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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지역 선교 125주년을 기념하면서

기사입력 2019.03.03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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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32:7)

     

    역사란 과거의 사건을 설명하는 것으로 후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역사적 사건의 팩트가 달라진다. 구술로 전해지는 역사적 사건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여 연대기와 그 사건들이 전승된다.

     

    우리나라 선교는 개신교회보다 가톨릭교회가 100년 이상 앞선다. 가톨릭교회의 100년 동안의 선교 위에 개신교회의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개신교 복음의 전래 과정을 살펴보면 초기 선교사들의 한글어 어학선생은 가톨릭교회나 그 단체에서 유급으로 사역하였던 자들이 개신교 선교사들의 어학선생이 되기도 할 정도였다.

     

    김포지역의 개신교 선교는 아주 독특한 선교지역이 되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젊은 나이에 피선지인 조선에 입국하였다,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26,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는 27, 헤론은 28, 스크랜톤은 29, 게일은 25세에 한국에 파송되었다.

     

    이들의 선교열정은 대단했지만 경험은 부족하여 선교 경험이 풍부한 선교사를 통해 선교에 대해 배울 수 있기를 기대했다. 마침 당시에 이들에게 다가와 선교의 경험을 이야기 해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하고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만주 산동성 지푸에서 활동하고 있는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1829-1893) 선교사였다.

     

    한국에 파송된 미국 북장로교 소속 7명의 선교사는 18906월 그를 초청하여 2주 동안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 세미나를 통해 네비우스의 25년 동안의 체험에 입각하여 젊은 선교사들에게 주요 원리에 대한 사고의 씨를 심어 주었다.

     

    네비우스는 중요한 선교의 원리로 모든 신자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며, 전도하며 사역을 확장 시키는 자전(self-propagation), 모든 그룹은 선임된 무보수 영수의 관할을 받으며, 순회 교구들은 나중에 목사가 될 유급 조사들의 관할을 받는 자치와 자치(self-government), 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 등을 소유하며, 각 그룹은 창립되자마자 순회 조사의 봉급을 지불하기 시작하며, 개교회의 목사에게 외국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자립(self-support) 등이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네비우스 선교사로부터 교육을 받는 사상이 바로 자전, 저치, 자립이었다. 이같은 교육을 받은 해가 1890년이었으며, 이러한 선교전략에 따라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에게서 교육을 받은 조사들과 일반 신자들을 김포로 보내 선교활동을 하게 하였으니 그 해가 바로 1894년이었다.

     

    김포지역은 선교사들에 의한 선교가 아니라 그 선교사들에 의해 교육을 받은 조사나 신자들이 김포지역에서 자전, 자치, 자립에 의해 선교가 진행된 아주 독특한 지역이다. 김포지역에 선교를 개시한 날이 곧 김포제일교회와 김포중앙교회의 설립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김포제일교회나 김포중앙교회는 공히 교회를 설립기념일을 189433일로 잡고 있다. 그러나 이날은 교회가 설립된 날이 아니라 김포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기념의 해이다. 김포지역에 최초로 복음이 전해지는 그 날을 두 교회가 설립일로 정하고 있다.

     

    18943월을 설립일로 역사 기록은 朝鮮耶蘇敎長老會長老會史記 上에 기록을 유일한 그 근거로 삼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시년(是年)에 선교사 원도우(元杜尤)난 전도의 방침을 확장하야 서상륜 김흥경 박태선 유흥렬 등으로 경성 근방에 전도케 하고 신화순 도정희 이춘경(李春景) 등으로 고양(高陽) 김포(金浦) 등지(等地)에 전도케 하니 동시(同時)에 사오처 교회가 신설 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원더우드 선교사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따라 경성 근방과 고양과 김포에 전도케 하였다는 사실과 교회가 사오처교회가 세워졌다고 기록하지만 정확히 어느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은 없다. 이 기록에서 김포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입증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하게 김포지역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은 朝鮮耶蘇敎長老會長老會史記 上」의 기록에 의하면 1897년이라고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1897 정유 시년에 김포읍교회(金浦邑敎會)가 성립(成立)하다. 선시(先是)에 고양군 세교교인(細橋敎人) 거군보(高君甫)와 기처(其妻) 박철라미(朴撤羅米)가 당지(當地)에 도()하야 열심전도하으로 본읍인(本邑人) 천덕현 이봉춘과 걸포(傑浦) 리인(里人) 유공선 박성삼 황춘근 유중근이 시신(始信)하고 유공선 사저에셔 회집예배하더니 지시(至是)하야 시나가 일증(日增)하야 300여인(三白餘人)에 달한지라. 동심협력하야 본읍 서리(西里)16간 가옥을 매수하야 예배당으로 사용하니 당시 조사(助師)난 홍성화 추후(追後) 타락(墮落)함이러라.

     

    김포지역의 최초의 교회는 김포읍교회였으며, 설립 시기는 정확히 1897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이 없다면 1894년에 김포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막연하게 경성 부근과 고양과 김포에 전도하여 4-5개처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1894년의 기록에서 김포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데는 근거가 약하다.

     

    朝鮮耶蘇敎長老會長老會史記 上1928년에 출간되었지만 그 준비는 1916년 제5회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부터 진행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장로교 교단총회의 공적 기록이다. 편집위원은 총회가 임명한 마포삼열 선교사를 비롯한 길선주, 이눌서 김인전 공위량 곽안련, 함태영 등 14인이었다.

     

    교회 설립일은 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에 선교가 시작된 그 날이 곧 교회 설립일은 아니다. 장로교 정체에 있어서 교회 설립은 소속 노회의 권한이다. 공식적으로 교회를 설립하는 권한은 노회이다. 그러나 1894년은 아직 노회가 조직되기 전인 선교사 공의회 시대(1893-1900)이다. 적어도 1916년에 편집을 결정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5회 총회 결의로 공적 기록물이다. 이 기록을 객관적 타당한 기록으로 보기 때문에 1897년이 김포제일교회와 김포중앙교회의 설립일이 된다. 그러나 두 교회는 1894년을 설립일로 지키며너 2019년 3월 3일은 첫주일에 125주년 기념감사예배를 드렸다.

     

    김포지역의 선교 125주년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 기록이 조선예수교장로회의 공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김포지역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열매로서 우리 민족인 이 지역 사람들에 의해 선교가 시작되었고 교회가 세워졌다는 데 의의가 있는 지역이다.

     

    김포지역에 복음을 허락하시고 125년 동안 김포지역을 복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앞으로 통일한국 시대에 축복의 땅이 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김포언더우드역사문화연구소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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