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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어제와 오늘(8) 총회신학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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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어제와 오늘(8) 총회신학교 설립

총회신학교 1952년 제1회 졸업생은 평신 45회 졸업생이 된다.


[꾸미기]총회신학교 제1회 졸업 1952년.jpg
대구 총회신학교 개교(1951. 11. 23.) 총회신학교 개교는 1951년 9월 18일이었다. 그러나 기념 사진은 11월 22일이다. 이날은 교사를 안두화 목사 사택에서 대구 서문교회장으로 이전하여 개교 개념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위의 사진은 1951. 11. 22.자 사진이다.

 

조선신학교가 1940419일 개교하여 해방 후 제32회 총회인 남부총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을 받았다. 또한 194863일 남산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여 개교하였다. 조선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하는 학교였으며, 남산 장로회신학교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정체성을 이은 정통보수신학을 근간으로 하는 학교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5회 총회(1949. 4. 19.)에서 장로회신학교가 총회 직영신학교로 허락했다. 이제 총회 내에는 두 개의 신학교가 직영신학교를 승인되어 총회는 부담이 되었다. 이제 두 신학교를 하나로 합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든지, 두 신학교 인준을 포기하고 새로운 직영신학교를 설립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러한 논의는 제36회 총회(총회장 권연호)에서 결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 총회는 1950421일 대구제일교회에서 회집되었다. 총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신학교 문제였다. 신학교 문제는 총회의 신학적 입장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도 연계되어 있었다.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 간의 대립으로 인한 신학교 문제는 결코 정치적인 교권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경계하여 보수신학을 지켜내기 위한 장로교회 정체성의 문제였다

.

36회 총회(1950)에서 신학교 문제가 가장 큰 이슈로 등장하면서 양 신학교 간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대결하였다. 총회에서 결정 되어질 신학교 문제가 워낙 크다 보니 총회 총대권 역시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36회 총회는 무장 경찰관까지 동원되는 난투극이 벌어져 총회를 계속 진행할 수 없었다. 임원 개선도 하지 못한 총회는 비상 정회를 하고 말았다. 속회 총회는 195091일이었지만, 전쟁으로 인하여 정한 날짜에 속회하지 못하고 다음 해인 1951525일에 제36회 총회가 부산중앙교회에서 모였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신학교를 신설하자는 안을 총회에 제출하여 가결하였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는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양 신학교는 합동하고 하나의 총회 직영신학교를 신설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신학교 이사회를 위해 과도이사를 총회에서 선정하되 과도이사는 각 노회 대표 2인과 각 선교회 대표로 한 신학 위원으로 하기로 가결하다(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36회 회의록(1950), 105.)

 

총회는 신학교 문제 특별위원의 보고를 정식 제안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동 안을 거수 표결에 부친 바 53:3이라는 압도적인 표로 가결하였다(김양선, 韓國基督敎解放 十年史, 252, 가결 표수는 총회록에 기록되지 않음). 이렇게 하여 1952918일 대구에서 새로운 총회신학교(교장 감부열 목사)를 개교하게 되었다. 새로 신설된 총회신학교의 교수진은 교장 : 감부열(甘富悅, Archibald Campbell) 선교사, 교수 : 박형룡, 한경직, 권세열, 명신홍, 김치선 등이었다.


총회신학교 제1회 졸업 1952.jpg
총회신학교 제1회 졸업식(1952. 4. 29.)

 

그러나 조선신학교는 총회의 결정에 불복하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떠나 별도로 총회를 조직하여 장로회 두 번째 분열 교단이 되었다. 그리고 19514년제 신학대학으로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개편하여 한국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신학교를 운영하여 기장 측 교단 신학교가 되었다.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평가가 내려진 총회는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였다. 1952년 제37회 총회는 조선신학교 졸업생에게는 일제 교역자 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한국신학대학 교수 김재준 목사는 목사직을 박탈하고 그의 소속 노회인 경기노회에 제명을 지시하여 이를 선포한다라는 결정하였다. 그러나 경기노회가 이를 시행하지 않자 제38회 총회(1953. 4.)에서는 총회가 직할로 김재준 목사의 목사직 파면을 처결하였다.

 

평양신학교가 폐쇄되고 선교사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되고, 보수신학자들은 망명한 후 총회 내에서 활동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근거지인 조선신학교와 그 선봉에 선 김재준 박사를 총회에서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총회는 박형룡 박사 중심의 총회신학교(총신)로 옛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총신 1회 교장 1대 감부열 2대 박형룡.jpg
총회신학교 제1대 교장 감부열 선교사, 제2대 교장 박형룡 박사

 

36회 속회 총회(1951. 5. 25.)는 새로 설립하기로 한 총회신학교를 위해 총회가 이사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과도이사는 각 노회 대표 2인과 각 선교회 대표로 한 신학 위원을 중심으로 신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기로 했다.

 

아울러 임시 교사로 625 전쟁 상황이었으므로 당시 대구시 대신동 283번지 서문교회에 두기로 했다. 36회 속회 총회가 파한 5일째인 530일에 개편된 총회신학교 이사회로 회집하여 이사회를 조직하고 이사장에 권영호 목사를 선임하였다.

 

이사회는 1951725일에 제2차 모임을 대구 남산성경학원에서 모여 총회 결의에 따라 신학교를 대구에서 개교하기로 하고 교장에 감부열 선교사(감부열(甘富悅, Archibald Campbell, 1890-1977)가 선임하였다. 조선신학교 측의 반감을 예상하여 박형룡 박사가 아닌 감부열 선교사를 선임하였다(박형룡 박사는 1953. 9.에 교장에 취임하였다). 총회와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1951918() 서문교회당 하층에서 개교하였으며, 이때 감부열 목사가 교장에 취임하였다.

 

총회신학교로 개교하면서 학제는 2년 과정의 고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예과, 3년 과정으로 대학 졸업자, 또한 예과 졸업자로 하는 본과, 3년 과정으로 고등학교 졸업자로 하는 별과로 구분되었다. 1952년에는 1학년에서 3학년까지 총 학생은 495명에 이르렀다. 평양노회가 83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경북노회 57, 황해노회 50명이었다.

  

총회신학교는 1952년에 제1회로 본과 84명이 졸업하였으며, 이 졸업생은 1949년 평양신학교(후 평양신학교) 44회를 이어 제45회 졸업생이 되었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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