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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으로만 존재한 소래교회, 맥켄지 선교사의 죽음

기사입력 2021.02.17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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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고본부는 한국선교를 위해 알렌과 언도우드를 파송했다. 알렌 의료선교사는 1884920일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지금으로부터 127년 전의 일이다. 이듬해인 188545일에 목회(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입국했다.

     

    최초로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는데 선교사의 입국 이전인 1883년에 이미 황해도 송천에 소래교회가 세워졌다. 송천(松川)이라는 한자 지명은 솔내로 불려졌다. 이 솔내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솔내소래라고도 불려졌다.

     

    선교사들에 의지하지 않고 전도를 받은 한국인이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고 교회를 설립하게 되는 특징을 갖고 있는 교회가 황해도 소래교회이다. 소래교회는 한국의 최초의 교회이지만 역사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과거의 화려한 영광으로만 남아 있을 뿐 현존하지 않는 교회이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안에 소래교회를 복원하여세우기도 했다.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는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의 조선선교 지원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서 좌절하지 않고 18942월 개인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한 받은 맥켄지 선교사는 189310월에 입국하여 서울에서 몇 달을 지낸 뒤 황해도 솔내(松川)로 가서,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솔내에 정착하여 헌신적으로 선교했다.

     

    그는 내한하지 5년 만인 1898년 맥켄지의 죽음으로 인해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에서 그리어슨(R. Grieson)를 비롯한 3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그의 사역을 계승했다.

     

    다음은 글은 마더 헌트리(Martha Huntley) 한국 개신교 초기의 선교와 교회 성장(A History of the Protestant Mission in Korea) 차종순 역, (목양사, 1985) 책에 수록된 내용을 옮겨본다.

     

    맥켄지는 한국식 집, 의복,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다. 크리스마스 때에 언더우드는 집에서 만든 빵과 건포도 빵, 통조림, 과일, 야채, , 우유, 설탕 등을 한 상자 선물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내다 버리면서 내가 만일 이것들의 맛을 보면 다시는 한국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될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동시에 사소한 의료 활동과 하찮은 일도 감당했다. 18952월에는 10명의 어린이를 상대로 주간 학교를 개설했다.

     

    이때 쯤 해서 소래에는 26명의 세례교인과 다수의 학습교인이 있었다. 이 교인들은 부락 가까이 있는 낡아빠져 반쯤 허물어진 제각을 구입해서 교회를 세웠다. 교인들은 건물 건축 자재 비용으로 160달라를 내고 노동력은 스스로 제공했다. 이 교회가 제물포 교회에 이어 한국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2번째 교회이고 장로교 교회로서는 최초이며, 순수 한국인들이 자금을 내서 지은 첫 번째 교회였다.

     

    언더우드 부인 릴리아스는 이렇게 교회를 말하고 있다.

     

    교회 건물은 우람하거나 문턱이 높은 것도 아니다. 그곳 형편에 맞는 최선의 장소인 듯하다. 가난한 교인들은 자신들이 구할 수 있는 최선의 목재, 석재, 지붕기와를 사용했으며, 여기에다 자신들의 손으로 손수 노동력을 제공하고 불 붙는 기도를 곁들였다. 건물이 완공되었어도 빚은 하나도 없었고, 하나님은 이 교회를 축복하사 신실하고 진지한 교인들이 차고 넘치게 가득 채워 주셨다.”

     

    그의 생애 마지막 쯤 가서 쓴 편지를 보면, 자신은 소래에서 지내는 8개월 동안 영어 한 마디 쓰지 않고, 백인의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지냈다고 했다.

     

    61일에 옥수수를 심고 65일에 친구인 존스(George Heber Jones)에게 편지하기를, “교회는 기와지붕을 얹었다. 석가래와 기둥은 보통 이상의 놀라운 솜씨로 잘 다듬어져 있었다. 완전한 아름다움을 다 갖추었다. 마귀가 수세기 동안 존경을 받았던 숲속 마을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8일 동안의 품삯은 전혀 받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일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건축일이 교인들의 일임을 주지시켜 주었다. 이들은 미국인들보다도, 카나다인들보다도 훨씬 더 훌륭히 해냈다. 여인네들도 교회 안에서 잠잠하지 않았다. 감리교인들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본다.”

     

    그의 다음 편지는 언더우드에게 성전 봉헌식에 참석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더우드가 출발 채비를 차리기도 전에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 언더우드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떨리는 손으로 쓴 애처로은 편지로 한자 한자가 자신의 고통스런 마음을 나타내며 이미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음을 말해 주었다.”

     

    맥켄지의 마지막 일기는 622일에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은 사람들을 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몸이 너무나도 쇠약해진 것 같다.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내가 한국인들과 같은 생활방식으로 살다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뜨거운 햇볕을 받으면서 여행도 감행했고, 밤늦게 차가운 이슬을 맞으면서까지 밖에서 이야기한 것 등이 나의 실수였다.”

     

    다음 날, 이날은 주일이었는데, 그는 서장로와 그 외 몇 사람을 불렀다. 곧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하고서 자신이 한국에 온 지 채 2년도 되지 못했지만, 요한복음 12:24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라는 말씀에 따라 살았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 후에,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이 죽고 나면, 옷과 돈을 거두어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자신을 교회 옆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고 말하면서 한국인들은 다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라고 했다. 맥켄지는 권총을 꺼내 머리에 대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소래에 있는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존스(G.H.Jones)는 아펜셀러에게 이렇게 썼다.

     

    큰 충격을 받았읍니다. 비통한 마음이 듭니다. 맥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어떻게 생각을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도 훌륭한 사람이! 그런 최후를 맞이하다니! 혼자서, 아프다가, 머리가 돌아, 자살하다니! 오 하나님, 이해 못할 기이한 사실입니다.”

     

    언더우드 부인도 맥켄지와 같이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누군가가 자신에게 몇 마디 경고문을 적어 보내지 않나 하고 늘 눈치를 살폈다.

     

    이 세상에는 세례 요한 부류에 속한 사람들과 같이 열심과 정열에 불타 자신의 몸을 돌볼 줄 모르고 일에만 전념하려드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생명력이 약해지면서 지력 또한 쇠약해 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성숙한 우리의 신체는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외국인의 조리방식에 따른 조잡한 식사를 받아들이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렇게 되면 병에 대한 저항력도 약해지는데, 그런 상태에서 몸을 여전히 혹사시키면 중노동을 감당치 못하고 쓰러질 것이 뻔한 일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 둘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필요한 인력을 상실하게 된다.”

     

    언더우드와 웰즈는 맥켄지의 발병 소식을 듣는 즉시로 소래를 향해 떠났으나 곧바로 죽음을 알리는 소식이 뒤따라 당도했다. 그들은 한국인들이 이미, “서구식 장례 절차를 따라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서 찬송과 기도로 장례를 정중하게 마친뒤에 현지에 당도했다. 그리고 매장도 맥켄지가 원하는대로 끝마쳤음을 알았다.

     

    언더우드와 웰즈는 헌당식 기간 동안 오랜 시간을 그곳에 머물렀는데, 그 동안에 남19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100여 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소래에 있는 한국인 신자들은 카나다 장로교에 또 다른 선교사를 보내 줄 것을 청원했다. 그리고 맥켄지가 남긴 2천 달라는 한국에서 카나다 선교회가 발족하는 데 기반을 다지는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소래, 제물포, 의주 등지에는 당시에 희망이 보일만큼 상당수의 교인들이 모였는데도, 일찍이 기대하지 않았던 평양이 한국 기독교의 중심으로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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