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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28] 당연히 받을 권리와 이를 포기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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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 28] 당연히 받을 권리와 이를 포기한 사랑

생계비 지원을 받을 권리를 포기한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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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전 9:1-15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8:1-13절 말씀을 통해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말씀을 통해 자유와 사랑의 올바른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만한 지식이 아닌 덕을 세우는 사랑을 언급했습니다.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가 뭐가 문제가 있느냐는 사람들이 한가지 놓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약한 자들을 배려하지 않는 지식의 교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임을 말씀합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형제에 대한 사랑에 의해 제한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에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는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은 고린도 전서 9:1-15절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자유의 권리와 사랑에 대해 자신의 모범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권

 

1.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한 바울(1-2)


본문 1절에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사도가 강한 자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약한 자들을 위해 사랑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도는 이러한 원리에 의해 자신이 어떻게 사역해 왔는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사도였으므로 사도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은 분명했습니다. 바울은 강한 자에 해당한 자유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통해 사도라는 사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그의 사도권은 적어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는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본문 2절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도가 아닐지라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사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사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증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왜 이런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까? 강한 자의 자유와 사랑에 대한 원리를 자신의 사역을 통해 설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바울은 사도로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아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위해, 그리고 효과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 이 권리와 자유를 자발적으로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선지자들은 이러한 바울의 생계비 포기를 사도직 결함의 증거로 왜곡 해석하여 여론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진정한 사도가 아니어서 교회에 생계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바울의 복음 선포를 무력화시키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는 1절부터 분명히 자신이 사도임을 밝히므로 시작합니다. 자신도 사도로서 생계비를 받아 생활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를 포기한 것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결함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스스로 이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9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생계비

 

2. 사도로서 생계비를 지원받을 권리를 증명한 바울 (3-15)


3절에서는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4절에서부터 구체적으로 변증합니다.


1) 사도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있습니다(4).

본문 4절에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라고 합니다. 모든 사도는 교회의 지원으로 생계를 유지할 권리를 가졌습니다.

 

2) 부양할 가족을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습니다(5).

5절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 된 아내를 동반하고 아내까지 지원하는 데 바울과 바나바도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3) 바울과 바나바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있습니다(6).

6절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라고 반문합니다. 자신과 바나바도 아내와 동반하며 함께 생계비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4) 사도가 마땅히 교회로부터 부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7).

본문 7절에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도가 마땅히 교회로부터 부양되어야 함을 군인, 포도원 농부, 양치기를 통해 언급합니다.


5) 사람의 견지에서 율법도 같은 원리를 가르칩니다(8).

8절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합니다. 


6)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습니다(9).

신 25:4절에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율법도 남의 밭에서 일하는 일꾼도 그가 거둬들인 곡식 일부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7) 하나님께서 사랑을 위해 말씀하신 것입니다(10).

10절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25:4절은 일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는 말씀이 됩니다.


8) 영적인 씨앗을 뿌린 우리가 물질적인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11).

본문 11절에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라고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제 밭에서 일하는 일꾼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에게 적용합니다. 자신의 사역을 영적인 씨 뿌리므로 설명합니다. 영적인 씨를 뿌린 자들에게 육신적인 재물로 부양하는 것은 전혀 지나치지 않습니다.


9) 고린도 교회가 다른 사람을 지원했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권리가 있습니다(12).

12절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와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고린도 교회로부터 받을 권리가 있다면 바울 자신도 이러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를 포기하고 생계비를 지원받지 않는 것은 복음에 아무런 장래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0)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성전에서 주는 것으로 살아갑니다(13).

13절에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


복음 선포자(사역자)가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을 권리를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성전에서 나온 것으로 살아가는 권리로 설명합니다.


11)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그 일을 통해 먹고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14).

본문 14절에 “이처럼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누가복음 10:7절과 마태복음 10:10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통해 먹고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12) 생계비를 달라는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15).

본문 15절에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동안 사도로서 이처럼 부양받을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합니다. 바울의 의지를 보십시오.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러한 결연한 의지는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 자랑이 돈 때문에, 생계비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증거하고 선포한 십자가 복음이 헛된 데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런 이유로 적어도 다른 사도는 몰라도 바울만큼은 이러한 정신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헌신적인 사명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의 모습은 다른 사도들과는 다른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다른 사도들과 가치의 차서를 정하여 누가 더 훌륭한 사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다양합니다. 모두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다른 사도들과 같이 생계비를 지원받아 사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러한 지원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자비량 선교사역을 이어갔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지원을 받은 사도들은 가짜가 되고 지원을 받지 않는 자들이 진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처럼 쓰임을 받는 자들이 있고 다른 사도들처럼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도들 모두가 사도의 정체성에 충실했느냐가 관건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러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복음은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오직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께 구원받는다는 유대 사상과는 달랐습니다. 이런 신학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고 전하는 일은 때로는 목숨을 내놓고 전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을 통한 복음 전도사역은 오늘의 교회를 있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형태로 부르셨는지를 묵상하고 그 부르심에 충실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르심과 비교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오늘 나를 통해 복음 증거를 위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한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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