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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연재 1] 언더우드 선교사 지원 편지

기사입력 2021.02.0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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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더우드 선교 요청 편지(출처 : 박형우 편역, 언더두드 내한 관련 자료집)


     

     (김포기독저널) 언더우드는 188545일 부활주일 아침에 인천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내한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어떻게 하여 한국에 내한하였는가? 그의 선교사 지원 편지 속에서 그의 신앙고백과 선교에 대한 의지가 담겨있다.

     

    그는 1884710일에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프랭크 F.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이다. ; “저는 뉴브란즈윅신학교에서 신학 과정을 방금 마쳤으며, 미국 개혁교회의 뉴저지 주 버겐노회에서 강도사 자격을 받았습니다.”

     

    언더우드가 북장로회 해외선교 본부에 선교사 지원 편지를 보냈을 때에는 아직 목사안수를 받지 않는 강도사 신분이었다. 장로회 체제에서 노회의 천거에 의해 관련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다음에 강도사 자격(인허)을 받아 목사되기 전의 강도사 신분을 얻게 된다.

     

    미국 장로회의 신학적 토대가 되었던 대요리문답에서는 교회에서 공적인 설교자로 인정을 받기 위해 소속 노회와 총회에서 공인을 받아야 한다.

     

    대요리문답(The Larger Catechism), 158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 강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충분한 은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공인되어 이 직분에 부름을 받은 자만이 강도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같은 규정은 당시 미국 장로회에서도 일관되게 적용되는 규정이었다. 강도(講道)라는 말은 말씀을 전하는 설교의 또 다른 별칭으로 강도권을 부여받아야 교단소속 목사가 되어 공적인 교회 설교자로 목회할 수 있다. 강도권은 강도사 인허를 받아 목사안수로 완성된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강도사 자격을 얻어 인허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 목사안수를 받고 해외 선교사로 지원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선교사 지원서에서 밝힌 선교 동기로 신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저는 이교도 지역에서 사역할 필요성이 막대함에도 아직도 그런 일꾼들이 턱없이 부족함에 주목했고, 기도를 통해심사숙고한 끝에 제 일생을 해외선교 사역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조선에 복음의 빛을 모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정하신 때가 차매 해외에서 이 땅을 방문할 전도자를 준비하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준비하신 결과 언더우드로 하여금 신앙을 고백하게 하시고 해외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만일 내가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으로 보아 선교를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이러한 선교의 결심은 없을 것이다.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이러한 뜨거운 사랑이 해외선교를 결심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신학교 졸업당시의 언더우드 목사.jpg 

    ▲ 언더우드 선교사의 신학교 졸업당시 사진

     

     언더우드는 이러한 선교를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로 몇 개원 전에 한국인들 중에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이수정의 진지한 호소를 읽기 전까지 어느 선교지로 가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여기서 언급된 이수정(李樹庭, 1842-1886)은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민비를 충주로 피신시킨 공로로 18829월에 김홍집 일행 사절에 동행한 민영익의 개인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 농업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당시 일본 농업계의 대표적 인물인 쓰다를 찾아갔다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역성경> 을 가지고 <마르코의 복음서>를 번역해 1885년 초에 간행했다. 1885년 장로교에서 언더우드 목사 등을 조선에 파견하자, 언더우드에게 한국말을 가르쳤으며 언더우드는 그의 번역서 <마르코의 복음서>를 얻어 가지고 한국에 부임했다. 1886년 정부의 유학생 소환령에 따라 귀국했다가 도착 즉시 처형되었다.

     

    일본에서 개종하고 이수정은 1883년 말 미국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는 1884년 헤론 의사와 언더우드 목사를 한국의 첫 선교사들로 임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843Missionary Review에 발표되었으며, 일반 기독교 주간지인 The Illustrated Christian Week 1월호에 실렸다. 이는 미국성서교회 요코하마의 루미스 총무가 이 사실을 일반 미국교회에 더 알리기 위해서 먼저 이 잡지에 이수정의 편지를 마게도니아인의 부름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다.

     

    언더우드는 이수정의 호소의 글을 통해 저의 심장은 이 호소에 의해 꿈틀거렸다고 고백하며 어떤 결과가 이루어질지 조마조마하며 주시해 왔다고 했다. 그러나 여러 경로를 통해서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하나님의 손길이 내가 한국으로 들어가지 말도록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고민 끝에 저는 하루하루, 그리고 매 주일 주님께서 주신 일을 하다 보면, 제 차례가 올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회는 한국에 파송할 첫 선교사로 1884428일 의사 해론을 임명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는 그는 몇 주 전에 저는 장로회 선교본부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개설할 예정이며, 이미 의료선교사는 임명했고, 그와 함께 파송할 안수 받은 목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 사안에 대해 며칠 동안 기도와 심사숙고한 끝에 귀 선교부에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을 위해 저를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심하였고, 이에 지원하는 바라고 요청했다.

     

    언더우드가 선교사 지원 요청에서 밝힌 자신의 소개는 다음과 같다. ; “저는 지금 거의 25세가 되며, 건장하고 거의 철()같은 체질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뉴브런즈윅(신학교)의 메이본 교수의 지도로 대학 입학 준비를 했으며, 1881년 뉴욕대학교를 졸업했고, 지난 5월 뉴브런즈윅에 있는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저는 강도사 자격을 받았으며, 해외 선교 사역을 위해 안수해 주도록 요청한 상태입니다.”

     

    언더우드는 언어 배우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며, 어떤 언어이든지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미혼 상태로 파송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결혼을 하고 파송될지 혹은 독신으로 파송될 지는 현재로서는 분명하지 않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조선에 많은 일꾼이 필요하지만 그 사역에 나서는 사람의 수가 적기 때문에 자신이 지원하게 되었다는 심경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언어에 대한 소양, 철 같은 체질, 그리고 더위와 추위, 고된 일 및 수면 부족 등을 견디어내는 힘 등 사역을 위한 분명한 적합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요청을 허락해 달하는 편지를 보냈다.

     

    결국 언더우드는 의사 선교사인 헤론보다 늦게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지만 언더우드가 먼저 한국에 내한했다. 그리고 26, 독신으로 들어왔으며, 한국에 내한한지 4년째 되는 해에 자신보다 8살이 더 많은 릴리어스 호톤(Lilias S. Horton) 선교사와 1889313일에 결혼했다.

     

    언더우드는 자신이 밝힌 대로 건강했지만 아내는 몸이 약했다. 결국 언더우드가 내한한지 6년 째되는 해에 아내의 병 치료를 위해 안식년 허락을 받아 미국으로 귀향하게 되었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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