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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40] 다양한 은사들과 교회의 직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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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 40] 다양한 은사들과 교회의 직분들

본문/ 고전 12:27-31,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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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전 12:27-31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12:12-26절 말씀을 통하여 “교회, 한 몸 안의 다양한 지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이며, 그 한 몸 안에서는 다양한 지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으로 한 몸인 교회는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지체들이 한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서로 물고 뜨더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주의에 의한 연합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분쟁이 있다는 것은 하나 된 연합이 아님을 의미할 것입니다. 여럿이 모였지만 하나라는 단일성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12:27-31절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다양한 은사가 교회 어떤 직분을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그리스도 몸의 지체(27)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몸과 지체 비유를 통해 교회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사도는 이러한 대 원칙에 의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회에 적용하고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우리는 몸과 지체를 통해 과연 교회란 무엇이며, 그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위한 직제에 관해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여기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라고 하였을 때 이는 분명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을 지칭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또한 이 말씀은 모든 교회 구성원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본문 27절은 이전 본문인 12-26절 말씀과 오늘 읽어드린 본문 28절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본문인 27절부터는 교회의 다양한 지체들의 직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지체의 각 부분”은 그 교회의 구성원인 각 지체, 즉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나무와 가지 비유를 통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 혹은 우리의 구원에 관해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15:5-6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그 지체들은 몸에서 떠나면 죽습니다. 마치 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만 원 줄기의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그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 죽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지체라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합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몸입니다. 그리스도가 몸의 머리로 다스립니다. 이는 교회의 통치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통치권을 내가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통치권을 가지려고 할 때 교회의 하나 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분열될 것입니다.


2. 세 직분에 따른 다양한 은사(28)


본문 28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바울은 교회를 위해 각자의 은사에 따라 직분을 세우셨습니다. 그 직분은 상호 의존성, 다양성 속의 하나됨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신 직분자는 사도, 선지자, 교사입니다. 아들은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사도들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세워진 교회를 돌보는 상주하는 지도자는 선지자와 교사였습니다.


이러한 교회 직분 외에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은사를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적을 행하는 능력, 병고치는 은사, 돕는 일, 다스리는 일, 각종 방언하는 자 등입니다. 


1) 사도


사도란 헬라어 ‘아포스톨루스’은 ‘아포스텔로’(’보내다’)에서 온 말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직분을 맡으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이 사도는 4가지 특징으로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갈 1:15), 둘째, 교회에서 구별하여 따로 세웠고(행 13:1), 셋째, 전체 교회가 그를 사도로 인정하고(갈 2:7), 넷째, 사도의 표로 사도직이 확고하게 증명되었습니다(고후 12:12).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은 사도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도들에 의해 성경 신약 성경이 완성되었습니다.


2) 선지자


선지자.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페타스’(’대변자’, ‘대리자’)는 사람들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대변자를 가리킵니다.


3) 교사


사도나 목사가 아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효과적으로 가르쳐서 교인들을 온전히 세우는 사람들이다(고전 14:30, 엡 3:5). 로마서 12:7절에서도 “가르치는 자”을 말합니다. 교사의 사역은 특정 지역에 상주하고 있는 자로서 해당 지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자들입니다. 아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 필사본이 없는 관계로 성경을 바르게 가르칠 교사의 사명은 컸습니다.


4) 능력을 행하는 자


여기서 쓰인 뒤나미스(δύναμις)는 능력, 세력, 기적을 가리키는데 잘 사용되어지는 용어 중 하나입니다. 이 은사는 고린도교회에서 자주 일어났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적들의 존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결과이고 그리스도 안에 고유한 것이 되어집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이 주의 복음을 전할 때 이러한 기적의 능력 행함들이 나타났습니다. 박윤선박사는 ‘능력 행함’을 어려운 일을 감당하게 하는 것, 혹은 비상한 고난을 겪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어떤 힘이라고 말합니다.


5) 병고치는 은사


신약 시대에 병고치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개핀(Gaffin)이란 신학자는 예언과 방언의 문제와 달리 신유은사는 교회에 대한 계시문제와 하나님의 말씀의 기원문제와 관계가 없으므로 그 문제의 성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유와 신유은사를 받았을지라도 그 정도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시대와 사도시대와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병고침의 은사도 주님의 주권과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특히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병을 고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장함이 마땅합니다(약5:14-15). 이는 현실에서 목격되는 신유의 사실들이 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수 있기 때문입니다(엡3:20). 그러나 이러한 신유의 은사들은 한 번 받아 사람이 소유하며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의 주권적 뜻과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5) 돕는 일


독는일은 헬라어 ‘안틸렘프세이스’은 ‘손을 거들어서 도움’의 의미가 있다.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종류의 도움을 가리킵니다. 교회 안에서 혹은 구성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외적인 필요를 체워주는 봉사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다스리는 일

 

다스리다는 의미의 헬라어 ‘퀴베르네세이스’은 ‘선장’이라는 의미입니다(행 27:11, 계 18:17). 즉 배를 조종해 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본문 에서는 권위를 가지고 회중을 인도하는 자, 곧 치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이러한 은사는 다스리는 교회의 감독들이나 장로들에게 요구된 은사라 할 수 있습니다(딤전 5:17).


7) 각종 방언하는 자


여기서 말한 방언이 일반적인 외국어를 가리키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방언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여기 방언이란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이해할 수 없는 무아경의 언어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의 증거는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실제 언어를 가리킨다는 견해로 대립되어 왔습니다.


박윤선박사는 오늘날의 방언들은 사도들의 역사에 나타났단 방언과 같은 수준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당시 계시의 방편으로 주어진 방언과 계시가 완성된 이후에 주어진 오늘날의 방언과는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현대의 방언을 주장하는 교회에는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교들도 방언을 한다는 점입니다.


3.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29-31)


첫째, 다양한 은사들과 그 기능(29-30)


본문 29절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절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라고 합니다.


은사에 따라 감당해야 할 직무와 사명은 디양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동일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따라 각양 은사를 주셨습니다. 동일한 은혜에 다양한 은사입니다. 모두가 다 같은 은사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자들에게는 사도의 직무를 주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사도일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다 예언자, 교사 기적을 행하는 자일 수 없습니다. 또한 모두가 병 고치는 능력, 방언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은사와 직분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원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른사람의 은사와 직분에 대해 부러워하거나 시기, 질투할 이유는 없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은 최선의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에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에 삶의 힘이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 하지만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31)


본문 31절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라고 합니다. 여시 ‘큰 은사’란 단수가 아니라 복수 명사입니다. 그러나 ‘가장 튀어난 길’은 단수입니다. 이렇게 볼 때 ‘더욱 큰 은사’와 ‘가장 뛰어난 길’을 동일한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더욱 큰 은사’는 ‘가장 뛰어난 길’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간절히 사모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입니다. 그 은사에 대한 사모함은 사명에 대한 거룩한 열정입니다. 그러한 은사에 대한 열정 가운데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한 “더욱 큰 인사”란 고린도전서 13장, 14장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것은 방언의 은사보다 예언의 은사를 더욱 사모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은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신 것들이므로 근본적으로 모두 소중하고 귀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겉모양에 빠져 외적으로 드러난 화려한 것들만을 소중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다양한 은사들은 모두 교회에 유익한 것들입니다. 차등적 서열을 매겨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인들이 외형적인 은사인 방언을 화려한 은사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은사보다 더 높은 은사인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은사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삶의 현장에서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더 좋은 길은 사랑임을 이제 13장에서 말씀합니다.


4. 교훈과 적용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우월해 보이는 외형적인 은사를 갖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들이 은사의 등급을 매기는 기준은 은사가 교회에 미치는 유익의 정도에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겉으로 보기에 얼마나 매력적이고 대중적인 것이냐가 판단 기준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기준에서 탈피하여 교회 유익을 끼친 기준에서 은사를 사모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제일 좋은 길’인 사랑을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지체입니다. 그 지체들은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교회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 구성원은 교회의 지체로 성령으로부터 오는 각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 은사에 대해 등급을 매겨 차서를 정하면 안 됩니다. 받은 바 사명, 직분, 은사 등을 소중히 여겨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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