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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시기의 알렌과 언더우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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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시기의 알렌과 언더우드의 활동

알렌.jpg입국시 언더우드.png

 

 

알렌과 언더우드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은 병원 개원 후 처음 보름 동안 광혜원(廣惠院, House of Extended Grace)이라 불리다가 이 이름으로 개명된 한국 최초의 서구식 병원이었고, 비록 정부 합작기관이기는 했지만,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기관이었다.

 

동시에 세브란스 병원⋅의과대학, 나아가 연세대학교 창립의 기점을 이룬 것이기도 하였다. 제중원은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으로 최초의 주한 선교사가 된 알렌(Horace N. Allen, 安連, 1858년∼1932년)이 주동하여 세워졌다. 알렌 다음에 파송 받아서 온 최초의 장로교 목사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元杜尤, 1859년∼1916년)는 제중원 설립 첫날부터 그곳의 교사 신분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했고, 후에는 에비슨을 초빙해 와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병원이 새로운 전기를 맞아 성장⋅발전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제중원은 초기에 왕실의 재정 도움을 받아 설립⋅운영된 병원이었지만,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와 거기서 파송된 알렌의 ‘병원 설립안’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북장로 교회의 조선선교 초기에 의료선교가 주축을 이룰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국에서 문호는 개방되었지만 종교 전파의 자유는 여전히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렌은 의사였고, 그 후에 온 언더우드는 성직자 선교사였지만 의예과 공부를 한 적이 있었으며, 그 후에 연이어 내한한 헤론, 빈튼, 호튼, 에비슨은 모두 의료 선교사였다. 자연스럽게 목사보다 의사가 선교의 구심점이 되었고,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내한 목적은 인술을 통한 기독교복음 전파에 있었고, 병원설립의 목적도 선교에 있었다. 미국 해외선교부가 서구식 병원의 설립⋅운영으로 박애정신을 앙양하려는 목적에서 선교사들을 보낸 것도 아니었고, 그들을 취업시키려고 보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제중원은 일반 병원과 달리 육체의 병을 고치는 사회봉사기관의 성격에만 머물지 않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영적 치유가 근본 과업인 기독교 선교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설립되었다.
 
1882년 한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외교관계가 수립되자 미국 북장로교 내에서도 해외 선교부의 총무인 엘린우드(F. F. Ellinwood)에 의해 조선 선교가 추진되었다. 특별히 이 목적을 위해 평신도로서 해외선교부 위원인 맥윌리암스(Daniel W. McWilliams)가 $5,000을 기탁하였다. 부호인 마퀀드(F. Marquand)가 선교에 사용하라고 남긴 유산 관리자였던 그는 그 돈을 한국 선교비로 기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이때 이미 ‘의술이 뛰어나고 헌신적인 정신을 소유한 청년’ 존 헤론(John W. Heron, 惠論, 1856년∼1890년)이 조선 선교사로 나갈 것을 지원하고 있었다. 헤론은 1884년 4월 24일에 조선에 갈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임명받았지만, 내한은 지연되었다. 오히려 뒤에 임명 받은 알렌 의사가 1884년 9월 20일에 북장로교 파송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가장 먼저 한국 땅을 밟았다. 언더우드는 1884년 7월 28일에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아 12월 말에 미국을 출발하여 이듬해 1월에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5일 오후 3시에 제물포에 도착했고, 다음으로 헤론이 6월 20일에 입국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로서 가장 먼저 한국에서 상주하게 된 알렌은 원래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그는 1883년에 중국 상해(上海)에 도착하였으나, 그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남경으로 옮겨갔다. 서구인을 향해 쌓인 중국인들의 감정 노출이 정착하지 못하게 된 주된 이유였다. 그는 조선이 새 선교지로 선정된 사실을 알고 지인들의 권고를 힘입어 한국선교사로 자원하여 왔다. 그러나 선교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고 또 주한 외교관들이 의사를 필요로 하던 상황이어서 주한 미국공사관(駐韓美國公使館)의 공의로 임명되어 활동했고, 후에는 영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공사관의 공의로도 활동하였다. 공의로 근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선교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알렌에게 바라던 기회가 찾아왔다. 1884년 12월 4일에 개화파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등의 주도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났다. 이때 자상(刺傷)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묄렌도르프(Paul G. von Mollendorff, 1847년∼1901년)의 소개로 알렌이 치료하게 되었다. 그는 종래의 한방의술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시술하여 3개월 만에 완치시킴으로써 서양의술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그 후 알렌은 고종과 민비의 어의(御醫)가 되었고, 병원 설립도 추진하게 되었다.
 
그는 주한 미국 대리공사인 조지 포크(George C. Foulk, 福久, 1856년∼1893년)와 외무와 통상업무를 관장하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독판(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督辦)인 김윤식(金允植, 1835년∼1922년)과 의논하여 병원 건설안을 조선정부에 제출하였다. 1885년 1월 27일에 접수된 이 ‘병원 건설안’에는 병원설립과 의학교육의 실시에 필요한 깨끗한 집한 채, 조명과 연료비, 의사와 환자를 돕는 자들에 대한 인건비, 가난한 환자를 위한 급식비, 약재비 300원 가량을 제공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있었다. 그들 편에서는 미국인 의사를 1명 더 초청하여 6개월 후에 병원을 건립할 것이며 알렌과 새로 올 의사는 조선정부로부터 급료를 받지 않겠다는 제안이 들어있었다. 이 일에 대한 미국공사와 민영익의 협조에도 불구하고 묄렌도르프나 한의사들의 반대가 우려되었으나 정면충돌은 없었다.
 
한국의 조야에서 근대식 병원의 필요성이 논의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외아문 독판은 병원의 신설이 필요하며 병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집도 한 채가 있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알렌은 김윤식과 함께 완공단계에 있는 건물을 가서 보았는데, 그 곳은 재동에 있던 홍영식(洪英植, 1855년∼1885년)의 집으로 갑신정변 때 그가 죽임을 당한 후 흉가로 남아 있던 곳이었다. 2월 18일에는 병원 장소가 결정되었다. 알렌은 조선정부와 협의하여 14개 조항으로 된 ‘공립의원 규칙’도 마련하였다. 그것은 병원운영, 진료비, 환자관리 등에 관한 것이었다.
 
병원은 조선정부와 미국 해외선교부의 합의로 설립되었다. 미국공사관이 병원 건립에 거중역할을 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미 개화의 물결을 타고 있었던 상황에서 서구식 의료시설의 도입이 필요하여 그 설립을 논의하고 있었고, 선교부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의 자유가 없어서 선교부 소속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선교의 길을 모색할 수 없었다. 재정적인 면에서도 선교비가 충분하지 않은 형편에서 조선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되어 쌍방의 의견이 합치되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왕립병원으로서 행정과 재정을 조선 정부가 관장하지만 치료와 의학교육과 치료 경비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맡는 이원체제로 성립되었다. 그래서 이 병원의 영문명은 Royal Hospital, Government Hospital, Public Hospital, His Majesty's Hospital, Imperial Hospital, The house of civilized virtue, Chai Chung Won 등으로 혼용되었다. 미국인들에게 이 명칭이 공식적, 과시적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했을 것이지만, 조직상으로는 신앙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는 체제였다.
병원은 1885년 4월 10일에 재동에서 개원되었다. 사실상으로 알렌은 4월 9일부터 환자를 보기 시작했고 4월 10일에 실질상 의료행위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는 이 병원에 대해 윤허한 언급이 4월 14일(음력 2월 29)일에 나타난다. 이 윤허에 의해 외아문의 산하 기관으로 공식 개원 한 것은 이튿날 4월 15일이었다.
 
제중원이 개원된 곳은 재동(잿골) 홍영식의 집이었다. 개원했을 때는 병원의 규모가 600여 평으로 40개의 병상이 있었다. 진찰실, 수술실, 약국이 마련되어 있었고, 장기 치료자는 병동에 머물렀다. 외과병동과 일반병동이 있었고, 남녀유별의 풍습으로 특별병동 및 부인병동이 따로 있었다. 1886년에는 제중원 의학교를 위해 260여 평 규모로 3동이 신축되어 강의실, 실험실, 학생기숙사로 사용되었다. 병원이 협소하고 위치도 좋지 않다고 여긴 알렌은 정부와 협력하여 1887년 초에 2.5배 정도 넓은 구리개(銅峴, 진고개)으로 옮겼다. 예전에 혜민서가 있었던 오늘날 을지로 2가 인근 지역으로 명동성당과 YWCA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5,000여 평의 면적에 건물이 여러 채였다. 병실, 수술실, 진료실 대기실이 마련되었고, 서구식 침대가 놓인 병상도 설치되었다.
 
초기에 제중원 측이 당면한 큰 문제는 여자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알렌은 새 병원에서 여자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기녀들을 고용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는 한국사회의 관습을 고려하여 여성 의료인의 파견을 선교본부에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엘러스(Annie J. Ellers, 1860년∼1938년, 후에 벙커의 부인)양이 1886년 7월 4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녀에 의해 제중원 부녀과가 신설되었다. 또한 그녀는 왕비의 주치의가 되었으며, 벙커와 결혼한 후에는 의료사역을 그만두고 여학교를 세워 한국교육의 발달에 공헌하였다. 뒤이어 호튼(Lillias Horton, 1851년∼1921년, 후에 언더우드의 부인) 의사가 1888년 3월 27일에 도착하여 엘러스의 결혼과 사역 전환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게 되었다. 그녀 또한 왕비와 원세개의 주치의가 되었으며, 언더우드와 결혼한 후에도 제중원을 비롯한 선교사역을 계속하였다.
 
조선정부는 서구문명을 앞세운 개화의 물결에 따라 새로운 의료체제를 도입할 계획을 세우고 종래의 혜민서를 대신하여 서양 의술을 사용할 병원설립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새로 설립된 병원에 광혜원, 제중원의 이름을 부여하여 혜민서의 기능을 잇게 하였다. 처음에는 그 이름이 광혜원(廣惠院)이었다. 이 이름은 고종이 4월 12일에 내린 이름이었는데, 4월 26일에 제중원 (濟衆院)으로 바뀌었다.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에서 “사람을 구제하는 집”으로 바뀐 과정이 개부표(改付標)식이었기 때문에 광혜원이란 이름은 문서상으로만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개명된 날짜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통서일기에는 4월 21일(음력 고종 22년 3월 7일)이라고 적혀 있으나, 고종실록에는 제중원 개칭이 4월 26일(음력 3월 12일)의 일이라고 적혀 있다.
 
제중원이든 광혜원이든 그 이름은 모두 기독교의 선교 정신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제중원의 개원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시작이자 세브란스 병원 및 의과대학 나아가 연세대학교 창립의 실제적 기점이 되었다. 또한 서구식 근대 병원과 의학교육이 시작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고, 기독교 전파가 불허되던 상황에서 환자의 진료를 통해 그리스도의 정신을 보여주기에 가장 접근하기 쉬운 통로가 되었다.
 
1886년 3월에는 서양의학 교육도 실시하였다. 알렌은 병원 설립을 준비하면서 의학교육도 염두에 두었다. 제중원은 개원 후에 곧 의학교육을 실시한 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의학교육은 수술 등을 위해 의학 조수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서양의학을 한국사회에 전수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알렌은 〈병원설립안(病院設立案)〉을 조선정부에 제출할 때 이미 의학교육의 뜻을 밝힌 바 있었다. 그 제안서에서 “병원시설을 갖추게 되면 이곳이 장차 조선 청년들에게 서양의학 및 공중위생학을 가르치는 기관이 될 것입니다.”라고 예고하였다. 고종도 이 일을 적극 지지하였다.
 
알렌은 ‘공립의원 규칙’ 전문과 제1, 3, 4조에 명기된 것에 의거하여 조선인 의사 양성에 착수하였다. 건물도 매입하여 확장하고 학생기숙사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제중원 의학당Medical and Scientific School 혹은 School of Medicine under the Hospital Management)’이 1886년 3월 29일에 개교하여 최초로 서양의학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 일은 한국 현대의학 뿐만 아니라 한국고등교육의 시초가 되었다. 처음에 시험을 통해 16명의 학생이 선발되었으나 4개월간의 수련기간 중에 4명이 탈락하고 12명이 남았다. 이 의학당의 교수는 알렌, 헤론, 언더우드, 기포드 헐버트 등이 맡았다. 알렌이 화학을, 언더우드가 영어⋅산수⋅화학⋅물리를, 헤론이 의학을 담당하였다. 해부학, 약 조제법, 간호법 등을 가르쳤고, 수업은 오전 7시에 시작하여 오후 4시경까지 진행되었다. 그런데 의도했던 것과 달리 의사양성은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았고, 조선정부의 인가도 받지 못했으며, 알렌이 외교관이 되어 떠나고 헤론까지 죽음을 맞았고 빈튼(C. C. Vinton)도 병원 운영에 관한 의견이 달라 1890년경에는 명맥만 유지되었다. 에비슨이 부임 후에 제중원을 개편하였다. 그의 뜻을 관철시켜 1894년 9월 26일(음력 8월 27일) 제중원을 선교부가 단독으로 운영하는 기관으로 만들었다. 1899년에는 제중원의학교도 새로 출발시켰고, 에비슨이 1900년에 첫 안식년에서 돌아온 후부터 학생 조수들을 조직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학생 조수란 명칭도 의학생으로 바뀌었다. 1901년에는 학생수가 7명이었다. 의학교 “제1조 생도 약간 명이 매일 배우는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이다. 휴일을 제외하고는 마음대로 놀 수 없다. 정통하고 탁월해 중망을 얻은 자는 공천해 표양한다.”
 
교육에 대한 선교회의 인식도 달라졌다. 1908년에는 제1회 의학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이는 한국근대 고등교육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제중원의학당은 병원 설립 초기부터 알렌이 이 학교를 세워 한국인 의사 보조원의 양성을 최초로 시작했던 데에 의의가 있다. 이 일은 에비슨에 의해 세브란스병원과 부속 의학교로 이어져 한국 최초의 의과대학을 탄생시키는 결실을 맺었다. 후에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으로 발전하는 초석이 되었고, 한국 고등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제중원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병원이었다. 초기의 체제가 왕립이었다 해도 최초의 서구식병원의 역할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선교할 목적에서 이 기관의 설립에 협력하였다. 따라서 제중원은 한국선교 역사에서 다양한 선교사적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제중원은 한국개신교 선교사상 최초의 기관이었다. 1884년 가을에 도착하여 가시적인 선교결과를 내지 못한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함으로써 제중원을 세우는 기회를 잡았다. 당시 상황에서 의료기관은 선교활동을 위한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우선 제중원이 설립되자 선교사들이 ‘제중원 의사’나 ‘교사’라는 직함으로 내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제중원은 이처럼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는 관문(gateway)의 역할을 하였다. 알렌은 주한 미국공사관의 공의 신분으로 내한하여 제중원 원장이 되었고, 언더우드는 제중원 교사로 내한했으며, 이후에 다른 선교사들은 제중원의 의료 담당으로 입국하여 선교 활동의 기회를 살폈다. 북감리교에서 파송된 의료선교사 스크랜턴도 내한 직후에는 제중원에 합세 하였다. 언더우드와 같은 날 제물포에 상륙하였다가 곧바로 일본으로 되돌아갔던 아펜젤러 내외도 입경하였다. 제중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와 미국북장로교 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여기서 처음 선교사들의 공적예배가 드려졌고 처음 교육, 선교, 봉사활동이 시작되었다. 제중원 원장도 의사 알렌이었다. 목사 언더우드는 제중원 교사, 보조원, 약제사, 회계 일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병원 체제상으로는 신앙공동체를 만들 수 없었지만, 암암리에 선교공동체 역할을 했었다.
 
북장로교 해외선교부(Mission Board, 宣敎本部)는 한국에 선교회(Korea Mission, 宣敎會)를 세우고 이 한국선교회 밑으로 전국의 중요한 지역들에 지회(Mission Station, 支會)를 두는 조직체계를 갖추어 나아갔다. 제중원은 최초의 한국 개신교 선교회이자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산하 한국선교회의 지역거점 또는 아지트가 되었다. 처음에는 기독교 선교가 국법으로 금지된 상황에서 의료선교사는 물론 목사 선교사들까지도 다른 활동이 불가능하여 제중원에 모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서울과 부산 등에서 정식으로 선교지회가 설립되어 직접선교가 시행될 때까지 자연스럽게 선교회와 선교지회의 역할을 대행하였다. 실질적으로 한국 선교회의 회장을 알렌이 맡았고, 언더우드는 회계였다. 후에 서울 선교지회의 전초역할을 하였다. 언더우드는 의료선교 활동이 정부로 하여금 선교사들에게 호의를 갖게 하고 하나님의 복음전파를 촉진시켰다고 평가하였다.
 
감리교 선교사들도 내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자적인 의료 활동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맨 처음에는 함께 모여 활동하며 교파간의 협동정신을 싹틔워 후에 여러 선교회가 연합하여 세브란스병원을 후원하는 기초를 닦았다. 이 연합은 다른 교파들과도 함께 연합하는 기틀이 되었다. 그 결과 1905년에는 미국 남⋅북장로교, 남⋅북감리교, 캐나다⋅호주장로교 등, 6개 교단의 선교사들이 모여 ‘주한복음주의선교사공의회’를 구성하였고 교파의 구별이 없는 단일 한국교회 설립 안을 가결하기도 하였다.
 
제중원은 초기에 선교공동체였으나, 한국인 신자들이 참여하여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데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여기서 그런 신앙공동체가 태동되는 토대가 되었다. 언더우드 목사가 처음부터 제중원 교사로 합세하였고, 새로 온 선교사들 외에 다른 외국인들도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세례식과 성찬식도 거행하게 되었다. 헤론 부부가 6월 20일에 내한한 후, 알렌 부부, 스크랜턴 부부가 알렌의 집에서 모여 첫 주일 예배를 1885년 6월 21일 주일 저녁 8시에 드렸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 다른 주한 외국인들이 모여 주일 예배를 드렸다는 보고도 있다. 1885년 10월 11일 주일에는 알렌의 집에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성찬 예식이 행해졌다. 이 예식에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루미스(H. Loomis)와 그 일행도 참석했고, 루미스 목사가 설교하였다. 1886년 4월 25일 부활 주일에는 스크랜턴 선교사와 아펜젤러의 딸들을 대상으로 유아세례식도 거행되었다. 드디어 1886년 7월 18일에는 한국인 노춘경이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 역할을 대행하는 선교사 연합교회(Union Church)의 토대가 형성된 것이었다.
 
제중원이 개원된 후에 만주를 통해 이미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인 한인들 중의 일부가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자제하고 있던 제중원의 선교사들을 찾아왔다. 그들은 병원 안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언더우드는 이들을 만주 주재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인 로스(John Ross) 목사의 선교활동의 열매라고 하였다. 그들은 권서들로서 주중에는 병원 안에서 환자를 상대로 권서활동(勸書活動)을 하고, 주일에는 함께 예배를 드렸다. 1887년 2월 27일 주일부터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을 비롯한 한인들도 점차 많이 참석하기 시작했고, 성경공부 모임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이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1887년 10월 9일 주일에 예배를 드림으로써 벧엘(현 정동제일) 감리교회(監理敎會,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가 시작되었다. 1887년 9월 27일 정동장로(현 새문안)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태동되었다. 남대문교회, 승동교회도 여기서 태동된 것으로 보고 있다. 스크랜턴이 따로 개원한 시(施)병원에서도 1890년 1월 12일부터 정기적으로 주일 예배가 있었다. 이는 상동감리교회(尙洞監理敎會)의 시원이 되었다.
 
제중원 안에서의 제도적인 ‘신앙공동체’의 형성은 1894년 에비슨이 제중원을 해외선교부의 단독 운영체제로 개편하고 난 후부터 가능해졌다. 국립⋅왕립병원이란 타이틀을 붙일 근거가 없어져 이때부터 정기적으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885년 6월 21일에 선교사들이 모여서 드린 예배는 분명히 선교사들만의 예배였으므로 유니온교회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선교하러 온 많은 선교사들이 이곳에 모였고, 후에는 점차 한국인들도 이 유니온예배에 참석하였다는데 논란이 빚어질 소지가 있다.
 
1894년 이후에 제중원이 새 전기를 맞아 북장로교 해외선교부가 단독으로 경영하게 되고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년∼1895년)과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 등으로 사회가 격변하여 전도와 예배가 보다 자유로워지면서 에비슨의 노력으로 구리개 곧 동현의 제중원에서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정식으로 조직된 장로교회가 정동(새문안), 곤당골, 연동, 이 세 곳에 있었고, 서울의 다른 곳들에도 정식 교회는 아니지만 전도처소(preaching place)라고 불리는 곳들이 몇 군데 있었는데, 구리개 채플(Chapel, 기독교의 예배당)이 그 처소들 중의 한 곳이었다.
 
그 후 홍문석골에서 교회가 자체적으로 형성된 후 선교회가 그 교회를 관리하게 되면서 에비슨이 병원 채플에서의 일요일 예배를 중단하고 홍문석골을 돕게 되었다. 홍문석골교회와 곤당곤교회가 통합되었다. 그들이 모이는 곳은 홍문석골교회였고 무어무어(Samuel. F. Moore)가 주관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교인들 간에 반목이 발생하자 홍문석골교회가 선교사들로부터 독립해 나갔다. 그들 중의 일부가 일요일에 병원 채플을 찾아옴에 따라 서울의 선교사들이 정동교회, 홍문석골교회, 연못골교회에 다니는 전체 교인들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1902년부터 세 교회들의 중앙 지점에 병원 채플에 모여 매주일 오후에 연합예배를 갖게 되었다. 에비슨은 그 일을 위해 제중원 건물들 가운데 가장 큰 건물을 채플용으로 전환시켰다. 그 첫 번째 연합예배 소식이 ��그리스도신문�� 1902년 3월 20일자에 실린 「셔울동현회당」이란 기사에서 보도되었는데, 그 기사에 따르면 음력 그믐이었던 지난주일 오후 2시에 구리개 회당에서 처음으로 모든 교인들과 선교사들이 한 데 모였고 이후로도 주일 오후마다 모여 연합예배를 드릴예정이라고 했다. 이 연합예배는 4월 10일자와 5월 8일자에서도 보도되었다. 이 병원 채플에서 여자 연합사경회도 개최되었다.
 
동현 제중원의 채플예배는 1904년에 세브란스병원이 남대문 밖에 세워지면서 남대문 밖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채플 예배는 세브란스병원 개원 후에 더 확대되었던 것 같다. 한국선교회의 1905년도 연례모임 회의록에는 언더우드가 남대문 사랑(South Gate Sarang)을 맡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랑’이 단순히 전도를 위한 어느 가옥의 만남의 장소와 같은 것에 불과하였다면 이처럼 언더우드가 에비슨 대신 공적인 책임을 맡아서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 후 1909년도 연례모임 회의록에서 언더우드가 ‘South Gate Congregation’의 책임을 맡고 에비슨이 돕는다고 기록되었고, The Korea Mission Field 1910년 1월호에서는 남대문교회가 (1909년) 11월 21일에 조직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제중원은 의료선교사들의 의술과 새로운 의료장비를 통해 당시에 동도서기(東道西器)란 통념에 따라 동도 우월의식을 간직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양의술의 가치를 마음속 깊이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었다. 왕실에서는 알렌의 민영익 치료, 1885년 9월 27일 콜레라가 중국과 일본에 만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방역대책을 제시하는 등 실제로 제중원은 조선 정부의 신임을 얻어 정부와 선교회 사이에서 가교 및 선교개방을 앞당기는 역할을 하였다. 알렌은 왕실의 어의와 제중원을 대표하는 의사로 활동하였고, 그 후에 온 의료선교사들도 왕실의 시의(侍醫)가 되고 관직도 받았다. 고종은 알렌에게 병원문제 외에 대외관계에 관해서도 자문을 구하였다. 청국에서 귀국한 대원군도 알렌을 찾았을 정도였다. 명성왕후 시해 후 춘생문(春生門) 사건을 전후해서는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고종의 불침번까지 서게 되었다. 일반 시민 중에서도 보수적인 사람들이 완고한 태도를 버리고 개화와 근대화에 호응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중원은 환자치료를 통한 이런 가교 역할로써 한국인들에게 서구 기독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주어 적대감이 벗겨지고 선교가 가능해지게 하는 촉매역할을 하였다. 의료선교 활동은 또한 가장 효율적인 전도방법이 되었다. 언더우드도 조선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여 선교사와 선교단체에 호의적이 된 것은 의료선교 활동의 결과라고 보았다. 특히 제중원이 양반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도 선교활동에 유익을 준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의료선교가 복음전파에 충실한 시녀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한국선교역사를 쓰면서 의료선교가 이룬 다섯 가지 공로를 1) 국왕의 호의 획득, 2) 종두법의 소개, 3) 서울에 전염병 치료하는 병원 설치, 4) 콜레라 유행 시 헌신적인 간호, 5) 청일전쟁 후 평양에서 홀(Hall)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행한 희생적인 봉사라고 정리하였다.
 
선교사들은 백정들로부터 규방 여인들, 정부 고관들, 왕과 왕비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가리지 않고 치료했는데, 이 일에는 계층의 장벽을 타파하고 선교의 문호를 모든 계층에게 개방시키고 사회사적, 선교사적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공개적인 기독교의 복음전파가 불가능했던 시기에 제중원은 간접선교에서 직접선교로 나아가는 가교의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제중원은 선교의 터를 닦아 기독교의 여러 선교부가 진출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알렌은 최초로 한국에서 상주하기 시작한 개신교 선교사였다. 전술한 대로 그는 갑신정변을 게기로 제중원의 산파역을 했고 초대 원장으로 병원과 의학교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다 잠시 외교관 활동을 한 후에 다시 선교사 신분으로 돌아와 부산, 인천 제중원 등지에서 봉사하였다. 그러나 1900년에 다시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주한 미국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Delaware)에서 태어났다. 1881년에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을 졸업했는데, 재학시절에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1883년 신시내티에 있는 마이애미 대학교(University of Miami)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중국선교사로 갔으나 중국인의 서양인 학대를 견디지 못하였다. 이곳저곳을 방황하다가 임지를 한국으로 바꾸어 1884년 9월 20일에 내한한 후 미국공사관의 전속의사가 되었다.
 
초기에는 수술 위주의 치료였고 말라리아 치료, 천연두 바이러스 접종을 비롯한 예방접종을 하도록 하여 미신적인 치료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치과 치료도 하였다. 최초의 여의사 초빙도 그의 공로였다.
 
알렌이 이룬 최대의 공로는 무엇보다도 제중원을 설립하고 조수의 양성을 위해 의학교육을 실시한 것이었다. 그는 민영익 치료를 개인적인 명성을 높이는 기회로 삼지 않고 의료선교사의 소임을 적절하게 이행함으로써 한국선교의 발전을 위해 큰 공적을 길이 남기게 되었다.

 
그는 입국 초기에는 선교사인 사실을 들어낼 수 없어서 미국 공사관의 공의란 사실을 내세웠다. 그의 선교방법은 ‘위에서 아래로’의 방법이었고 국법이 정하는 한도 안에서 하는 점진적인 방법이었다. 선교활동에는 사실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는 매일 기도하고 예배하는 의사였다. “한국이 장차 기독교 국가가 될 그 날을 보기 위해 살고 싶다(I hope to live to see the day when she shall be a Christian nation)”고 피력할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중했고 뚜렷한 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의료선교관은 선교본부에 보낸 다른 서신에서도 볼 수 있다.
 
어떤 선교사들은 병원이 선교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 병원을 운영하려 합니다. 그러나 병원이 선진화된 서양문명의 첫 단계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어떤 선교일도 이 나라에서 허락되지 않은 것을 고려할 때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기관을 선교사로 알려진 사람의 손에 넘겼고 이와 같은 다른 봉사도 수락할 것입니다. 어느 선교단체든 의사를 공급하는 것은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렌은 병원을 문명의 도구라고 간주하는 의료 선교관은 가졌다. 그는 주어진 일을 뒤로 미루면서 선교를 앞세우는 것을 반대하였다. 정부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전도활동도 하면 안된다고 여겼다. 이는 정부의 영향력 있는 고위 관리의 입장 여부에 따라 병원의 존폐가 결정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그의 하향식 선교 방법에 의해 갑신정변을 계기로 서양의술의 우수성을 입증한 후에 병원과 부속 의학교 설립을 관계 당국에게 제안하고 그 일을 위해 앞장서서 노력하여 제중원의 설립이라는 최초의 결실을 보았다.
 
제중원은 개원 이래 알렌과 언더우드, 6월 20일에 내한한 헤론과 함께 활기찬 첫해를 보냈다. 알렌은 콜레라가 전염병이 전국에 창궐(猖獗)했을 때 예방법을 알리고 위생에 주의할 것을 당부하며 병에 대한 미신적인 인식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하여 대민 계몽활동 부분에서도 공헌하였다. 개원 첫해인 1885년에만 265명의 환자를 진료하였고, 그중 대수술도 150여건이나 진행 되었으며, 10,460명에게 투약하고 환자들을 진료했을 정도로 활발하게 의료사역을 전개하였다. 알렌과 헤론은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라는 첫해의 활동을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보고하여 중요한 기록으로 남겼다. 병원개원의 과정, 병원의 도면, 환자에 대한 기록, 회계보고 등을 38면에 걸쳐 정리하였다. 의학적인 면에서 제중원 개원 후 1년 동안 진료한 환자에 대한 자세한 통계가 실려 있고 서양의학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질병을 최초로 분류해 질병 명에 따라 작성했기 때문에 이 보고서는 특별히 가치 있게 평가되었다.
 
제중원이 설립되고 그 책임자는 알렌이었다. 그가 초대 제중원 원장으로 활동한 기간은 1885년 4월부터 1887년 7월까지였다. 알렌의 제중원장 역할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1887년 8월 주미조선공사관(駐美朝鮮公使館)의 초대 전권대신(全權大臣)인 박정양(朴定陽, 1841년∼1904년)을 보좌하는 참찬관(參贊官)이 되어 제중원을 떠났다. 선교부와의 관계도 끊어졌으나 1889년 다시 주한 선교사로 내한하여, 1889년 6월 헤론의 사후 다시 제중원 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1890년∼1891년). 헤론의 사후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 구역을 정부와 협상하여 받아낸 것도 알렌의 공적이었다. 1890년 7월에 다시 선교부와의 관계를 끊고 주한미국공사관의 서기관(Secretary)이 되었으며, 잠시 동안 병원 일을 함께 돌보았다. 이때 알렌이 없었다면 병원은 일본인이 인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후에도 한국정부와 협상할 일이 생기면 알렌은 병원을 대표함으로써 연락원의 일을 계속했다. 1897년에는 주한미국공사 겸 총영사(Minister Resident and Counsel)로 승진되었고, 1901년에는 특명전권공사(Envoy Extraordinary and Minister Plenipotentiary)로 임명되어 1905년까지 재직하였다. 1902년 추수감사절에 세브란스의 희사금으로 새 병원을 신축할 때 알렌은 미국 공사관의 수장으로써 그 주춧돌을 놓았다.
 
알렌의 외교관 경력은 가장 낮은 직에서 시작하여 대사보다 한 단계 밑의 직에 이르렀다. 그는 주한 외교관으로 재직 하는 동안 여러 대통령들을 섬겼는데, 해리슨(Benjamin Harrison VI, 1833년∼1901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1837년∼1908년), 매킨리(William McKinley, 1843년∼1901년),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1858년∼1919년)가 그들이었다.
미국공사로서 그는 개인적으로 한일 강제 병탄을 위한 태프트와 가츠라의 밀약(Taft–Katsura agreement)을 따르지 않고 주한 선교사답게 망국의 한을 진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지만, 한국의 입장을 미국에 잘 대변하지는 못하였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그도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한국에 관한 저술로는 Korean Tale(1889), Korea Fact and Fancy(1903), Korean∼American Relations(1904), Things Korean(1908) 등이 있다. 그는 고종과 민비의 주치의가 되어 조선 정부로부터 1886년에 당상관, 통정대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직책들을 받았다. 고종으로부터 3차에 걸린 훈장도 받았다. 이처럼 왕실과의 관계를 가까이 한것은 선교사들이 어디서나 환대를 받을 수 있는 데 공헌했다.
 
알렌은 4년간만 해외선교부와 관계를 맺었고, 그것도 1년은 중국에서 사역하여 한국 사역한 기간은 3년뿐이었지만, 그의 이름을 빼놓고 한국기독교역사와 한국역사를 쓸 수도 없을 정도의 업적을 쌓았다. 무엇보다 제중원의 설립으로 한국 최초로 서구식 병원을 세우고 의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선교의 초석을 놓았다는 것은 최대의 공헌이다. 직접 전도할 수 있는 교량 역할이었다. 그의 후임으로 헤론이 책무를 맡았으나 병사하자 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확보하게된 것도 알렌의 힘이었다. 헤론 후에 토론토 의과대학 출신의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하리영 河鯉泳, 1865년∼1949년)가 한때 병원 책임자가 되었고, 1891년 4월에는 빈튼이 그 책임을 이어 받았다. 그는 병원 안에 교회를 세우려 했으나 불가하다는 것을 알고 병원 문을 닫기도 했다. 이때 성공회 측에서 병원을 인수하려 했으나 알렌의 조치에 의해 병원은 그대로 유지 되었다. 1893년 11월에 에비슨이 원장이 된 후 제중원은 북장로교 단일 소속기관이 되고 에비슨에게 절대적인 감독권이 주어져,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도 알렌의 영향력이 컸다. 한때 북장로교 관할 하에 부산의 선교지회를 세워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알렌의 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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