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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12] 자신을 속이지 말라본문 / 고전 3: 18-23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3:16-17절 말씀을 통하여 ‘복음 선포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책임’에 이어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성전 개념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한 자들은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는 자들이라며 경고한 말씀입니다. 경고는 언제나 들으면 좋습니다. 내가 나쁜길로 가고 있을 때 그를 저지하고 막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올마나 좋겠습니까?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우리들이 경고를 받아 생명의 길로 간다면 그 경고는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이 됩니다. 이번 시간에서는 본문 고린도전서 3: 18-23절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치관의 변화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치관이란 단어는 ‘가치’(價値)와 ‘관’(觀)을 이해하면 됩니다.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 지에 대한 나의 관점입니다. 인간이 삶이나 어떤 대상에 대해서 무엇이 좋고, 옳고, 바람직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관점의 근거가 무엇이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이 가치관이 변화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줄도 모르도 자기 잘났다고 소리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섬기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적인 지혜나 지식, 생각을 근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이런 생각과 행동이 허망한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 지혜는 정 반대(18-20) 첫째,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자라는 생각은 자신을 속이는 행위입니다(18). 본문 3:18절에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다시 ‘복음과 세상 지혜’를 대조하는 문제로 되돌아옵니다. 바울은 진정한 지혜란 이 세상에서 미련한 자가 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을 속이지 말라, 즉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에서 자신이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정말 지혜로은 사람으로 평가를 받고 싶으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거짓된 자기 과시적 의식에 빠진 자들에 향한 바울이 종종 사용하던 경고입니다(6:9; 15:33; 갈 6:7). 스스로 현명하다는 그릇된 망상에 잠기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기만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기만으로 일단 미혹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여러 다른 문제에 처해서도 미혹 당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위험성은 세상적인 인간의 지혜를 교회 안에서 자신의 판단기준우로 삼는다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판단을 통해 스스로 현명하다는 생각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판단 기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지혜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것은 결국 자신을 속이고 교회의 다툼을 야기시키고 자들입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속이는 것이며, 또 그것은 자기 자신의 파멸로 이어집니다.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자랑함으로 시기와 다툼이 생겼으며, 고린도 교회 안에 파당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새로운 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인간 중심의 세상적인 지혜를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터득한 인간적인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된 교회를 자기 중심적으로 이끌어가려는 잘못이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행위로 교회는 분열이 일어나고 나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기준이 되고 판단의 근거가 된다면 분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과 경험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지혜와 생각과 판단과 지식이 교회를 운영하는 기준이 되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자입니다. 속직히 자신의 미련함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혀 그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여전히 지혜 있는 자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일 뿐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보시기에 세상 지혜는 어석은 것입니다(19). 본문 3:19절에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라고 합니다. 사도는 세상에서 자신이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한 것 역시 어리석은 것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세상적인 지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 유이는 무엇입니까? 본문은 하나님이 세상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세상 지혜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인 지혜로 자신의 값을 매기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세상적인 지혜로 사도들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또한 사도들을 세상적인 지혜정도로 생각합니다. 사도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모든 가치의 척도가 세상적인 지혜입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새상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평가합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교회 직분을 평가합니다. 그 세상적인 방법으로 판단하는 모든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차라리 세상적으로 바보가 되어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명령에 대한 이유를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써 설명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아주 날카롭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서로 정반대이기에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평가에 의하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인용된 구약성경 본문은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라고 합니다. 욥기서 5:13절에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자칭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약삭빠른 자를 자기 꾀에 빠지게 하셔서 그들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지혜가, 세상적인 방법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셋쩨,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되게 하십니다(20). 본문 3:20절에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20절에서는 시편 94편 11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이 헛된 것임을 아신다고 밝입니다. 여기서 ‘생각’이란 말도 바울에게는 깊은 생각과 계획들, 또는 어떤 음모들을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어떤 생각도 감출 수 없고 노출될 뿐이 아니라 미련한 것으로 판명됩니다. 따라서 사도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의 어떤 지혜도 결국은 미련한 것임일 천명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지혜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해 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면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을 하고 싶은 욕망은 결국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세상적인 지혜를 가지고 올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적인 지혜, 세상적인 지식을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자기 자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으로 지혜있다고 자고한 그들의 생각을 헛되게 하실 것입니다. 헛되게 한다는 말은 무의미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의미없는 말이나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우리는 허망과 망상으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인생을 의미있게 살아야 합니다. 값지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된 삶이 아니겠습니까? 2.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21-22) 첫째, 생각과 판단의 오류를 시정해야 합니다(21) 본문 3:21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라고 합니다.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결론적인 이야기를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므로 아무도 사람들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말씀은 18-20절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1:30-31절에 언급된 ‘자랑’이라는 주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자기자랑을 상기시키며 이를 교정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교정을 받는 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자신이 잘못된 신앙을 하고 있는데 이를 교정받지 못한다는 것만큼 불행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본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은 만물, 즉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너희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자랑’은 고린도 교회의 분파 행위에 때 나타난 두드려진 현상입니다. 그들은 파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는 바울’, 나는 ‘아볼로, 게바’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판단에서 나온 오류입니다. 그들이 바울이나 아볼로, 게바 등을 상전으로 모시면서 자신의 모신 주인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린들의 위한 사역자입니다. 즉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것입니다. 그들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또한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자랑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어떤 주인이 인력 사무소에 인부 세 사람을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부 3명이 왔습니다. 그 세 사람은 일꾼입니다. 주인이 인부들을 자랑하면 되겠습니다. 인부 3명을 놓고 나는 바울파, 나는 아볼로 파, 나는 게바 파라고 하면서 분파를 만들어야 합니까? 그 일꾼은 일꾼일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긍극적으로 주인이신 하나님이 일꾼으로 불어주셨는데 우리는 추종하는 그 일꾼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둘째, 파당은 가치관의 혼란, 또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22). 본문 3:22절에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라고 말씀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복음 전파자에 불과한 바울이나 아볼로, 게바 등을 내세우며 자기가 추종한 지도자 중심의 분파로 교회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의 생각과 주장을 교정하기를 “모든 것들이 다 여러분들의 것”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모든 피조물로 다 고린도 교인들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사역자들, 즉 섬기는 자들은 교회와 교인들을 주관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교회와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돕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1:24절에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전파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이며 따라서 교회의 일꾼들이기도 합니다. 고린도 후서 4:5절에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의 이름을 다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외에 결코 누군가에 종속된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복음 전파자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에게 속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사역자라면 ‘나는 여러분에게 속해 있다’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1:12절이나 2:4절에서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다’고 했던 이야기를 절처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란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모든 사역을 포함합니다. 모든 것이란 22절에 나오는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 전체를 의미하니다. 여기서 지적된 것은 인간(바울, 아볼로, 게바), 사물(세계, 생명, 사망), 사건(현재의 것, 미래의 것)등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상의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이십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삶과 죽음은 물론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위에 군림하는 주가 되셨습니다. 그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도 더 이상 죽음의 노예가 아닌 그리스도의 주권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직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살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이 요구한대로 생각하거나 살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권에 참여하여 이 세상이 올바른 가치관과 생각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3.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의 주권(23) 본문 3:23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말씀은 최종적인 결론의 말씀입니다. 이 결론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이외에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세상적인 지혜나 그 지식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임을 말함으로써 모든 논의를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맞추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만물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께 속했으며, 하나님께 의존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 대한 주권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질서가 회복되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으로부터 벗어난다면, 그들은 다시 타락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 결과 타락한 이 이 세상의 질서, 즉 피조물들이 종으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4. 교훈적 적용 본문인 18-23절은 ‘누구에게 속해 있다’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드러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음을 말씀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교회도 자신들이 선호한 사역자들 중심의 파당을 만들어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다’라는 파벌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 파벌의식은 결국 교회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담임목사 지지세력, 장로의 지지세력 등으로 파당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나는 목사에게 속해 있고, 나는 장로에게 속해 있다며 자신의 소속을 말하면서 편가르기를 시도합니다. 이는 모두 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멎어진 것이 아니라 새상적인 지혜와 지식, 생각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자기 자랑,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습니다. 이러니 하나님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를 다른 재료인 비진리로 교회를 세우고 운영하려고 합니다. 이는 분명 교회도 아니요, 신앙도 아닐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런 생각과 행동을 허망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고린도 교회처럼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저온 것이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가져옵니다. 소위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들아옵니다. 도무리 이를 버리지 않고 고집과 아집으로 자신의 생각과 뜻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사도는 이런 자들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주권을 행사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 자신을 속이고 허망한 세상적인 지혜와 생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월적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사역자들에게 속해 있다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자랑하려는 것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의 한 방법이 그들의 생각을 허망하게 해 버립니다. 아무런 쓸모 없는 사람이 되게 해 버립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일평생 하나님의 말을 했다고 주장하나 하나님은 “그것은 너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었다”라고 판 무시해 버립니다. 이를 가리켜 ‘헛수고 했다’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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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종교 철학적 접근의 위험한 현대신학서철원 박사는 그의 교의신학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신학이란 어원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학문’(the science concerning God)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한 학문’으로서 신학을 정의하면 신학은 마땅히 계시에 기초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고 자기의 사역 곧 창조를 알리셨다. 자신이 창조주이시고 섭리주이심을 계시하였다. 또 창조를 통하여 자기의 영광과 권능을 계시하셨음 뿐만 아니라(시 19:16) 실제로 공포하셨다.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성문화된 문장의 형태로 주어졌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게르할더스 보스 박사 역시 그의 성경신학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비인격적인 대상들을 과학적으로 다룰 때는 검사하고, 실험하는 방법론을 사용하지만, 영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인 하나님에 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러한 존재가 스스로 자신들을 드러내어 알려주실 때에 한하여 우리는 그를 알 수 있다. 모든 영적인 생명은 그 본성상 감취어진 영역, 즉 닫혀진 영역인 것이다. 하나님의 내면적이고 감추어진 마음은 하나님 편에서 자의적으로 열어 보이실 때만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현대신학은 성경에 대한 신의 계시를 부정하므로 출발한다. 이는 예지계와 현상계를 구분하여 초월해 계신 초월자는 현상계에 계시할 수 없는, 계시의 가능성을 부정한 철학자 칸트의 우산 아래 있다. 개혁신학의 후예들은 현대신학의 접근방법에 대한 변증은 언제나 투쟁적이었다. 이는 과격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필연적이었다. 도울 김용욱의 철학적 방법에 따른성경과 기독교적 접근은 기독교의 근본정신을 해체한다. 철학적이고도 인문학적 방법으로 접근한 그의 종교와 성경 이해는 다분히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으로 정죄 된 사상임이 틀림없다. 신구약 성경의 신적 계시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교리체계를 허물고 있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는 허구하고 주장한다. 그의 불교단체에 가서 강의한 내용은 기독교를 표적 삼고 있다. 예수의 신성을 거부한 그의 인문학적, 종교 철학적 접근에 의해 마가복음을 강의한다. 그가 택한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쓰였다는 의미보다 마가복음이 역사적 예수를 신으로 접근하지 않고 인간 예수로 접근하고 있다고 평가하여 예수를 민중의 혁명가라는 인문학적, 종교철학적 접근을 하고 있다. 인문학이나 종교 철학으로 신의 계시를 부정하여 기독교의 신적 권위를 가진 성경을 거부한 부류가 있다. 또 한 부류는 인문학적으로 계시에 접근하여 설명하려는 부류가 있다. 이들 모두는 한결같이 성경적 기독교를 위태롭게 하는 사상적 체계임이 틀림없다. 원래 인문학이란 학문의 한 분과로서 인간의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학문의 접근방식은 실험하고 관찰하는 자연과학의 영역보다 이성적 사색을 통해 연구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인문학적으로 접근하여 언어와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따위를 이성적 체계에 의해 연구하면 하나님이 발견되는가? 이러한 접근방식으로 성경을 연구하면 하나님이 발견되는가? 인문학적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것이 이 시대 트렌드(trend)가 되고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흉내내어 인문학적으로 성경에 접근한다. 그리고 설교학의 방법론으로 접근하고 있는 추세다. 마치 이러한 학문과 설교의 방법론이 가장 고상한 학문적인 접근방법인 줄 착각하지만, 이는 기독교를 현혹한 것임은 분명하다. 인문학적, 혹은 종교 철학적으로 구약성경에 접근하면 모세 율법은 수메르 시대의 우르남무(Ur-Nammu)의 법전과 기원전 1800년의 함무라비 법전에 영향을 받은 것에 불과한 것일 뿐 독특한 계시의 측면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개혁신학은 성경계시가 기록될 당시의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라는 맥락과 배경 속에서 살피되 이를 인문학적 접근방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 대한 접근방식은 서철원 박사가 언급한 대로 인문학적 접근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학문’은 계시 중에서도 특별계시 중심이어야 한다. 이를 이성적 사색의 냄새가 난다는 ‘계시 의존 사색’이라는 용어보다 ‘계시의존 신앙’으로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혁신학자들은 ‘자연계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自然)이란 근본 원인이 하나님이 아닌 ‘스스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창조, 혹은 ‘세상에 있는 갖가지 모든 것’을 의미한 ‘만물’(萬物)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자연세계’가 아닌 ‘창조세계’, 혹은 ‘만물세계’, ‘피조세계’라고 표현한다. 이런 이유로 ‘자연계시’라 하지 않고 ‘창조계시’, 내지 ‘일반계시’라고 한다. 성경과 설교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방법은 결국 자연계시에 도달하게 되며, 이는 이신론(理神論) 주의자에 이르게 된다. 이들에 의하면 성경의 사도 바울 역시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수도를 통해 자신이 창안한 바울 종교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기독교라는 주장은 기독교를 파괴한 전술 전략이다. 그런 사람을 교회에 초청하여 강의를 듣는다. 그런 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로 분류해야 하는가? 이러한 교회들이 한국교회를 대표한 것처럼 보이려는 온갖 술수는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당 교회가 어떤 교단에 소속되었는가를 보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쉽게 하는 말이 ‘교단이 구원해 주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물론 교단이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한국교회는 여전히 신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이를 전제하지 않으면 신학과 신앙이 불가능해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에 신의 계시로 접근하면 안 되고 인문학적, 종교 철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인문학적으로 성경과 설교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의 복음을 더 이상 해체시켜서는 안 된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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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11] 복음 선포자에 대한 경고본문 / 고전 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지난 시간에 본문인 고린도전서 3:5-15절 말씀을 통하여 “복음 선포자(사역자, 디아코니아)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역자란 섬기는 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든 복음 선포자나 직분은 섬기는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주인의 명령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곤란합니다. 사도는 교회를 하나님의 건물로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그 건물을 짓는 일꾼들로 비유했습니다. 이 비유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면서 그 성전을 위해 사역하는 일꾼들의 책임을 언급했습니다. 사도는 그 책임을 언급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 기초가 흔들리면 건물이 흔들이듯이 바로 교회가 흔들릴 것입니다. 사역자들이 교회를 섬기면서 자신들 중심의 파당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세례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기초위에 세워진 교회의 본질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바른 복음의 기초위에 세워지지 않는 교회는 무너지며, 심판의 날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모든 사역자가 반드시 숙지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본문 고린도전서 3:16-17절 말씀을 통하여 ‘복음 선포자에 대한 경고’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책임’이었다면 이번에는 ‘경고’입니다. 1. 거룩한 성전 개념으로서 교회의 개념(16)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16, 상). 본문 3:16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단순히 건물에 있지 않습니다. 사도가 복음을 선포하자 믿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믿는 자들의 모임이 고린도 교회 형태로 존속하게 되었습니다. 믿는 무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말씀한 성전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된 신자들과 함께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보편적으로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건물 자체를 성전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러한 성전 개념은 구약성경을 통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구약성경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였는가? 라는 질문은 구약성경을 통해서 알려 주셨습니다. 구약성경 가운데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택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과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계약을 위반하자 하나님 저주의 형벌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전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위반한 타락한 전 인류는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심판 중에서도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택한 백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구약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택한 백성들과 만나주시는 방법으로 성전, 제사 제도를 도입하셨습니다. 그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성전은 특별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전과 제사와 제물은 장차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한 내용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성전 등은 그림자였다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그 그림자의 실체였습니다. 아파트를 건축할 때 분양을 위해 사전에 모델하우스를 먼저 짓습니다. 모델하우스 대로 건축하겠다는 것입니다. 아파트가 다 완성되면 그 모델하우스는 철거됩니다. 왜 철거합니까? 그 모델하우스가 본 아파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의 성전, 제사, 제물 등은 모델하우스와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백성이 자신이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예루살렘의 성전체제가 타락할 것을 보고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막 13:1-2). 자신이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약속했습니다(요 2:19).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언하면서 자신이 새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약속 하였습니다. 이는 새로운 건물을 짓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사도가 기록된 고린도전서 기록 이후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제 구약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는 행위가 이제 그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안에는 모두가 다 거룩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이 이제 장소적 개념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한 무리를 교회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무리의 모임을 거룩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모임을 교회라 한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인 셈입니다.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 역시 성전에 속한 자들로서 성전 자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믿는 자들은 성령이 함께한 성전입니다(16, 하). 본문 3:16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너희(복수)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복수)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함께 모인 교회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모습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 각자와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은 그들이 대단한 위엄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함께 해 주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임재해 주십니다. 사도는 이미 고린도전서 2:10절에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곳을 우리에게 보이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신 분”입니다(고전 2:12).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과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신 분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은혜와 원천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주어진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해 주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 증거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구원받는 길은 율법준수나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해 주신 결과입니다. 2.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자에 대한 심판(17) 첫째, 누구든지 성전을 파괴하면 그 사람도 파괴될 것입니다(17, 상). 본문 3:17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의 본문입니다. 만일 누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파괴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그 성전이다. 우리가 여기서 첫 번째로 묵상하는 것은 누구든지 성전을 파괴하면 그 사람도 파괴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성전을 허무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 속에서 분명하게 경고하는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라는 말씀에서 ‘더럽히다’와 ‘멸하시다’는 동일한 문맥에 따라 ‘파 괴하다’, ‘해치다’, ‘부패케 하다’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누구든지 성전을 타락시키거나 그 성전에 위해를 가져오는 사람들을 엄중하게 처리하실 것입니다. 또한 그 성전 된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그 머리 위에 자초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거룩하게 예배드리고 있는 성전을 파괴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성전을 파괴한다는 말을 건물 창문 등을 부수는 그런 식의 파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성도들의 하나 된 모임과 그 실체를 파괴하는 것을 ‘성전 파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내의 분쟁은 하나 된 성전을 허무는 일이라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둘째,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17, 하) 본문 17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에 그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는 자는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즉 성전을 파괴한 자가 멸망을 당한 이유가 바로 그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견주거나 이 거룩에 대들 수 있습니까? 감히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시며,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항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실행에 옮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삼하 6:6-7절에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이 임재한 ‘하나님의 궤’에 거룩하지 못한 자가 만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진노하시며 그 자리에서 죽게 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자 외에 그 누구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은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신 성전의 깊숙한 지성소에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 하나님 여호와의 거룩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육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오셔야 거룩한 구원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인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셋째, 우리는 그 성전입니다(17, 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한 자들만이 거룩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어떤 사람들도 중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유일한 중재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성령이 임재한 거룩한 자, 곧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성전 된 우리를 파괴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성전 된 우리는 거룩한 주님을 모신 자들로서 거룩해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거룩한 구원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이후 우리는 거룩한 성전의 본래 모습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3. 사도 바울이 강조한 요점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거룩한 성전 된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은 멸망을 당할 것을 경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역시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는 곳입니다. 이러한 성전인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괴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합니다. 사도가 이런 말씀을 하면서 교회의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구원의 도리를 왜곡하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역자들은 이 성전을 허무는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사역자들이 바른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에서 벗어나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성전을 무너지게 하는 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는 아직 복음서가 없었던 때입니다.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가 기록되기 훨씬 이전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고린도전서 이전에 이미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고린도서를 통해 사도는 줄기차게 유대인의 구원 형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관인 율법을 준수해야 하고 오직 유대인으로 태어나야만 구원이 임한다는 선민사상을 거부합니다. 바울 자신도 과거에는 그 유대교의 엄격한 교리를 집행하는 자였지만 이제는 그러한 구원관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이 구원은 유대인의 담장을 뛰어넘어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진 복음이었습니다. 이제 율법을 지켜야 하고 할례를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 자는 교회의 기초를 허무는 것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경고는 오늘날 우리가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이미 3장 10절에서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하라’라고 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우상들이 거주하고 사람들이 부패한 고린도의 유일한 희망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당파를 만들고 세상적 지혜에 따라 자랑하고 교만하고 상대방을 멸시함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바른 복음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 깊숙이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자인가, 아니면 파괴하는 자인가?’라는 말씀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12절에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영적인 것을 사모하면서 나에게 주신 은사로 교회 덕을 세우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교회 덕을 구하지 아니하고 나의 유익을 구하기 위한 봉사나 헌신은 오히려 교회를 파괴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한 교회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을 교회라 했습니다. 이런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헌신하는 봉사는 바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준다면 성전을 스스로 파괴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은 간섭할 것입니다. 교회 파당을 만드는 것 역시 성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은사를 주셨는데 그 은사를 악하게 사용하는 것 역시 성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한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은 우리 모든 사역자가, 직부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그러한 격려와 위로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길입니다. 이러한 직분을 잘 감당하여 교회를 세우는데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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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10] 복음 선포자(사역자, 디아코니아)의 책임본문 / 고전 3:5-15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지난 시간에 고전 3:1~4절 말씀을 통하여 “육신적인 분쟁의 모습을 보인 교회”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의 은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은 파당을 짓습니다. ‘나는 바울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게바파’, ‘나는 그리스도파’라는 식의 분파는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분쟁이 일어납니다. 이는 결코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거나 징계일 것입니다. 이는 사도가 전한 바른 복음으로 인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감격스러운 은혜를 깨닫지 못했거나 체험하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이번에는 본문인 고전 3:5-15절 말씀을 통하여 “복음 선포자(사역자, 디아코니아)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변화를 받고 유대교의 교리에 반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된 교리였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전혀 구원이 없다는 것이 유대교가 가르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른바 제2차 선교여행 중 A.D. 50~51년의 겨울에 고린도에 도착하여 약 1년 반을 머무르면서 그곳에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 A.D. 55년에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그때에는 아직 복음서가 없는 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그곳에서 3년을 지낸 뒤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3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게바를 만나 그와 함께 15일을 머물렀습니다(갈 1:17-18).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유대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돌아섰습니다. 사도는 여전히 본문 말씀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초석임을 말씀합니다. 그러한 초석 위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자(종)의 책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 교회를 세워가는 사역자들의 역할(5-9) 사도 바울은 농사의 비유를 통하여 교회를 세워가는 사역자들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사역자들은 역할은 서로 다르지만, 동역자로서 자기의 일한 대로 상을 받을 것을 말합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며 집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교회 내에서 지도자 사역자는 디아코니아(diakonia) 입니다(5). 본문 3:5절에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 내에서 지도자들을 두고 서로 자신들이 선호하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교회 내에서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는 질문형식이지만 책망의 성격이 강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지도자를 두고 파당을 삼는 것은 전혀 옳지 않습니다. 이는 신령한 복음의 진리를 사모한 자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내 지도자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교회 내 지도자는 주님이 시키신 대로 일하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사역자’라는 단어를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교회 내에서 지도자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교회 내 지도자는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들이라고 강조합니다. 여기 ‘사역자’라는 ‘섬기는 종’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디아코니아(diakonia)로서 원래 식탁에서 시중드는 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곧 섬기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종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교회의 직분들에 대한 칭호를 살펴보면 구별 없이 한결같이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교회 내에서 모든 직분은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직도 섬기는 직분입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고전 12:5). 그러나 모든 직분은 섬기는 자입니다. 각 직분에 값을 매겨 차등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직분을 계급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모든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섬기는 종입니다. 종은 계급이 없습니다. 둘째, 농사의 비유를 통하여 교회를 세워가는 사역자들의 역할을 언급합니다(6-7). 본문 3:6~7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과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그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들어야 믿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원 사역을 위해 고용된 종들입니다. 주인으로부터 고용되어 임무를 수행한 머슴들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성도들을 섬기도록 위임된 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임된 종들은 성도들의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후 4:5절에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사역자들은 자신을 전파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심을 전파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도들의 종이 되어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각각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받은 모든 신자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각자 그 은사를 통하여 섬기게 합니다. 섬기는 종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하여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은사를 통한 자기 자랑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에게도 각각의 은사를 주셔서 섬기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진리를 자신과 아불로를 예로 들면서 설명합니다.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합니다. 심고 물을 주는 모든 사역자는 섬기는 자들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 은사일 뿐이라고 합니다. 누가 더 낫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믿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를 ‘심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나자 그 뒤로 아불로는 그의 은사와 사명에 따라 고린도 교회를 양육하였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성장시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성장시킨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다면 그 직분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면 됩니다. 나에게 맡겨지고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며 원망하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셋째,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사명을 감당하는 동역자입니다(8-9). 본문 3:8~9절에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라고 합니다. 심는 사람과 물을 주는 사람은 하나입니다. 각자 자기가 일한 대로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사와 사명을 받은 모든 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역자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밭이며 건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성장시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과 아볼로 같은 사람에게 각각의 은사와 사명을 주셔서 교회를 섬기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는 같은 복음 선포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밭’, ‘심는 일’, ‘건물’ 등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림 언어입니다. 렘 1:10절에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라고 합니다. 또한 24:6절에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를 세우고 양육하는 하나님의 일에 일꾼들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맡은 일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모두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는 같습니다. 다만 각자가 받은 은사와 사명에 따라 자신의 직분을 감당할 뿐입니다. 2. 지혜로운 건축자 같이 기초를 놓은 바울(10-11) 첫째,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복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10). 본문 3:10절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로운 훌륭한 건축가가 되어 기초를 놓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위에 건물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물을 세우는 방법에 대하여 각자가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라고 합니다. 그는 에베소서 3:7절에서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은혜의 선물을 따라 일꾼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엄격한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로 행했던 자신을 다메섹도 상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로 불러 주셨습니다. 사도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교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 뒤 다른 복음 선포자들이 와서 바울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 집을 지어가는 일을 하였습니다. 자신은 ‘지혜로운 건축자’(사 3:3)같이 그 기초를 잘 놓았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사명자는 사도 바울이 세워놓은 기초 위에 어떻게 교회를 세울지 조심하고 주의할 것을 언급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11). 본문 3:11절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에 의해 이미 놓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언급한 다른 복음을 의미합니다. 당시에 다른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복음에 반대하여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자신이 닦아 놓은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기초는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엡 3:3). 이러한 계시에 의해 사도 바울이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석 외에 다른 기초를 놓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약화시키고 변질시킨 율법, 세상적인 지혜, 인간의 공로 등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다른 복음에 해당합니다. 3. 어떤 재료를 써서 집(교회)을 세워야 합니까?(12-15) 첫째, 건물의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12). 본문 3:12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말씀합니다. 건물을 세울 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세우는 사람도 있고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초가 튼튼하고 견고해야 온전한 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건축 재료라는 그림 언어를 통해 복음 선포의 진정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복음 선포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다른 복음 선포는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나 인간의 공로 사상은 복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마치 모래 위에 지음 집과 같이 허물어질 것입니다. 둘째, 심판 때에 복음 선포자 사역의 질이 드러날 것입니다(13). 본문 3:13절에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심판 날에는 각자의 일한 결과가 불로 시험을 받아 밝혀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사역에 대한 공적으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14). 본문 3:14절에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복음 선포에 충실한 종들은 심판 날에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역으로 인한 해약이 심판의 불로 태워져 버릴 것입니다. ‘상’의 개념은 이 세상에서 같은 개념의 상은 아닐 것입니다. 그 상도 은혜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찬양하는 그런 상일 것입니다. 즉 자기 자랑을 위한 상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셋째,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은 사역자들이 있을 것입니다(15). 본문 15절에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공적이 타 버리면 상을 잃고, 그런 사람은 구원을 얻어도 마치 불 속에서 간신히 헤쳐 나온 것과 같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 스스로는 구원을 받긴 하지만, “불로 통과한 자 같이” 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또한 ‘행위의 심판’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의 공로를 쌓아 우리의 구원을 확실히 하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은 신앙의 대원칙이며, 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 믿음의 순종의 삶을 책임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임은 분명합니다. 롬 1:5절에서 바울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의 삶이 복음과 상관없을 경우, 종말의 대 심판 때에 불로 태워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순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상이 있을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엡 2: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시므로 이 모퉁이 돌이 고린도 교회 초석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 초석 위에 건물(교회)을 세울 때 주의해야 합니다. 건물의 재료인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 등이 있습니다. 각 사람의 세우는 공적이 그날에 불로 나타나 밝혀질 것입니다. 건축은 터 위에 집을 짓는 일로써 건축 재료에 따라 달라집니다. 불에 타도 없어지지 않는 금, 은. 보석으로 건물을 짓는 것과 불과 타서 없어질 나무, 풀, 짚으로 집을 짓는 것으로 대조하는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공적이 불타서 없어지면 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받지만 불 가운데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사역자들이나 직분자들은 교회를 섬길 때 분명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기준이 모호하면 신앙도 모호합니다. 직분을 감당하는 것도 모호하여 분쟁을 유발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분쟁이 따라다닐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지 아니하면 실수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적인 지혜나 공덕 사상, 기복사상으로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양육하고 이런 식의 복음을 전한다면 다른 복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는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그 말씀으로 운영됩니다. 인간의 욕망을 위한 교권의 수단으로 교회를 이용하면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불로 태울 때 없어질 공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평생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헛수고’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있으려면 바른 복음 안에 거해야 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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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필독] 교회 분쟁을 예방하는 길새해가 밝았다. 코로나19 사태가 몰고 온 교회 현실은 너무나 어렵다. 그 어려움은 일제 강점기와 6ㆍ25와 같은 어려움과 환난이 아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감염병으로 인한 환난이다.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국가적인 조치는 사회적 거리두기이다. 이는 교회의 대면 예배를 제한하는 정책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행위인지에 대한 문제는 변론으로 하고 일단 교회에 교인이 모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모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교인이 모이지 못하면 자동으로 헌금이 모이지 않는다. 헌금이 모이지 않는다면 교회 운영에 치명상이다. 이런 이유로 명분상 대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신앙의 원칙을 말하지만, 이 역시 한계로 보인다.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 감염을 우려한 사람들이 교회 출석을 꺼리고 있다. 또한 예배에 참석 인원을 제한한 정부 정책 때문이기도 하다. 〇 의결권자 확정 문제 이제 교회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교회 교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전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교인들이 많다. 언제까지 출석하지 아니할 때 교인의 지위가 상실되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는 교회 의결권자를 확정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교회 재산처분과 교단 탈퇴, 정관변경에 대한 문제를 의결할 때 의결권자 확정 문제는 결의의 효력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〇 재산처분 교회 담임목사는 교회를 운영할 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교회 재산을 처분해야 할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는 반드시 그 적법성에 대한 원칙이 무엇인지를 사전에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 정관에 재산처분에 방법이 있으면 그 방법에 따르면 된다. 재산처분이 당회에 위임되었을 때 당회가 재산을 처분할 수 있다. 이때에는 재산을 처분한 후 반드시 교회 명의의 통장에 입금한 후 근거를 남기고 나서 집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공동의회에 보고하여야 한다. 처분 권한은 당회에 위임하였을지라도 처분 후 재정에 대한 집행 권한은 반드시 공동의회에서 승인해 준 예산의 범위 안에서 집행해야 한다. 특별한 집행이 필요할 경우, 공동의회 결의를 통해서 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교회는 예산편성 외에의 특별한 경우 집행 권한까지 당회에 위임된 경우가 있다. 이런 정관을 갖고 있는 교회는 당회가 집행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〇 재정집행 담임목사가 재정집행을 하기 위해 재정위원장(혹은 부장)과 의논하여 집행할 때 반드시 집행의 근거를 확인해야 한다. 집행하고자 하는 내용이 전년도 공동의회의 예산편성에서 예산 항목이 있느냐를 확인해야 한다. 공동의회에서 편성해 준 예산의 범위 안에서만 집행하여야 한다. 편성된 예산 항목이 없는 부분을 집행하려고 할 때는 교회 정관에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지를 확인하여야 한다. 추가예산, 항목 간 변경, 목적헌금 사용 방법 등에 관한 규정이 없을 때 당회를 통해 임시 공동의회를 개최하여 처리하여야 한다. 이것도 녹록지 아니할 때 차기 공동의회에서 승인을 받고 집행해야 한다. 담임목사는 재정집행을 하기 전에 반드시 집행의 근거가 있는지 그것부터 확인하여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재정 사고로 문제가 될 수 있다. 공동의회에서 재정집행 승인 결의 때 이를 문제로 삼아 승인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〇 각종 결의의 적법 절차 교회 분쟁 중에 교회의 각종 주요 문제를 결의하는 과정에서 그 위법성 여부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공동의회, 당회, 제직회 등에서 결의할 때, 소집 절차와 의결 방법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담임목사가 이러한 회의 원칙을 잘 몰라 불법 결의를 하는 경우가 있다. 모든 회의 전에 반드시 무엇이 회의 절차인지를 확인하고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참고, 소재열 목사, <교회 표준회의법> 참조) 특히 당회 결의 때 모두가 합의하면 그만이지만 합의가 되지 않아 다수결로 표결할 경우, 적법한 소집 절차와 결의방법에 하자일 경우, 무효 사유가 되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〇 담임목사는 소통해야! 담임목사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여도 당회에서 의논한 후 처리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처리가 위법일 경우, 담임목사 혼자 책임이 아니다. 그 문제를 지적할 당회원은 없을 것이다. 교회 분쟁은 담임목사가 장로들과 소통이 되지 아니하므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당회원은 담임목사가 처리한 것이 불법이어서가 아니라 의논하지 않고 장로들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처리했다는 사실을 더 큰 문제로 삼는 경우가 있다. ‘ 모든 분쟁의 원인은 담임목사가 장로들과 교인들과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담임목사의 불통과 고집은 결국 교회가 분쟁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〇 교회는 집합체 교회는 개인의 소유가 아닌 교인들, 단체의 소유이다. 단체의 운영방식을 따라야 한다. 교회 명의 통장을 개설하여 그 통장으로 재정이 관리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실명제법이 적용되고 있다. 실소유자 명의의 통장으로 금융거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일부 교회에서 담임목사 개인 통장으로 교회 재정을 관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또한 장로 개인 통장으로 관리하는 경우도 있다. 교회 재정을 담임목사나 장로 개인 통장으로 관리해서도 안 된다. 반대로 담임목사나 장로의 개인 재정을 교회 통장으로 관리해서도 안 된다. 이는 탈세 의혹을 받을 수 있다. 교회 명의의 통장에 입금된 재정은 담임목사가 임의로 집행하면 안 된다. 반드시 교회 재정집행 절차를 따라야 한다. 외부 교회나 기관에서 교회 명의의 통장으로 각종 지원비를 제공해 주었을 때 담임목사 개인을 위한 지원인가, 아니면 교회에 지원하는 지원비인지를 정확히 구분하고 집행해야 한다. 교회 명의로 통장을 개설하여 실소유자 명의로 금융거래를 할 수 있도록 교회마다 사업자 번호를 발급했다. 이때 개인으로 보는 단체가 아닌 법인으로 보는 단체로 사업자 번호를 발급받아야 한다. 〇 담임목사의 소득에 대한 과세 담임목사는 다양한 방법으로 소득이 발생한다. 심지어 은퇴할 때 받은 각종 격려금, 위로금, 사택 제공 등이 있다. 이 문제는 증여에 대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제아무리 격려금이나 위로금, 선교비로 지급받았을지라도 종교인의 기타소득에 해당할 수 있으므로 주의가 요망된다. 〇 결론 담임목사는 본인이 교회를 개척하였으니, 혹은 누구도 담임목사의 행정에 반대한 교인이 없는 교회일지라도 담임목사는 철저한 원칙에 따라 목회를 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상상의 법으로 교회를 운영할 때 나중에 법의 원칙을 적용할 때는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교인들이 출석하지 않는 틈을 타 교회 재산을 매각해 버리는 등의 일들은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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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제언, '교회 연말 정기공동의회 미루면 안 된다'코로나19 사태로 교회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대면 예배가 이루어지면서 연말 공동의회 소집도 녹록지 않다. 그렇다고 공동의회를 하지 않고 뒤로 미루면 문제가 얽혀져 더 복잡해질 수 있다. 연말 정기 공동의회는 1년 동안 재정 집행 승인과 새로운 회기의 재정 승인권이 있다. 그리고 당회에 재산처분이 위임된 교회의 당회가 일정한 재산을 처분했다면 당회 경과보고와 재정 보고를 통해 재정이 잘 정리되어야 한다. 코로나 사태라는 이유로 공동의회를 하지 않으면, 재정 집행과 예산편성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언제나 교회 분쟁은 사소한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공동의회는 출석한 대로 소집하기 때문에 이미 정관에 규정한 대로 적법한 절차를 통해 공동의회를 소집하면 된다. 1년 동안 재정 집행의 최종 승인권은 공동의회이며, 공동의회에서의 승인은 대단히 중요하다. 공동의회를 미루면 그것이 더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재정 회계장부와 공동의회 회의록을 잘 정하여 보관하여야 한다(참조, 소재열 목사 지음, <교회 적법절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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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김포시정 무엇이 달라지나?더 자세한 사항은 김포시청 블로그(https://blog.naver.com/gimpo2010/222602970650)에서 확인하세요 2022년 김포시정 무엇이 달라지나?새해부터 달라지는 행정, 교육, 경제 등 관련 분야 제도와 시책등을 확인하세요<<지방자치·행정 분야>>- 32년만에 지방자치법 개정-포스트코로나에 대비한 메타버스 플랫폼 활용-공유오피스 신설-읍면동 행정체계 개편 추진<<민원서비스 분야>>-시청사 전자출입시스템 도입과 별도 민원상담공간 운영-비대면계약업무는 사업소, 읍면동까지 확대 실시-청사 부설주차장 증설-보안성이 강화된 차세대 전자여권 발급 시행<<교육·문화 분야>>-(가칭)'청소년 플러스 카페' 개관-평생교육플랫폼 운영-구래동문화거리 시민친화형 활력공간 조성-통진현전시관 개관-애기봉평화생태공원 생태탐방로 조성-김포 시티투어 시범 운영<<복지·체육 분야>>-통진에 위치한 제2종합사회복지관 개관-장애인등록증 배송 서비스-아동보호전문기관 설치 및 육아종합지원센터 재개관-영유아 복지제도 시행-솔터축구장 대관<<지역·경제 분야>>-민원행정지원관 제도 운영-노동권익센터 개관-소상공인복합지원센터 개관-음식점 주방개선 사업 추진-농민기본소득사업 시행<<도시·교통·환경>>-김포대로 버스전용차로 연장-지역환경전문가 양성-문수산 산림휴양치유센터 개관-걸포,마송 중앙공원 야간조명 명소 추진-쓰레기 배출수수료 인상으로 재사용봉투 가격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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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논단] 코로나19, 섭리와 역사대한예수교장로회는 1517년 종교개혁을 통하여 개혁된 교회의 반열에서 정리된 신학적 입장에 따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1517년 이전의 역사 속에서 각 공의회인 종교회의에서 확정된 교리를 발판으로 정통교회의 기준으로 삼는다. 정통교회는 성경의 신적 권위, 그 성경에 의한 신지식인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 교리를 터잡아 오늘에 개혁교회가 서 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신지식의 근거는 신적 권위를 가진 특별계시의 기록인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이제 그 성경을 통해서만 신지식과 구원의 도리, 역사의 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그 역사적 상황이란 바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사태이다. 1517년 종교개혁 이전까지의 정통교회와 그 이후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정립된 개혁신학은 세계로 전파되어 확산하였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 등 세계로 확산하였다. 오늘날의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헌법이 미국으로 건너가고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내한하여 동일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공회를 조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결국 한국 장로교회는 이러한 사도시대 이후 정통교회와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에 근거한 성경관, 신지식, 구원에 대한 교리로 형성되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축복은 경제적인 부흥도, 교회 성장의 열매도 아닌 오직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고한 믿음이다. 이 믿음은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신앙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믿음은 최대의 축복이다.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진 사실이 부정되거나 약화될 때 우리의 신앙도 교회도 무너진다. 신지식에 대한 근거인 신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무너지면 성경계시와 그로 인한 신지식에 기초한 교회도 무너진다. 우리들의 신앙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라는 것도 성경의 신적 권위와 삼위일체의 신지식이 무너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주장이 되고 만다. 결국 기도 운동을 전개하려면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을 주지 아니하면 그 기도 운동 역시 인간의 종교심을 발동한 종교적 열심에 불과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이 선행되지 않고는 그 시대 부흥을 선도해 가지 못했다. 인간의 종교적 말초신경을 자극하므로 길흉(吉凶)의 문제를 신에게 뇌물을 바치므로 해결하도록 선동하는 것은 기독교의 참모습은 아니다. 이제 신자들이, 자기반성의 능력과 역사에 대한 해석 능력을 함양시켜줌으로 역동적인 기독교의 참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94)은 “개별 교회들의 입법 권한이 점차 공의회에 의해서 대체되어감에 따라서 주교들은 서로 동맹을 맺어 훨씬 강력한 집행권과 자유 재량권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했다. 또한 “주교들이 서로 공동의 이해관계로 결속하게 되자 그들은 단결된 힘으로 원래의 성직자 및 주민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교권이 발전함에 따라 종전의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평신도와 성직자의 확연한 구별이 나타나게 되었다”라고 보았다. 이 평신도는 “그리스도교 교인 전체를 포함”하였으며, 성직자라는 명칭은 “종교의식을 위해서 특별히 선정된 사람”이라고 했다. 성직자들은 “포상과 처벌”이라는 “가장 유효한 통치 수단을 행사하였다.”라고 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이제 성직자가 평신도로 일컬어지는 교인들을 무지하게 하여 우민정책으로 교권을 행사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교회는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운영의 규범들 전부를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신의 이름으로 무차별적인 협박과 공갈은 그쳐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서 신비적인 믿음의 요소와 그 근거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의 교육정책 중의 하나인 ‘사경회’ 제도가 바로 이를 증명한다.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 고난의 역사와 1950년 6ㆍ25 전쟁으로 인한 환난을 겪었다. 이 전쟁은 3년간 지속되었다. 전쟁이 휴전되는 상황인 1954년 10월에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이끌어 가고 있던 박형룡 박사는 6ㆍ25 전쟁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신학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즉 이러한 불행한 역사를 신자들과 교회에 어떻게 설명하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 견해가 필요했다. 박형룡 박사는 이러한 문제에 답변하기 위하여 “섭리와 역사”라는 논문을 1954년 10월에 <신학지남>에 발표하였다. 그 내용에 첨가한 확장된 논문을 1964년 12월 <신학지남>에 재발표한 후 이를 그의 <교의신학> 제2권 신론 제6장 섭리란에 자리잡게 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이 논문에서 “우리는 역사상의 만사에 하나님의 섭리가 움직임을 믿는 동시에 큰 사변들에 그의 특별섭리가 움직임을 특별히 주목하여 보게 된다”라고 했다. 그는 “성경은 역사상에 하나님의 비상한 행동들을 많이 들어 보이는 동시에 ‘사실들’로부터 미숙하고 경솔한 추측들을 인출(引出)하는 일에 경고를 말한다”라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역사의 단편들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의하여 해석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들의 의미가 직각적으로 우리에게 자명한 것처럼 일의 전후 관계를 전부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설명을 시도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특히 “성경계시의 말씀을 가지고 역사적 사변들을 해석하는 일에도 자주 주관적 이기적인 방면으로 경향하여 오해에 들어가기가 쉬우니 항상 경계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를 쉽게 해석한 사례로 일부 신학자들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의 주로서 우리의 곤란한 운명에서의 우리의 지도자와 구주로 아돌프 히틀러를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 만만하노라”라며 “그(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라는 역사적 사변들처럼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해석을 일제 강점기에 해 왔다. 최선의 방도는 “교회 시대에도 계시 시대에 들린 특별계시의 음성이 성경에 녹음되어 있으니 그 말씀에 대한 참 신앙을 가지고 역사적 사변들의 참뜻을 탐지하기에 노력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결국 “이적, 비상 사변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정해함에는[바르게 이해함에는] 계시의 말씀을 믿는 신앙이 요구된다”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6ㆍ25 전쟁의 참혹한 시대 속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성경 말씀을 통하여 바르게 이해하는 길만이 환난을 극복해 갈 수 있다는 주장의 논문이다. 이러한 논문을 발표한 다음 해인 1955년 10월에 <신학지남>을 통하여 ‘로마가톨릭 이적 설화’에 대한 논문에서 “이적들은 성경 역사상의 특별계시를 확증하기 위하여 주어졌고 그 계시가 끝난 때에 이적도 끝났다고 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일반 교리이다”라며 서론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은 매 시대에 많은 이적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셨다”라고 주장한 사실을 적시하며 그들의 이적 오인과 거짓 이적 치병을 비판하고 있다. 칼빈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장로교회는 특별계시를 위한 이적은 특별계시의 종결과 더불어 중단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피선교지 교회 가운데서 발생한 그 특별 혹 이상한 일들은 대부분이 기도 응답에 따르는 특별 섭리의 결과일 수 있고 그밖에 특별 혹 이상한 일들도 성경 역사상에 있는 이적들과 동등한 무엇은 아닐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종합하면 성경에 기록된 각종 이적들은 특별계시를 위한 수단으로써 이적이며, 특별계시가 66권으로 종결된 후에는 특별계시 수단으로서 이적은 이제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도 응답으로 인한 하나님의 특별 섭리의 결과로 이적과 같은 놀라운 일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러나 이러한 이적을 특별계시의 수단으로 주신 이적과 같은 성격의 이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기도하는 주의 종들에게 이러한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들이 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로 인한 고통은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이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 신자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여야 하는가? 오늘날의 역사 현장에 등장한 이러한 질병에 대한 해석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일 수밖에 없다. 어떤 섭리인가? 그 섭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의 근거가 되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앞을 보지 못한 환자에 대한 해석에서 그 책임에 대한 문제인 “누구의 책임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본인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모든 질병을 본인의 죄에 대한 책임으로 일반화 시켜 적용하여 해석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의 질병은 본인의 죄와 무관하다고 해석할 수도 없다. 이처럼 역사상에 일어난 각종 사변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이때 가장 이해하기 좋은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대로 움직여 간다고 믿는 믿음이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대로 움직여 간다면 현재 내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환난 속에서 신앙적 신비적 요소를 거부하거나 이러한 가운데 감염증으로부터 치유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의 역사적 현장에서 살아간 우리는 기도 응답으로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이 난관을 이겨낼 수 있다. 우리의 본능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은 우리의 한계상황을 극복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 결국 이러한 고난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풀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중요성과 강조점보다 기도하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와 감정만을 내세워 이 고난의 현장을 극복하겠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필자는 이제 이 이야기의 결론을 맺으려 한다. 2022년은 여전히 지난 2년 동안 이어져 왔던 코로나19 사태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쉽게 어느 날 갑자기 이 질병이 정복되었다는 소식을 듣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신비적 신앙의 힘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단순히 지정된 공간인 지정된 예배당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싸울 이유는 없다. 예배당에서도 함께 할 뿐이다. 신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는 우리가 믿은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만 국한되어 나타난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특정 장소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특정 장소의 절대화를 말하지 않는다. 장소적 예배의 구원개념을 가진 유대인들과 이슬람은 특정 장소를 ‘순례’해야 한다. 구원을 장소적 개념으로 본 것이다. 역으로 코로나19 사태는 새로운 영적 부흥을 예고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영적으로 피폐해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비적 영적 이적과 같은 하나님의 특별 섭리를 더 강하게 설명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 본성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 저변에 역동적인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교회가 취해야 할 실천 방안이라 할 수 있다. 소재열 목사(김포기독저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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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감사예배, 신앙의 근본 규범 '성육신 하신 하나님'“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1-2) 이 말씀은 주전 1,500년 전에 기록된 성경 창세기의 말씀이다. 주전 1,500년 전에 기록된 이 말씀은 시간 세계의 시작인 태초에 관한 말씀이다. 태초의 사건이 일어날 때 인간은 없었다. 그런데 이런 태초의 사건을 마치 보고 알고 있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이 기록은 주전 1,500년에 기록되었을 뿐이다. 이런 태초의 사건을 비롯하여 창조의 사건, 창조 이후 인간이 창조되고 그 인간으로 출발한 인류의 시조에 대한 사건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기록으로 후대에 전해졌다. 그 기록에 대한 원본은 없다. 그 원본을 필사한 사본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기록들이 신이 내린 계시임을 누가 확인해 줄 수 있는가? 교회가 이 문서들을 수집하여 특별한 원칙과 기준을 설정하여 신앙의 규범과 지침이 되는 책들을 ‘정경’으로 확정하였다. 정경으로 확정한 것 역시 사본의 문서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한 것이다. 이 정경은 “신의 계시”로 “신적 권위”의 책으로 인간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앙생활의 유일 규범으로 보았다. 이러한 대전제가 무너지면 우리의 신앙은 무너진다. 원본을 필사했다는 사본이 신의 계시라고 판단하여 이를 정경으로 확정한 것도 인간이지만 이러한 과정도 “신의 개입 결과이다”라고 믿었다. 이제 ‘신의 계시’라고 믿는 그 문헌들을 가지고 “신에 대한 지식”을 살피기 시작했다. 단순히 학문적으로, 역사적으로 접근한 사람들이 있었고 반면에 인간의 참된 구원의 계시라는 관점에서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경으로 확정한 성경이 “신의 계시”라고 말한 부류가 있는 반면에서 이는 “신의 계시라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이 문헌들은 “신의 계시”임과 동시에 “신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며, 단어 하나하나까지 영감 되어 기록되었다는 “축자 영감”을 주장하기도 했다. 정경으로 확정된 거룩한 책인 성경을 “신의 계시”로 확신하며 “신적 권위를 가졌다”라고 믿으며 그 거룩한 책인 성경을 통해 신에 대해 이해하고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의 신적 권위를 전제할 때만 신지식은 의미가 있으며, 권위가 있다. 신의 계시로 전제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통해 드러난 신은 유일신이다. 그러나 그 유일신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신지식에 대한 개념을 ‘교리화’하여 정리하여 믿음의 기준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교리였다. 그 교리는 신에 대한 이해를 체계화 한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계시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리적 설명이 필요했다. 이 교리를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믿어야 가능한 교리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육신을 이해하려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해되어야 했다. 이러한 교리는 정경으로 확정한 성경이 이러한 교리의 뿌리이고 원천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신적 권위가 무너지면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도 무너지고 만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의 유일한 신앙 규범은 “성경이 신의 계시”라는 점에서 나오는 “신적 권위”라는 사실이 전제하지 않고는 “성육신 하나님의 삼위일체” 개념은 무너지고 만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역사적으로 모든 공교회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사실을 규범으로 확정하고 있다. 심지어 이 개념을 발전시켜 “성경은 정확 무한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했다. 성경의 신적 계시를 부정하고 그 결과로 삼위일체를 오해한 자 중에 ‘자유주의’자들이 있었다. 그 자유주의자들이 한국의 교회 역사에 등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대한 반대의 최선봉에 선 신학자가 바로 박형룡 박사였다. 박형룡 박사는 1935년에 내놓은 <근대기독교 신학 난제 서평>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유주의’에 대한 신학적 대응의 일종이었다. 일부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이러한 대응은 ‘근본주의’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자유주의자로 지목된 신학자들은 정통교회의 교리주의는 “가장 교묘하게 위장한 ‘이단’”이요, “우상 숭배요”, “정통적 이단”, “실제적인 인본주의”라고 혹평했다. 이러한 혹평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자유주의 계열의 신학자들이었다. 한국장로교회의 가장 큰 유산은 성경이 신적 계시로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믿음이 무너지는 날 한국장로교회도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적 계시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성육신, 즉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우리의 구원이 가능해 진다. 이 구원은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를 신앙의 규범으로 삼았다. 결국 첫째, 성경의 신적 권위,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 셋째, 성육신하신 하나님, 넷째 이신득의 교리가 체계화되어 오늘의 한국장로교회를 지탱하고 있다. 이번 성탄절은 바로 이러한 네 가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우리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을 갖는 것이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하신 성경적 계시를 믿을 때 우리들의 구원이 가능해진다. 이번 성탄 기념 감사예배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의미 있는 예배임이 틀림없다. “신ㆍ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本分)에 대하여 정확무오(正確無誤)한 유일(唯一)의 법칙이다.”(장로회 12신조 중 제1조)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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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어제와 오늘(8) 총회신학교 설립조선신학교가 1940년 4월 19일 개교하여 해방 후 제32회 총회인 남부총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을 받았다. 또한 1948년 6월 3일 남산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여 개교하였다. 조선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하는 학교였으며, 남산 장로회신학교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정체성을 이은 정통보수신학을 근간으로 하는 학교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5회 총회(1949. 4. 19.)에서 장로회신학교가 총회 직영신학교로 허락했다. 이제 총회 내에는 두 개의 신학교가 직영신학교를 승인되어 총회는 부담이 되었다. 이제 두 신학교를 하나로 합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든지, 두 신학교 인준을 포기하고 새로운 직영신학교를 설립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러한 논의는 제36회 총회(총회장 권연호)에서 결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 총회는 1950년 4월 21일 대구제일교회에서 회집되었다. 총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신학교 문제였다. 신학교 문제는 총회의 신학적 입장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도 연계되어 있었다.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 간의 대립으로 인한 신학교 문제는 결코 정치적인 교권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경계하여 보수신학을 지켜내기 위한 장로교회 정체성의 문제였다 . 제36회 총회(1950)에서 신학교 문제가 가장 큰 이슈로 등장하면서 양 신학교 간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대결하였다. 총회에서 결정 되어질 신학교 문제가 워낙 크다 보니 총회 총대권 역시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제36회 총회는 무장 경찰관까지 동원되는 난투극이 벌어져 총회를 계속 진행할 수 없었다. 임원 개선도 하지 못한 총회는 비상 정회를 하고 말았다. 속회 총회는 1950년 9월 1일이었지만, 전쟁으로 인하여 정한 날짜에 속회하지 못하고 다음 해인 1951년 5월 25일에 제36회 총회가 부산중앙교회에서 모였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신학교를 신설하자는 안을 총회에 제출하여 가결하였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는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양 신학교는 합동하고 하나의 총회 직영신학교를 신설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신학교 이사회를 위해 과도이사를 총회에서 선정하되 과도이사는 각 노회 대표 2인과 각 선교회 대표로 한 신학 위원으로 하기로 가결하다(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36회 회의록(1950), 105.) 총회는 신학교 문제 특별위원의 보고를 정식 제안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동 안을 거수 표결에 부친 바 53:3이라는 압도적인 표로 가결하였다(김양선, 「韓國基督敎解放 十年史」, 252, 가결 표수는 총회록에 기록되지 않음). 이렇게 하여 1952년 9월 18일 대구에서 새로운 총회신학교(교장 감부열 목사)를 개교하게 되었다. 새로 신설된 총회신학교의 교수진은 교장 : 감부열(甘富悅, Archibald Campbell) 선교사, 교수 : 박형룡, 한경직, 권세열, 명신홍, 김치선 등이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는 총회의 결정에 불복하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떠나 별도로 총회를 조직하여 장로회 두 번째 분열 교단이 되었다. 그리고 1951년 4년제 신학대학으로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개편하여 한국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신학교를 운영하여 기장 측 교단 신학교가 되었다.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평가가 내려진 총회는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였다. 1952년 제37회 총회는 조선신학교 졸업생에게는 일제 교역자 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한국신학대학 교수 김재준 목사는 목사직을 박탈하고 그의 소속 노회인 경기노회에 제명을 지시하여 이를 선포한다”라는 결정하였다. 그러나 경기노회가 이를 시행하지 않자 제38회 총회(1953. 4.)에서는 총회가 직할로 김재준 목사의 목사직 파면을 처결하였다. 평양신학교가 폐쇄되고 선교사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되고, 보수신학자들은 망명한 후 총회 내에서 활동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근거지인 조선신학교와 그 선봉에 선 김재준 박사를 총회에서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총회는 박형룡 박사 중심의 총회신학교(총신)로 옛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제36회 속회 총회(1951. 5. 25.)는 새로 설립하기로 한 총회신학교를 위해 총회가 이사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과도이사는 각 노회 대표 2인과 각 선교회 대표로 한 신학 위원을 중심으로 신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기로 했다. 아울러 임시 교사로 6ㆍ25 전쟁 상황이었으므로 당시 대구시 대신동 283번지 서문교회에 두기로 했다. 제36회 속회 총회가 파한 5일째인 5월 30일에 개편된 총회신학교 이사회로 회집하여 이사회를 조직하고 이사장에 권영호 목사를 선임하였다. 이사회는 1951년 7월 25일에 제2차 모임을 대구 남산성경학원에서 모여 총회 결의에 따라 신학교를 대구에서 개교하기로 하고 교장에 감부열 선교사(감부열(甘富悅, Archibald Campbell, 1890-1977)가 선임하였다. 조선신학교 측의 반감을 예상하여 박형룡 박사가 아닌 감부열 선교사를 선임하였다(박형룡 박사는 1953. 9.에 교장에 취임하였다). 총회와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1951년 9월 18일(화) 서문교회당 하층에서 개교하였으며, 이때 감부열 목사가 교장에 취임하였다. 총회신학교로 개교하면서 학제는 2년 과정의 고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예과, 3년 과정으로 대학 졸업자, 또한 예과 졸업자로 하는 본과, 3년 과정으로 고등학교 졸업자로 하는 별과로 구분되었다. 1952년에는 1학년에서 3학년까지 총 학생은 495명에 이르렀다. 평양노회가 83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경북노회 57명, 황해노회 50명이었다. 총회신학교는 1952년에 제1회로 본과 84명이 졸업하였으며, 이 졸업생은 1949년 평양신학교(후 평양신학교) 제44회를 이어 제45회 졸업생이 되었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법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