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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29] 강권적 복음선포와 그 접촉점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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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 29] 강권적 복음선포와 그 접촉점 이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


제목을 입력해주세요_-001 (37).jpg



본문 / 고전 9:16-27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9:1-15절 말씀을 통해 “당연히 받을 권리와 이를 포기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는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자신의 권리를 사랑을 위해 포기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사도권을 이야기합니다. 강한 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는 자유인이며, 모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사도이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효과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 그러한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비난한 자들은 이를 공격의 빌미로 이용했습니다. 무엇인가 약점이 있기 때문에 사도로서 누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 자랑이 돈 때문에, 생계비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증거하고 선포한 십자가 복음이 헛된 데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런 이유로 적어도 다른 사도는 몰라도 바울만큼은 이러한 정신으로 사역을 감당ㅤㅎㅔㅆ습니다.


이번에는 본문 9:16-27절 말씀을 통하여 “강권적 복음 선포와 그 접촉점 이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복음 선포는 강권적으로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 복음 선포를 유대인에게, 이방인에게 어떻게 복음을 선포했는지를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복음 전도


1. 바울의 복음 전도 사명의 태도와 자세(16-18)


첫째, 복음 전도는 부득불, 마땅히 감당해야 사명입니다(16).


본문 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는 그 복음 증거의 사명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자랑할 것이 없음”에서 ‘자랑’이란 헬라어 단어는 ‘카우케마’입니다. 이 단어는 어떤 일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여 즐거워하는 감정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어떤 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여 보람을 느끼는 것을 ‘자랑’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복음 전도란 자신의 보람이나 자아실현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부르심을 받아 부득불 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성령에 사로잡혀 사명을 감당하므로 여기에 어떤 보람을 느끼면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복음 증거는 부득불 마땅히,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사명인 복음을 증거하지 아니하면 자신에게 화가 닥칠 것이라고 합니다. 곧 파멸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을 때 아주 극적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선 유대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이때의 부르심은 사도 바울에게 임한 주님의 강권적인 역사였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신에게 화가 임할 것은 선언합니다. 그만큼 복음 전도는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이래서 이 복음 전도를 부득불 할 일이라고 합니다.


둘째, 바울은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라고 합니다(17).


본문 17절에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라고 합니다. 바울이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이 사명을 감당한다면 그 일에 대한 ‘보수’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 전도 일을 스스로 택한 노동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감당하는 사명이었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바울을 선택하여 사명자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의 의지로 복음을 전파한다면 그것은 자랑할 만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이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상을 얻으려니와”에서 ‘상’이란 헬라어 단어 ‘미스도스’입니다. 이 단어는 ‘보상’, 품삯, 임금, 보상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자의 사명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사명자가 되었으니 이 복음 전도 사명은 보상을 받거나 품삯을 받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랑거리가 될 수 없고 보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나는 청지기 직을 부여받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청지기는 노예 계급에 속한 자입니다. 노예들은 보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인의 재산일 뿐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자신은 이러한 노예적인 청지기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셋째, 바울은 사도권의 권리를 쓰지 않고 값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18).


본문 18절에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이런 상황에서 복음 선포를 통하여 얻기를 기대하는 ‘보수’란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는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공짜로,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값없이 복음을 전한다고 했을 때 ‘값없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다파논’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대가로 아무런 경제적인 부담을 지우지 아니한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사도로서 마땅히 생계비를 지원받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사도직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사명을 감당하는 것 자체가 자랑이며 보상으로 여겼습니다.


접촉점


2.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한 바울의 선교 전략(19-23).


첫째, 바울은 자유를 포기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29).


본문 19절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인간을 구속하는 그 어떤 세력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그 주권의 영역으로 전환되었고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외에 모든 것들의 가치는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제 세상 가치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세상 가치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속박받지 않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자유자였으나 본문에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많은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들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섬기는 종이고, 모두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사도에게 주어진 생계비를 지원받을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고 모두에게 아무런 ‘보수’도 요구하지 않고 섬겼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 바울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되었다(20).


본문 20절에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라고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전도의 열매를 얻기 위해 유대인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바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그들처럼 되었습니다.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얻는다는 말은 전도의 열매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 율법 아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은혜 아래 있는 자였습니다. 사도는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해방받은 자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게 하기 위해 유대인 같이 율법을 지켰습니다. 이때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셋째,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을 얻기 위해 율법 없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21). 


본문 21절에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라고 합니다.


20절에서는 유대인 같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21절에서는 이방인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유대인 같이 되었습니다. 이제 21절에서는 이방인을 위해 유대인이면서도 모세 율법으로부터 오는 그의 습관 등을 벗어던지고 무법한 이방인 같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무법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는 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율법 없는 이방인에게 전도하여 그들을 얻기 위해 이방인들과 같이 행동했습니다.


넷째, 바울은 “약한 자들”을 위해 “약한 자”가 되었습니다(22).


본문 22절에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또한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그들과 함께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바울은 스스로 “약한 자”가 아니면서 “약한 자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하여 그들을 얻기 위해 “약한 자 같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 전서 8장에서 언급한 “강한 자들”에게 그들의 자유를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강한 자들”에게 “강한 자 같이 되었다”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바울의 종합적인 복음 선포의 대원칙을 말합니다(23).


본문 23절에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 선포를 위해 지금까지 언급한 것처럼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은 그 축복에 함께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는 어떤 형편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여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강한 자들에 경고


3. 강한 자들에 대한 경고와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24-27)


첫째, 바울은 “강한 자들”에게 경고합니다(24-25).


본문 24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라고 합니다.


경기장에서 여러 선수가 다 함께 달립니다. 하지만 우승자는 한 사람뿐입니다. 바울은 그 우승자가 되도록 달음질하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소위 “강한 자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강한 자들에게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 있으므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본문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라고 합니다. 경기에서 우승자가 되려고 경쟁하는 선수마다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그러한 노력을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경주합니다.


둘째, 바울은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속에 있습니다(26-27).


본문 26절에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사도는 ‘그러므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야기에 대한 어떤 결론적인 이야기를 할 때 ‘그러므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는 사람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허공을 치는 권투 선수처럼 싸우지 않습니다. 향방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이어서 본문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자신이 남에게 전도한 후에 오히려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교훈과 적용


복음은 삼위일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삼위일체론적으로 설명하지 아니하면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말할 때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역사하여 복음을 청종하게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게 합니다. 성령께서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게 합니다. 이신칭의 교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게 되는 교리는 성령께서 역사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삼위 하나님 중심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유대주의자였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것을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구원받은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이 복음 선포를 자랑할 수 없는 것은 그 일은 자기 일이 아닌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부득불 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이러한 복음 전도에 대해 유대인에게, 이방인에게 복음을 지혜롭게 전하는 선교 전략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이제 복음 안에서 교만하면 안 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 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겸손하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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