”라는 표현은 결혼과 같은 관계를 의미할 때 사용됩니다. 사도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이 일이 단순한 스켄들 이상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여기 표현된 “아버지의 부인”은 계모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계모와 같이 산다는 의미입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한 사람이 그의 계모를 데리고 산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식의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 감히 행해지지 않는 악질적인 일입니다. 음행을 저지른 남자에게만 그 책임을 추궁한 것으로 보아 그 계모는 아마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 남자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2. 사도의 책망(2) 본문 2절에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통회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하여졌다”라고 합니다(2, 상). 사도는 곧바로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런 음행을 두고 통곡하고 그 행위자를 쫓아내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영적 부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한 교만함 때문에 복음과 거룩함이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악한 죄악을 보면서 그 어떤 대응도 없이 잠잠히 있습니다. 그들의 영적 심령이 무디어졌습니다. 거룩함의 거치나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잃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슬퍼하고 통회해야 할 때인데 고린도 교회는 오히려 교만이 가득합니다. 이 ‘교만’은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결과입니다. 그러니 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구원과 거룩에 대한 개념이 모호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과 분쟁으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둘째,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않고 있다”라고 합니다(2, 하). 본문 하반절에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정상적인 교회라고 한다면 그런 사건이 있다면 ‘통한히’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라고 책망합니다. 여기서 사도는 “너희 중에서”, 혹은 “너희 가운데서”라고 언급합니다. 이 일 행한 사람은 여전히 고린도 교회 구성원으로 있습니다. 음행하자는 여전히 교회의 가운데 있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교제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배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사도는 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통한히 여기지 않았다”라고 판단했습니다. ‘통한히’라는 단어는 ‘통회하라’라는 의미입니다. 곧 통회 자복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된 지체인 교회로서 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끌어내라”, “쫓아내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음란을 교회에서 제거하는 내용은 누룩과 반죽의 비유로 계속 반복적으로 말씀한 내용입니다(5:6-8). 사도는 동일한 이야기를 무교병의 비유를 통해 말하면서 모든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을 제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누룩과 같은 존재로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누룩 없는 ‘순전한 떡’이 되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추방되어야 함을 사도는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3. 사도의 심판(3-4) 본문 3절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라고 합니다. 첫째, “내가 이미 심판하였다”라고 합니다(3). 본문 3절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절에서 이 일 행한 사람을 내어 쫓으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본문 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이미 심판하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그들을 교회에서 쫓아내고 끌어내야 할 이유는 “이미 내가 이렇게 이 일 행한 사람을 심판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가 내린 심판의 특징을 두 가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도의 심판은 ‘즉각적인 심판’이었습니다. 사도는 ‘이미’라고 하여 심판이 지체 없이 긴급하게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사안이 지체할 수 없는 긴급을 요하는 사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는 누룩처럼 퍼저가 교회의 거룩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도의 심판은 ‘완료적 심판’이었습니다. 사도는 이 사람에 대한 심판이 이미 완료되었음을 고린도 교회에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사도의 ‘완료’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경고한 이유는 이미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에서 떨어진 것으로 그 자체로 심판과 징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판은 결국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사도는 이 사람의 음행이 다시는 재론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너무도 분명한 중범죄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그에 대한 판결이 끝났으므로 다시는 재론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이미 ‘심판의 완료’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미 완료된 심판의 긴급성을 언급하면서 회개 역시 긴급성이 요구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둘째, “육으로 떠나 있으나 영으로 함께하여”라고 합니다(4, 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떠나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교회에서 말씀으로 양육했습니다. 사도의 표현대로 육체로는 고린도 교회에 있지 않고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육으로는 함께 하지 않았지만, 영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마치 함께 있는 것처럼 이런 일 행한 자를 심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영으로 함께하여 내린 이 심판의 정당성입니다. 이 심판은 사도가 밖에서 판단하여 내린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 안에서 내린 심판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심판은 사도의 개인적 판단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고린도 교회의 판단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내리는 판단은 고린도 교회와 함께 한 공신력 있는 정당한 심판이었습니다. 또한 이 심판은 육체를 따른 판단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의 영이 함께 하여 내린 판단입니다. 이러한 영의 판단은 보편적으로 영의 속성 가운데 온전성과 거룩성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판단은 영적인 판단으로 흠이 없이 완전하며 교회의 계속된 거룩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셋째, “나의 영과 너희가 함께 모일 때”라고 합니다(4, 하) 본문 4절 하반절에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라고 합니다. 사도와 고린도 교회의 영적 일체성을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부가적으로 이 심판이 그의 영이 고리도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모일 때 이루어졌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회 모임의 신비로운 성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육체적으로 이 사람의 심판을 위해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이 모임은 전적으로 육체에 속하지 않은 영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도의 영과 고린도 교회가 함께 모인 ‘영적인 모임’과 같은 효력이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모여서 결정하였다면 당연히 징계의 심판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반대할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모와 함께 사는 자를 어떻게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넷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합니다(4, 하). 사도는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라는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서들에서도 중요한 선언적 진술을 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이 명칭은 신자들이 주를 부를 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공식적인 명칭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교회에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교회는 존재의 가치를 얻으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심판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교회가 내리는 심판의 법제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하고 합니다(4, 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는 이 교회를 통하여 내려지는 심판의 효력에 대한 입증입니다. 이 심판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 수행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세상 권세를 이기신 참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교회의 머리되 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며 교회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사도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언급하면서 이 심판이 가지게 되는 구속력 및 실효성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 안에서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 한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그 심판의 실효성 있는 심판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 이런 일 행한 자에 대한 심판이 완료되었음을 보여줍니다. 4. 교회의 징계(5) 본문 5절에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첫째, “이 사람을 사단에게 내어 주라”라고 합니다(5, 상). 본문 5절은 성경신학자들에 의해 난해한 구절로 논의된 말씀입니다. 즉 5절 말씀을 단일구절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3절과 연결된 본문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3절과 “이미 판단하였노라”라는 말씀과 연결된다면 5절에 “사탄에게 내주었으니”라는 말씀은 사단에게 내어 준 행위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5절이 독립적 명령형으로 이해할 때 사단에게 내어 준 행위는 이제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미래로 아직 완료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대체로 교회의 실제적인 징계는 3절에 언급된 “심판하였다”와 연결되어 이해합니다.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5절에 이미 심판하여 사단에게 넘겨준 것이 됩니다. 즉 완료형으로 이미 그렇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오면 미래에 구원이 완성될 때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심판이 이미 완료되었다는 의미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 심판과 사단에게 내어 줌이 동시에 완료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남은 것은 실제로 이 사람을 분리하여 교제권 밖으로 쫓아내는 것만 남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단에게 내어 주는 것을 미래적으로 남겨둘 경우, 심각한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사단에게 넘겨줌은 ‘출교(excommunication)’에 해당합니다. 출교의 목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사도 바울이 말씀한 “적은 누룩이 전체의 떡 반죽을 부풀린다”(고전5:6-8)라는 말씀에서 “적은 누룩을 조심하라”라는 경고의 말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단에게 넘겨주었다”라는 말씀은 교회의 권세와 보호 밖으로 쫓아내었음을 의미함이 계속된 문단의 진행에서 밝혀집니다. 둘째, “육체를 진멸하도록”라고 합니다(5, 중). 본문 5절에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 중에 “육체를 진멸하도록”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는 멸망(‘올레트로스’)하는 단어를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살전5:3; 살후1:9; 딤전 6:9)를 참고해 볼 때 매우 강한 실제적인 멸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실제적 멸망을 위해서 이 사람은 사단에게 넘겨집니다. 셋째, “그 영이 구원받도록”라고 말씀합니다(5, 중). 본문 5절에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여기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징계에 있어서 육체의 멸함과 영의 구원을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이 대립은 평등한 문장 구조에서의 등위 대립이 아니라, 문장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사이에서의 대립입니다. “영을 구원하기 위해서 육을 사단에게 내어 주라”라고 말합니다. 그 음행자를 사단에게 넘겨주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단을 꺾으심으로 성립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함으로써 사단의 주권 영역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쫓아낸 것은 예수 그리스도 주권의 영역에서 사단의 주권 영역으로 쫓겨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면 종말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망의 권세’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2:14에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사망의 세력을 주시고 이것을 죄인들에게 행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음행자를 교회 밖으로 쫓아내야 하는 이유는 심판과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순결성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는 구약 성경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약적 배경에서 한 사람의 범죄는 언약의 관계를 훼손하여 이스라엘 언약의 공동체 전체에 재앙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음행자 같은 행악자는 교회 공동체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훼손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5, 하). 영의 구원은 “주의 날(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완성됩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는 이러한 일을 행한 자의 처리가 주의 날, 곧 심판의 날에 완성됨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먼저 음란을 한 자를 사단에게 주어 그 육체를 멸하게 하는 것은 시간적 긴급함을 요구하는 사항이었습니다. 사도는 “이미”와 “내가 심판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종말에 심판과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음행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앞으로 종말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에 기회가 주어져 있음을 보여준 말씀이기도 합니다. 5. 교훈과 적용 성경에서 ‘교회’라는 개념은 ‘건물’이나 ‘예배당’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배를 드리는 장소나 예배당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는 믿는 무리의 모임, 집합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주님의 몸된 교회, 주님을 몸으로 하여 성도들은 그 몸의 각 지체라고 합니다. 각 지체가 심각한 범죄에 빠졌다면 이를 권면하고 회개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교회는 그를 출교해야 할 것입니다. 출교는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독립된 교회 교인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상실시키는 개념이 있습니다. 둘째는 아예 그리스도와 교제를 단절하여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 개념이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후자의 경우입니다. 이런 종류의 출교는 본문에서와 같은 범죄는 회개하지 아니하면 사단에게 내어 주는 의미에 해당한 출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에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용서를 받아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권징은 결국은 영적으로 회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종교개혁교회가 교회를 운영하는 원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가 말하는 이방인도 하지 않는 그러한 음행의 범죄는 결국 교회의 거룩성과 성결성 훼손을 막기 위해 교회 밖으로 쫓아야 합니다. 문제는 교회가 영적으로 무디어져 있습니다. 거룩에 대한 개념과 이를 지키고 운영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심각하고 통탄한 범죄도 묵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교회의 거룩성과 성결성 유지를 위해 헌신한 주의 백성들에게 크신 능력과 은총을 주신다는 점도 본문이 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축복 속에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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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15] 바울의 권면과 방문 계획본문 / 고전 4:14-21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지난 시간에 본문 고전 4:6-13절 말씀을 통하여 “자만하는 교인들과 고난받은 일꾼들”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꾼들이 누구에게서 고난과 시험을 받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바로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처를 받은 듯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비롯한 동료 사역자들의 비참한 고난받은 삶을 이야기 하면서 허황된 교만으로부터 돌아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사명이기 때문에 묵묵히 고난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은 늘 교만과 허황된 자만심에 빠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난 받은 삶을 통해 신자들에게 심지어 자신의 생활비를 자신이 벌면서 사역을 감당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일꾼들을 무시합니다. 그들은 일꾼들을 비교하며 그 일꾼을 자신의 잘났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번에는 본문 고전 4:14-21절 말씀을 통하여 “바울의 권면과 방문 계획”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제1부인 1장에서부터 4장까지 고린도 교인들의 그릇된 ‘지혜 자랑’(세상의 지혜)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진정한 지혜를 말했습니다. 이제 제2부에 해당된 5장에서 6장 20절까지에서는 그릇된 그리스도인의 그릇된 자유(잘못된 자유)에 의한 도덕적 타락을 지적합니다. 이런 지적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의 거룩성을 말씀합니다. 구체적으로 제1부에 해당한 마지막 부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권면의 정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14-16) 첫째,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면합니다(14). 본문 14절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지난 시간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교만을 지적했습니다. 이런 지적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했던 권면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본문 14절의 내용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쓰는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처럼 훈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 이유는 그들이 교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을 갖고 생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권면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권면하는 것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를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신을 그들의 아버지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바울과 같이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사도와 함께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가 전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과 같았습니다. 고린도에 온 다른 사역자들은 선생이었지만 적어도 사도는 아버지와 같았고 그들은 자녀와 같았습니다. 영적인 아버지인 바울 앞에서 그들은 자녀였습니다. 영적인 아버지인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가 그의 자녀와 같았습니다. 자녀가 곁길로 갈 때 그냥 방치한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자녀에게 바른길로 가도록 권면합니다. 적극적으로 회초리를 듭니다. 이는 다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버지와 같이 권면합니다(15). 본문 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영적 아버지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강조한 이유는 사도가 그들을 권면한 그 권면이 보통 의례적 권면이 아니라 얼마나 간절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권면이냐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라고 합니다. 스승, 즉 선생은 얼마든지 모실 수 있지만, 아버지로 모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자 그들이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영적인 아버지였습니다. 셋째,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16) 본문 16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합니다. 여기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14~15절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사도는 14~15절 말씀에서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의 그림 언어를 통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적 아버지가 되고 그들은 자녀가 되는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아버지가 자녀에게 권면하는 것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이런 권면을 하고 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6절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결론적인 권면은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마땅히 그들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의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모범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주 안에서 정리한 삶의 원리입니다. 그 모습은 오직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을 위해 그가 당한 환난을 참고 견디며 사는 삶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서 본받아야 것이 있다면 부모님의 진지한 삶의 여정일 것입니다. 많은 고난과 환난 속에서 참고 견디며 자녀들을 위해 헌신한 사랑의 모습은 자녀들이 분명히 본받아야 할 덕목입니다. 바울에게서 바로 이런 점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이 수난의 길을 가는 모범자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본받았다면 그런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2. 사역의 연속성, 믿음의 아들 디모데 파송(17) 본문 17절에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합니다. 본문 “이로 말미암아”는 “이를 인하여”라는 말입니다. 이를 인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본받는 데 돕게 하려고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에 보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사랑하고 신임하는 믿음의 아들과 같은 자입니다. 함께 사명을 감당한 조력자입니다. 디모데는 조력자로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개척에 동역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었습니다. 본문은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인 디모데와 신실하지 못한 자녀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 역시 주안 안에서 신실한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는 권면이 숨어 있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바울의 ‘행사’, 혹은 ‘길들’과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파송을 받아 바울의 행사, 즉 행동양식, 또는 삶의 방식을 모든 교회에서 가르칠 것입니다. 본문에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게 된 복음의 규범은 지역을 초월합니다. 어느 지역 어느 국가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동일한 규범적 원리가 적용됩니다. 우리 모든 신자의 모범으로 유효하게 적용됩니다. 3. 디모데만이 아닌 자신의 직접 방문 계획(18-21절) 첫째, 고린도 교회 어떤 이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까?(18절). 본문 18절에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라고 합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소속을 이미 듣고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일부 교인들은 계속하여 교만해져 있습니다. 바울의 권면은 무시합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과 이제는 대면할 일이 없으므로 바울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교만하여졌다“라고 말합니다. 둘째,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속히 방문할 계획을 전합니다(19절). 본문 19절에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라고 합니다. 본문 18절과 19절 사이에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연결됩니다. 앞 절인 18절 말씀에서 일부 교인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러나’라고 합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바울이 방문하여 그들의 교만한 행동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그곳 교인들의 문제들을 바로 잡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가르침을 받은 복음의 길,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다른 곁길로 가고 있는 그들을 교정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문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본분에 대해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허황된 자만 속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의 방문 계획을 전하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모든 계획이 주님의 주권적인 뜻에 달려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도는 자신의 모든 사역이 주님의 섭리와 계획 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복음의 사역자는 자신의 사역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어느 지역을 방문하여 누구를 만날 것인지까지 주님의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사역자는 주님의 손에 쓰임 받을 뿐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전도자로 쓰임을 받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미 고전 4:8절(“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에서 자랑하며 날뛰는 자들을 주목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그들의 교만하고 허황된 주장(‘말’)이 아니라, 그들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필 것입니다. 셋째, 말 많은 교인이 아닌 능력으로 사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20절). 본문 20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말만 앞서는 자가 누구이며, 능력있는 삶을 사는 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의 판단기준은 말이나 주장들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 있는 삶입니다. 이 기준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기준이 모호하면 삶의 패턴도 모호한 삶이 됩니다. 우리는 항상 삶의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도는 고난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과 기쁨을 가지고 능력을 갖추고 살고 있는지를 확인할 것이라는 분명한 의지를 보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는 허황된 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사도는 나쁜 자녀를 훈계하듯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복음과 믿음으로 그 어떠한 고난과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 된 본분을 지키며 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넷째, 징계와 사랑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합니다(21절). 본문 21절에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라고 합니다. 이제 사도는 모든 권면과 그 권면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마지막으로 바울이 제시한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말은 너희가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더 원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두 가지는 매와 사랑입니다. 즉 회초리를 원하는가, 아니면 사랑을 원하는가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할 경우, 사도 바울의 회초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할 때는 사랑이 그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의 방문을 받을 때 책망을 받으며 만날 것인지,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만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4. 교훈과 적용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떠나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분쟁과 혼란은 바울로 하여금 염려하고 걱정하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자신과 고린도 교회 교인의 관계를 마치 아버지와 자녀와 같은 관계로 설정합니다. 그런 사랑의 관계에서 아버지가 자녀에게 타이르듯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권면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듣고 배웠던, 그리고 바울이 파송한 디모데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그 복음으로 인해 그 어떠한 환난과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말로만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길게 늘어놓은 자기주장으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오직 능력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환경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 환경은 언제나 환난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찾아온 환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 환난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습니다. 즉 불리한 환경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이런 능력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순종의 모습이요, 감사의 모습입니다. 이런 삶을 본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런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주변을 환하게 밝혀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삶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는가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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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14] 자만하는 교인들과 고난받은 일꾼들본문 / 고전 4:6-13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4:1-5절 말씀을 통하여 “변명하고 싶은 바울의 심경(인간의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는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사역에서 조금도 불충실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양심에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충성스러운 일꾼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자신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책잡힐 그런 행동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꾼은 항상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일꾼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들 앞에 낙심이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 같이 하나님의 판단과 심판에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람 앞에서의 사역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본문 고린도전서 4:6-13절 말씀을 통하여 “자만하는 교인들과 고난받은 일꾼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일꾼들을 한 줄로 줄을 세워 값을 매기며, 그로 인한 치졸한 교만 경쟁을 통해 일꾼들을 낙심하게 합니다. 이때 사도는 오히려 고난받는 일꾼들의 현주소를 설명하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교만을 버리고 복음 안에 거할 것을 말씀합니다. 1. 치졸한 교만 경쟁을 하지 말라(6) 본문 6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본문 6절에서 사도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부터 이해해 보겠습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자신과 아볼로를 예로 들어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3:5절 이하에서 자신과 아볼로에 대해서 심은자, 건축자, 청지기 등의 그림 언어를 통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국은 “성장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복음 선포자의 책임 등을 강조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과 아볼로에게 “기록된 것들을 넘어가지 말 것”을 배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인들이 서로 한 사도를 다른 사도 보다 치켜세우므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강조한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교만 경쟁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교만 경쟁은 이렇습니다. 서로 자신들이 지지한 사역자가 상대편에서 지지한 사역자보다 더 위대하므로 위대한 사역자를 지지한 자신들이 대단하는 자랑과 교만입니다. 이런 식으로 서로 치졸한 교만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교만’이라는 단어를 “바람이 잔뜩 들어가 부풀어 있다”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1절에 언급된 그런 교만입니다. 이미 사도는 고린도전서 3:5절 이하에서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사역자들을 비교하여 우월한 사역자를 지지한 자신들을 자랑하고 치졸한 교만 경쟁에 빠지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도 많이 일어난 현상입니다. 복음의 선포자는 모두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누가 더 낫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역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역자는 멸시하고 무시합니다. 복음 선포자를 줄 세워 값을 매깁니다. 그래서 어떤 사역자는 유명하다고 자랑합니다. 칭찬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역자는 별 볼 일 없다고 합니다. 무시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사역자를 지지한 자신도 유명하다는 자랑은 치졸한 교만이며 이런 교만 경쟁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사도가 이미 3:5절 이하에서 말씀한 것처럼 바울 자신이나 아볼로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한 사역자일 뿐입니다. 2. 은혜를 무시한 자들의 교만과 자랑 경쟁(7-8) 첫째, 교만과 자랑은 은혜를 무시한 행동입니다(7). 본문 7절에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라고 합니다. 사도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교만의 문제를 일반화시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질문 형식을 통하여 되묻는 질문 방식으로 그들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 질문 형식은 “누가 너를 남달리(유별나게) 구별하였느냐?” 이 질문은 “누가 너를 남보다 더 돋보이게 했느냐?”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남다름과 돋보이게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마치 받지 않는 것처럼 자랑한 것은 교만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 역시 이웃과 마찬가지로 기껏해야 용서받은 죄인일 따름입니다. 특히 남다른 은사를 가졌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생각하여 감사하고 겸손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받았다면 그것은 자기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자랑을 위해서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문제입니다. 자기 자랑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까지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기 자랑에 의한 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29-3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 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또한 로마서 3:27절에서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라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의 법 앞에서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이런 교만은 죄의 모습입니다. 둘째, 교만한 자들의 착각을 지적합니다(8). 본문 8절에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은 ‘역설 논리’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 교단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받았습니다(고전 1:15). 그들의 영적 교만은 하나님의 구원을 다 얻은 것처럼 영적인 풍요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모습은 밑바닥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만 속에서 영적인 풍요를 즐기며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이제 사도와 같이 사역자들이 없어도 왕 노릇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영적인 황홀경 속에 무아지경으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직도 죄악과 고난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황홀경에 빠져 도무지 고난과 싸워 복음을 증거하는 역동적이며 실천적인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쓴웃음을 보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미 왕들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랬으면 우리도 너희의 왕 노릇에 동참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비꼽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도 똑같은 현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좀 오래 다녔다고 생각된 일부 교인들이 영적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담임목사까지라도 자신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들을 판단하고 심판합니다. 영적인 엘리트 의식의 교만에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고칠 약이 없습니다. 자신은 순종하고 영적인 지도를 받아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히려 자신은 고도의 수준과 영적 지식의 경지에 올라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 착각을 깰 수 있는 비책은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쓴웃음을 짓고 말한 것처럼 “그래 네가 왕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왕이 아닌데 왕이다’라는 말은 망하라는 뜻입니다. 망해야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시정되지 아니하면 어쩌면 지금 구약의 사울 왕과 신약의 가룟 유다와 같이 하나님께서 버림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복음으로 쓰임 받지 않고 심판의 회초리로 사용한 후 버림받을 수도 있습니다. 3. 복음의 선포자를 괴롭게 하지 말라(9-13) 사도 바울은 본문 9-13절 말씀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영적인 황홀경에 빠져 자기도취 상태에서 깨어나도록 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철저히 고난의 삶임을 말씀합니다. 이제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취지로 사역자인 자신의 고난받는 생활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사역자는 사형장의 죄수들처럼 제일 천한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9절). 본문 9절에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라고 합니다. 본문에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라고 합니다. 사도는 자신을 비롯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의 삶의 현장이 바로 고난의 자리임을 말씀합니다. 영광을 받은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이야기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역자들의 복음 선포 사역이 사단의 세력과의 전쟁입니다.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여기 사투(死鬪)는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역자들은 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사역자들을 이웃집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여 아무렇게나 판단하고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은 사단의 세력과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복음 선포자들은 죽기까지 고난받는 자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둘째, 역설적 논법으로 자만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10절). 본문 10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라고 합니다. 사도는 ‘고난받은 복음 선포자들은 어리석고 너희는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약하고 천대를 받지만, 너희는 강하고 존경을 받은 자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논리는 실제로 고린도 교회 교인은 지혜롭고, 강하며, 존경을 받는 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는 지금 역설적으로 그들의 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셋째, 복음 선포자들의 실제적인 고난의 삶을 진술합니다(11절). 본문 11절에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라고 합니다. 사도는 10절에서 역설적인 설명을 끝내고 이제 실제로 자신을 비롯하여 복음 선포자는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다”라고 합니다. 정처가 없다는 말은 집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사역자들입니다. 넷째, 사도 바울은 스스로 벌어서 생계를 유지하며 사도직을 감당했습니다(12절). 본문 12절에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라고 합니다. 사도는 생활비를 위해 수고하며 손수 일해 왔습니다. 그리고 욕을 얻어먹어도 축복하고 핍박을 당해도 참고 견디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다섯째,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13절). 본문 13절에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사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아도 좋은 말로 달랬습니다. 복음 때문에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살아왔습니다. 이런 생활은 “우리가 지금까지”라는 말속에서 항상 그런 삶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활이 바로 복음 선포자의 삶이었습니다. 사도는 영적인 황홀경에 빠져 교만하고 자만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훈계하고 교만합니다. 복음 선포자들을 줄 세워 값을 매깁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지하는 사역자로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 그들에게 복음 선포자들의 고난 받은 삶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사역자를 놓고 서로 비교하여 우월적 지위에 있는 일꾼을 자랑하므로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교만이 헛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복음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4. 교훈과 적용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자만심과 바울 등 복음 선포자들의 고난을 대조시켜 갈등과 분쟁 중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권면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 한국교회와 당시 고린도 교회 상황을 비교해 보면 어쩌면 너무나도 흡사한 분쟁과 갈등으로 교회가 본연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 선포자에 대한 교인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교인에 대한 복음 선포자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 본문은 많은 진리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한 사역자를 놓고 서로 지지하는 사람끼리 파동을 지어 분쟁을 일삼는 그들에게 사도는 이미 3:5절 이하에서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3:6-7)라고 했습니다. 네 파로 나뉘어 자신들이 선호하는 사도가 다른 사도보다 우월하다며, 그 우월한 사도를 모시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못난 사도를 모신 자들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는 자랑과 교만은 고린도 교회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도는 이에 대해 쓴웃음을 지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롯한 복음 선포자가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받은 상황을 이야기하며 더 이상 사역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도는 치졸한 교만 경쟁에 빠지지 않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유사 분쟁과 갈등들이 존재합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를 가지고 논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더 이상 목회자를 괴롭게 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목회자는 사명의 본질을 외면하고 곁길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갈등 양상을 제거하고 교회의 복음 선포 사명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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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 헌법 항존직, 2직제와 3직제한국에 복음이 전해졌다. 미국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해외 선교부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장로회 정치를 사용하는 장로회 선교사들이 장로교회를 세웠다. 1907년 한국 자국민에 의한 독립 노회가 조직되었다. 이 노회를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라 한다. 이어 1912년 9월 1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제1회 총회장은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여 한국에 파송된 미국의 여선교사와 결혼한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아직 일제강점기 시절이므로 미국 선교사를 총회장으로 세워 일본 조선 총독부와 원활한 관계를 맺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총회가 조직된 후 1921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다음 해에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이 출간되었다. 이 헌법이 오늘의 헌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장로회 교파마다 약간씩 수정 보완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가장 충실하게 보존하여 사용하고 있는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이다. 제1회 총회에서 중요 결의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총회 산하 모든 지교회는 교회 명칭 앞에 “조선예수교장로회”을 붙이기로 하였다. 이 명칭은 조선에 소속된 장로회 정치와 교리에 의해 운영된 교회라는 의미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장로회 정치원리를 규정하고 교회 직원을 규정하였다. 교회 직원을 세워 교회를 치리하고 운영한다. 그 직원을 항존직(恒存職)이라 한다. 교회가 설립되면서 교회를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직원이라 하여 이를 항존직이라 한다. 직원인 항존직은 목사, 장로, 집사이다. 칼빈은 개혁교회의 4직제를 완성했다. 목사, 교사, 장로, 집사였다. 칼빈의 4직제와 미국 북장로회의 3직제인 목사, 장로, 집사가 있었다. 미국 남장로회는 2직제로 하였다. 장로(목사, 장로)와 집사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헌법 제3장 제2조 ‘교회의 항존직(恒存職)’에 의하면 “교회에 항존(恒存)할 직원은 다음과 같으니 장로(감독) (행 20:17, 28, 딤전 3:7)와 집사요, 장로는 두 반이 있으니 1. 강도(講道)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 일컫고, 2.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일컫나니 이는 교인의 대표자이다. 3. 항존직의 시무 연한은 만 70세로 한다.”라고 했다.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을 제정할 때 미국의 북장로회 헌법을 번역하면서 항존직에 대해서 미국 북장로회 헌법을 따르지 않고 미국 남장로회 헌법을 따랐다. 교회 항존직을 3직제가 아닌 2직제로 하였다. 그러면서 제2항에 치리만 있는 장로를 “교인의 대표자”라는 규정은 미국 남장로회 헌법이 아닌 미국 장로회 헌법을 채용했다. 이런 제정 절차를 따라 오늘날 장로회 헌법은 교회 항존직을 2직제로 하여 장로(목사, 장로)와 집사로 하고 있다. 그러나 통합 측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은 초기 헌법에서 전면 개정을 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이 헌법 역시 2직제로 하되 여기에 권사를 항존직에 포함했다. “항존직은 장로, 집사, 권사이며”라고 규정한다. 항존직은 안수하여 세운다. 합동 측은 여성 안수가 없으므로 권사는 안수하여 세우지 않고 취임하는 형태로 한다. 그래서 권사는 항존직에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통합 측은 여성 안수를 허용하고 있으며, 그 권사를 항존직에 포함한다. 이처럼 교단 헌법은 2직제로 규정하고 있지만 각 교회 정관에는 3직제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즉, 각 교회는 교단 헌법의 이러한 2직제인 장로(목사, 장로)와 집사가 아닌 3직제인 목사, 장로, 집사로 교회정관을 제정하고 있다. 강도권과 치리를 겸한 목사와 치리만을 위한 장로, 그리고 집사로 하고 있다. 즉, ‘목사, 장로, 집사’인 3직제로 교회 정관을 규정하여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소재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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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 ‘김포메디컬캠퍼스 조성’ MOA 체결인하대학교가 경기 김포시에 ‘김포인하대병원(가칭)’를 건립한다. 인하대학교는 14일 김포도시관리공사, ㈜풍무역세권개발, 인하대학교의과대학부속병원(인하대병원)과 인하대학교 김포메디컬캠퍼스 조성을 위한 합의각서(MOA)를 체결했다. 이날 체결식에는 조명우 총장, 김영모 인하대병원장, 김동석 김포도시관리공사 사장, 김광호 ㈜풍무역세권개발 대표이사 등이 참석했다. 또한 정하영 김포시장, 신한용 총동창회장 및 교수·학생·직원 대표 등이 참석하여 축하했다. 이번 MOA에는 지난해 7월 30일 맺은 ‘인하대학교 김포메디컬캠퍼스 조성을 위한 포괄적 상호협력의 업무협약(MOU)’에 대한 구체적인 협력사항이 담겼다. 이번 협약을 통해 김포도시관리공사와 ㈜풍무역세권개발은 캠퍼스 건립을 위해 필요한 인허가(계획 수립 등) 및 제반 절차를 지원한다. 또한, ㈜풍무역세권개발은 본교에 풍무역세권 도시개발사업 대학용지 9만㎡의 토지를 조성원가 이하로 공급하고, 향후 협의를 통해 토지공급계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인학대는 김포시민 편익 증진을 위해 보건전문대학원 및 공학대학원 등 교육시설 건립과 평생교육원 등의 오픈 캠퍼스(open campus) 시설 운영을 통해 유소년 영재교육부터 평생교육까지 지역주민 생애주기에 맞는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방침이다. 또한, 인하대병원은 시민들을 위한 스마트 의료 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하고 디지털 트윈에 기반한 맞춤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최첨단 디지털 병원을 건립하여 향후 경기 서북부 권역의 대표 거점 병원으로 성장시킬 계획이다. 아울러, 인하대와 인하대병원은 올해 캠퍼스 조성계획 수립, 2023년도 관련 인허가 및 행정절차를 거쳐 2024년도 개교 70주년에 맞춰 착공할 계획이다. 조명우 총장은 “이번 MOA 체결로 인하대학교 김포메디컬캠퍼스 조성사업이 본궤도에 올랐다”며, “사업이 성공적으로 안착해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대학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자료제공, 인하대학교 대외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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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에 임하는 기독교회의 자세와 태도제20대 대통령 선거가 2022년 3월 9일(수)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된다. 대통령은 임기 5년으로 이번 당선인은 2022. 5. 10.부터 2027년 5월 9일까지 5년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임한 기독교인들의 자세와 태도는 무엇인가? 기독교회 신자들은 기독교인이면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다.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선거는 교인으로서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이다. 교인은 각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교인의 권리와 의무를 지닌 동시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 국민의 기본권과 그 행사에 교회가 그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교회가 교인의 국민의 기본권 행사인 양심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 그 누구도 국민의 기본권 행사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신앙적 차원에서 국민의 기본권 행사를 위한 선거에 대한 올바른 개념 정립을 위한 교육은 가능하다. 그러나 교회가 구체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공식적 태도를 밝히면 안 된다. 후보자들이 기독교를 헐뜯거나 대한민국 헌법에서 보장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때는 적극적으로 교회가 나서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는 교회의 지도자를 뽑는 것도 아니고 믿음 좋은 사람을 기준으로 투표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교회 내의 선거 기준일 뿐이다. 교회는 공적으로 교회 내의 선거 기준을 대통령 선거에 적용하여 발언하는 행위를 늘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회는 온 세상과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믿으며, 그분이 모든 권력과 정치를 지배하는 분으로 믿는다. 그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과 공동의 유익을 유하여 국가를 세우고 그 국가의 위정자를 “자기 밑에, 백성들 위에 임명하셨다. 그리고 이 목적으로 위해 검의 권력으로 그들을 무장시켜서 선한 자들을 보고하고 격려하며 행악자들을 벌하도록 하셨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3장 제1항). 우리 기독교회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자들에게 국가의 건전한 법률에 따라, 특히 경건과 공의와 평화를 유지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때에 따라 합법적인 전쟁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인 장로회 신도게요(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다. 그들은 “말씀과 성례의 집행이나 하늘나라의 열쇠의 권세를 자기들의 것으로 취해서는 안 되며, 조금이라도 신앙의 사건들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폭력이나 위험의 염려 없이 국민을 보호하고 교회를 보호해 주는 것을 바랄 뿐이다. 대통령 후보의 불신앙이나 종교의 차이를 언급하며 투표 때 이를 기준으로 투표하게 하는 교회의 선전은 옳지 않다. 물론 대통령이 신앙을 가진다면 교회로서는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바람대로 믿음 좋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 대통령의 행위로 교회는 집단적인 거부 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경험한 바가 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미 후보자 중에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교회의 구성원뿐만 아니라 투표권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을 주권적으로 움직여서 대한민국을 인도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국민에게 선한 지도자, 대한민국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후보자가 누구인지를 감동 감화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 세워진 이스라엘 사울 왕은 악한 왕이 되어야 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심판하기 위해 악한 왕을 세울 수도 있다. 악한 자를 대통령으로 세워 대한민국을 심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다시 헌법 번영케 하여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기 위해 부강한 나라로 세워주시기 위해 하나님께 사로잡힌 고레스와 같은 왕을 세워주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문제보다 하나님께 회개하여 기도하는 것이 먼저이다. 교회를 위해 국가를 지켜 주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주권을 위해 대통령이 뽑히도록 투표권을 가진 국민의 마음을 지켜 주시고 주장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결국 우리 기독교회 교인이 선거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거부한 행위와도 같다. 투표한 후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자. 소재열 목사(한국교회법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