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논단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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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직인 관리 규정 제정 필요 '분쟁예방'교회는 직인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공적인 모든 공문은 직인을 날인하여 발급한다. 직인 없는 공문은 효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 모든 공문의 작성권자는 담임목사이며, 담임목사 허락 없이는 발급할 수 없다. 당회 서기가 공문을 발급할 때 당회장(담임목사) 결재 없이는 받을 수 없다. 공문을 발급한 후에는 당회가 정한 공문 발송 대장에 기록하여 발송하여 후에 공문의 적법성 여부를 판단 받아야 한다. 공문에 날인한 교회 직인은 당회 서기가 비치하고 보관한다. 그러나 이 보관은 반드시 당회 서기가 자기 집을 가져가 관리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교회 정관의 보관 방법 규정에 따라야 하며, 규정이 없는 경우, 당회장실, 당회실, 사무실 등 당회가 결의한 곳에서 관리하여야 한다. 이러한 교회 직인과 공문 발송에 관한 규정을 교회 정관 시행세칙으로 규정해 둘 경우, 가장 합리적인 비치와 관리를 할 수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을 곳이다. 1. 교회 직인은 당회실에 비치하여 관리한다(혹은 당회실에 비치하여 관리한다). 2. 교회 각종 공문은 교회 직인과 담임목사(당회당) 당회 서기 직인을 날인하여야 한다. 3. 당회장과 서기 직인은 교회 직인과 함께 보관한다. 4. 교회 직인은 총회에서 직인증명서 발급받는다. 5. 교회 공문의 작성권자인 담임목사의 공문 발급에 서기가 거부할 경우, 교회 직인과 담임목사 직인만 날인하여 발급한다. 6. 교회 직인을 서기가 개인적으로 비치하여 관리하면서 당회장에게 제출을 거부할 경우, 당회장은 별도로 직인을 제작하여 직권으로 총회에 직인을 변경할 수 있다. 7. 교회 모든 공문은 발급 대장에 기록하여야 하며, 발급 대장에 기록이 없으면 발급하지 않는 것으로 한다. 8. 공문의 작성권자가 직권으로 발급할 수 있으며, 특별한 경우의 공문은 당회 결의를 거쳐야 한다. 9. 공문의 작성권자인 담임목사가 서기가 아닌 직접 서류를 작성하여 발급할 수 있다. 10. 직인 부정 사용의 경우 권징치리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은 규정을 정관 시행세칙으로 제정하여 시행할 경우 상당한 부분 분쟁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관련 대법원 판례법리다. 공문의 작성권자의 결재를 거치지 않고 임의로 작성권자의 직인 등을 부정 사용함으로써 공문서를 완성한 때에는 공문서위조죄가 성립한다. 이는 공문서의 작성 권한 없는 사람이 허위공문서를 기안하여 작성권자의 결재를 받지 않고 공문서를 완성한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작성권자의 직인 등을 보관하는 담당자는 일반적으로 작성권자의 결재가 있는 때에 한하여 보관 중인 직인 등을 날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경우 다른 공무원 등이 작성권자의 결재를 받지 않고 직인 등을 보관하는 담당자를 기망하여 작성권자의 직인을 날인하도록 하여 공문서를 완성한 때에도 공문서위조죄가 성립한다(대법원 2017. 5. 17. 선고 2016도13912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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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 생명 15년 연장과 하나님의 구속사“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왕하 20:6) 하나님 말씀이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전해 주었다는 의미이다. 신학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한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자신의 구속경륜을 알려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되 삼위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어떻게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적용되게 해 주셨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아 그분께 경배와 영광을 돌리며,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는가를 알아 순종해야 한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구약은 신약의 계시에 대한 약속이며 근거가 되고 신약은 구약의 약속에 대한 성취이다. 그 약속과 성취의 한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신구약 성경은 삼위 하나님과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계시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고 구원을 이루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효과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는 이러한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부분은 전체를 통해서 확증되고 전체는 부분에 근거를 제공한다. 이러한 통일성의 맥락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해석할 경우, 잘못된 적용이 이루어져 우리의 삶의 파괴한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파괴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해석한 결과이다. 열왕기서의 대상 남 왕국과 북 왕국 열왕기서는 많은 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왕은 이방 나라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수단으로 사용된 이스라엘 나라 왕이다. 여기서 말한 이스라엘이란 하나의 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을 의미하지 않고 분열 왕국을 말한다. 국가 이스라엘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왕 때까지 하나의 국가였으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에 나라가 남쪽과 북쪽으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 남쪽은 남 왕국, 혹은 남 유다라고 했다. 북쪽은 북 왕국, 혹은 북이스라엘이라고 했다. 북 왕국의 실권 지파가 에브라임이어서 약칭으로 에브라임이라고 했다. 남 왕국은 실권 지파가 유다이기 때문에 남 유다라고 했다. 열왕기서를 읽을 때 본문이 북 왕국을 지칭한 것인지 남 왕국을 지칭한 것인지를 잘 확인해야 한다. 열왕기서는 남 왕국과 북 왕국을 번갈아 가며 말씀한다. 역대기서는 남 왕국 중심으로만 기록한 성경이다. 열왕기서와 하나님의 구속사 열왕기서는 남 왕국의 왕들도 하나님께 죄를 범했고 북 왕국의 왕들도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그 죄의 결과 북 왕국은 앗수르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으나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남 왕국은 북 왕국과 같이 그들의 죄악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서의 저자는 남 왕국과 북 왕국의 포로 이후에 과거를 회고하며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 역사는 신약의 구속을 위한 약속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구속사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사는 남 왕국이 북 왕국과 같이 죄를 범했지만, 남 왕국인 유다 왕국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유다 왕국을 통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왕기서나 역대기서는 남 왕국, 남유다 중심이다. 이 유다를 통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였으며, 이러한 역사를 통해 신약에서 약속의 성취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왕들의 모범적 행위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의 왕들의 모범적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라는 성경이해와 묵상을 “모범적 해석과 적용”이라고 한다. '모범'의 사전적 의미는 ‘본받아 배울 만한 본보기’라는 의미가 있다. 왕들의 모범적 행위를 통해서 본받아야 할 것과 본받지 말아야 하는 것을 열왕기서에서 찾아내고 이를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예컨대 왕들이 여호와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 그러자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심판을 받는다. 또한 왕들이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을 잘 섬겼다. 그러자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다. 우리도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순종하자는 형식 논리였다. 소위 왕들의 역사를 위인전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이런 형식의 성경이해와 적용을 우리는 ‘모범적 해석과 적용’이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이런 형식의 모범적 성경해석과 적용은 성경을 인물중심의 자서전적 해석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해 왔다. 소위 성경을 하나님이 아닌 인물 중심의 위인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라고 이를 반대해 왔다. 왕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 모범적 성경해석을 반대하며 구속사적 성경해석을 주장한 사람들은 성경은 왕들 중심의 인물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사를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의미하므로 열왕기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부 구속사 학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강조한다고 해서 구속사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 중심의 구속사를 주장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고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를 개인에게 효과적으로 적용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며, 삼위 하나님 중심의 구속사를 언급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논의된 내용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외면한 모범적 해석과 모범적 해석을 거부한 구속사적 해석은 문제가 있다는 주장들이 있어 왔다. 이런 관점을 이해한다면 열왕기서 왕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혹은 각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계시의 의도를 본문 말씀 속에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본문, 혹은 열왕기서를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경 전체의 통일성 속에서 확인한 후 우리의 삶의 자리로 적용해야 한다. 이때 얼마든지 모범적 적용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 전체의 통일성 속에 하나님의 계시나 구속적 진리를 외면한 채 오로지 인물의 위인전 형식의 모범적 해석과 적용은 주의해야 한다. 히스기야의 생명 15년 연장받은 사건 히스기야 왕이 심한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다. 아모스의 아들인 예언자 이사야가 그에게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너는 이제 죽을 것이다. 그러니 네 집안일을 정리하라. 너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러자 히스기야 왕은 벽 쪽을 바라보며 여호와께 기도를 드렸다. 기도 내용은 자신이 언제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께 복종하고,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슬프게 울며 기도했다.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했다. 이때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었고 그의 눈물을 보았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병을 고쳐 주시겠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히스기야가 병 고침을 받아 15년 동안의 생명을 연장받았다. 이 사건 해석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집을 정리하라고 한다. 문자적 의미는 “너는 네 집에 대하여 명령하라”라는 뜻이다. 곧 죽기 전에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왕으로서 국정(國政) 인계를 하라는 뜻이다. 평행 구절인 이사야 38:1에는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이다. 왕상 20:1절에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미래형 동사로서 임박한 가까운 미래를 가리킨다. 또 이러한 임박한 죽음은 병 때문인데 이 병으로 인한 임박한 죽음의 이유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며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했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여호와께로만 향하겠다는 믿음이다. 또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스기야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왕으로서 모든 일정을 중지하고 오직 여호와께만 전심전력(全心全力)하여 매달린 모습을 보여준다. 히스기야는 남 왕국의 왕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창세기에서부터 흐르는 하나님의 약속과 구속은 유다를 통해서 이루어진다(창 3:15, 49:10 등 참조). 북 왕국은 언약 밖의 계열로 왕위가 정통성 없이 배반과 쿠데타로 이어졌다. 결국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가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남쪽 유다 왕국은 창세기에서부터 약속한 하나님의 구속의 라인인 유다 지파를 통한 유다 왕국을 통하여 왕위가 계승되며, 이 왕위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이어진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대한 마태복음 1:12절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라는 본문을 주해하면서 “다윗의 후손들이 왕 노릇을 하다가 종살이와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 복음서 기가는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포로 생활은 죽은 거나 다름없었는데, 이 유대인들이 다시 한 백성으로 모이고 또 아 왕권의 어떤 남은 자들이 다윗 계통을 통해 존속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뛰어난 섭리가 아니면 불가능했었다는 것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야곱이 ‘홀(왕의 지팡이)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창 49:10)라고 예언한 그대로다. 이 백성의 분산이 아무리 비참하고 슬픈 것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꺼지지 않고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히스기야 왕은 반드시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아들이 없을 때 죽음의 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15년 생명 연장을 받았다. 연장받은 15년 동안 아들 므낫세를 낳았다. 히스기야에게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생명을 15년 생명 연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열왕기하 21:1에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12세였다. 그렇다면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받은 후(6절)에 얻은 아들임이 분명하다. 히스기야의 15년 생명을 연장받은 기도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경륜 가운데 주어진 사건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할지라도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중단시킬 수 없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 적용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는데 간절히 기도하자 생명을 15년 동안 연장받았다.” 우리도 “간절히 기도하면 생명을 15년 동안 연장받은 응답을 받는다”라고 적용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해석을 모범적 해석과 적용이라 한다. 이런 식의 해석은 히스기야 왕의 15년 생명 연장받은 사건을 잘못 해석하므로 나타난 현상이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잘못 적용되고 만다. 물론 우리는 히스기야 처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어려운 상황이 올 때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아야 한다. 제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기도 본문을 읽고 곧바로 나에게 가지고 오기 전에 먼저 구속사적, 성경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나에게 가져와 적용해야 한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은 생명을 15년 연장해 주시므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중단되지 않고 이어져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히스기야의 기도와 생명 연장받은 사건은 우리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주권적으로 이끌어가신다. 역사의 현장에서 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을 통해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는 신앙고백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그 응답의 내용과 시기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우리는 그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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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파업과 장기려 박사1976년 남미의 콜롬비아에서는 의사들이 52일 동안 파업을 하여 응급치료 이외의 진료 활동을 전부 중단한 적이 있었다. 당시 신문을 비롯한 언론 매체는 의사의 파업으로 야기된 예기치 못한 놀라운 사실을 보도했다. 의사들이 파업을 해서 사망률이 35%가 감소하였으며 일손을 놓게 된 국영장의협회는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사실이다”라는 논평을 냈다. 같은 해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도 의사들 파업이 있었다. 그로 인해 17개의 주요 병원에서 수술 건수가 평소보다 60%가 줄었는데 그 결과 “전체 사망률이 18%나 감소했다”라는 발표가 보고되었다. 의사들 파업이 끝나고 진료가 다시 시작되자 사망률은 다시 파업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40년 동안 진료에 임하고 있는 일본 의사 곤도 마코토는 솔직하게 임상 경험을 고백한 책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에서 말했다. “병원에 자주 갈수록 불필요한 약이나 과잉 진료행위로 오히려 수명이 단축될 수 있다.” 환자를 상품으로 취급하듯 병원 환자를 떠나 파업하는 의료 현실은 병원 위주의 진료가 아닌 진정한 환자 중심의 헌신적인 진료의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2024년 개혁 자유주의자 윤석열 대통령의 의료 개혁에 반발해 일어난 초유의 전공의 집단 사직 ‘의료 파행’은 하루빨리 해결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파행이 역설적으로 상급종합병원, 중형병원(병원·종합병원), 의원으로 이어지는 의료 전달 체계를 정상으로 돌려놓고 있는 점은 하나님 은혜다. 전공의 의존도가 높은 서울 ‘빅5′ 병원 등 상급종합병원들은 수술실 가동률을 절반으로 줄이고 중증·응급 환자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증상이 경미한 환자들은 중형병원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환자가 자연스럽게 ‘분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정상적인 의료 전달 체계 모습이다. 평소 응급실을 찾는 환자의 절반 안팎이 응급실에 올 필요가 없는 경증 환자라고 한다. 전공의 집단 사직이 상급종합병원이 제 역할을 찾게 한 것이다. 대형병원들은 하루빨리 전문의 중심으로 바꾸고 이번 사태가 끝나더라도 중증·응급환자 중심으로 운영해야 한다. 이번에 역할을 재발견한 곳이 전문병원을 비롯한 중형병원이다. 중형병원은 평소에도 전문의 위주로 운영해 전공의들 집단행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번 사태와 관계없이 정상 진료와 수술도 가능하다. 대형병원 수준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는 곳도 많아 대형병원의 공백을 잘 메우고 있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특정 질환이나 진료 과목에 대형병원 수준의 전문성을 갖춘 ‘전문병원’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번 사태로 그동안 빅5 병원에 경증 환자가 지나치게 많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지난 2023년 서울대학교병원 노조는 국립대 병원인 서울대병원이 의료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의사 성과급제를 폐지하고 환자들에게 적정 의료시간을 보장해야 한다며 파업을 단행하였다. 서울대병원이 검사 건수에 따라 수당을 받는 의사성과급제를 도입한 이후 의사들이 환자 한 명 한 명을 제대로 진료하기보다 검사 건수를 늘리는 데 주력해왔고 이에 따라 ‘1분 진료’가 관행처럼 굳어졌다는 것이다.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는 3월 14일 오전 회의를 열어 정부와의 협의체에서 논의할 큰 주제로 보건의료정책 개선, 건강보험체계 개선, 전문성 강화, 기타의료제도 개선 등 네 가지를 정했다고 한다. 의사들 총파업이 추구하는 속뜻을 헤아릴 길이 없지만 의사의 역할인 사회의 공공성을 무시하여 총파업을 빌미로 이윤 추구를 노리고 있다면 국민들은 의료 업계에 냉철하게 등을 돌릴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공공병원으로서 역할을 포기하겠다는 의사협회 자세는 국민의 지탄을 면키 어렵다. 병원 수익금을 늘리기 위해 환자에게 위험하고 불필요한 검사를 하면서 어떻게 ‘신뢰받는 병원’, ‘생명의 미래를 여는 병원’, ‘의료선진화’를 추구하겠다는 것인가. 더 나아가 독일 출신 프랑스의 의사, 음악가, 철학자,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인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년 1월 14일 ~ 1965년 9월 4일)가 실천한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그의 고유한 철학을 본받을 수 있을까. 그는 아프리카 의료 봉사에서 더 나아가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작금의 형태는 핵 소유 북한 도당을 코앞에 두고 있는 대한민국의 의사라면 장기려(張起呂, 1911년 8월 14일 ~ 1995년 12월 25일) 박사의 헌신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당대 최고의 외과 의사였던 백인제 교수의 지도를 받아 외과학에 입문했다. 1936년까지 약 270건의 실험에 바탕한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로 1940년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 12월 한국동란의 혼란 중에 처자를 두고 차남 장가용과 함께 월남하였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가 되었다. 1951년 1월 부산 서구 암남동에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을 무료진료하면서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인술을 베풀었다. 그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외과 의사였지만 평생 낮은 곳에서 청빈한 삶을 살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베푼 사회봉사자였다. 1951년 복음진료소(현재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개설을 시작으로 청십자사회복지회, 장애자재활협회 등 각종 복지단체를 세우고 1976년에는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소외계층과 지역사회의 복지증진에 헌신했다. 일생동안 불우한 이웃을 위해 몸소 사랑을 실천했다. 특히, 가난한 환자를 구제하기 위해 1968년 한국 최초의 사설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해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이자 현행 의료보험제도의 효시를 탄생시켰다. 기독교 신앙에 기반해 65년간 인술을 베풀며 봉사, 박애, 무소유를 실천했으며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자신의 돈으로 수술을 해주고 그마저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밤에 몰래 환자를 탈출시키기도 했다. 평생 의사로 일하면서 그는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겠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평생 자기 집 한 채 가지지 않고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았던 그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서울백병원에서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현재까지 이영춘, 문창모, 안영모, 김찬우, 이태석, 안수현 등과 함께 "한국의 슈바이처"라 칭송되고 있다. 지난 2월 28일 김영태 서울대병원장과 송정한 분당서울대병원장, 이재협 서울시보라매병원장은 이날 소속 전공의 전원에게 이메일로 ‘서울대병원 전공의 여러분께’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보냈다. 이들은 호소문에서 “전공의 여러분, 병원장으로서 저희는 당부드린다”라며 “이제 여러분이 있어야 할 환자 곁으로 돌아와 달라”고 했다. 이어 “여러분의 진심은 충분히 전달이 됐다. 중증·응급 환자와 희소 난치 질환을 가진 환자들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많은 환자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는 돌아와 달라”고 했다. “전공의 여러분의 꿈과 희망은 환자 곁에 있을 때 빛을 발하고 더욱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믿고 있다”라고도 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5-8) 김영배 목사(더굳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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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복음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다. 예수님은 성경에 약속된 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다메섹도상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구원 사건으로 선포했다. 바울은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서 십자가 사건을 구원의 사건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확신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일어났으며 이를 선포하고 기록했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다.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시므로 율법을 다 이루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해방 시켜 주셨다. 역사적으로 예수의 율법 요구를 준수하는 것과 관련하여 많은 논의와 토론이 있었다. 소위 예수의 율법 준수를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피동적 순종이라고 했다. 예수의 율법 준수로 의를 획득하여 우리에게 전가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영생을 얻었다는 주장은 배척받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우리의 죄값을 다 치르시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영생이 임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여(빌 2:8) 그의 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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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105주년 기념] 1919년 삼일운동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역사학계(민경배, 서정민)에서는 일제강점기의 각 시대별 관계 구도에서 제1기 : 선교사와 일제의 제휴-한국기독교 배타시기(1905- 1919), 제2기 : 선교사와 한국교회의 제휴-일제 배타 시기(1919- 1938), 제3기 : 일제와 한국교회의 제휴-선교사 배타 시기(1938- 1945) 등으로 구분하였다. 치열했던 과거 한국과 한국교회 역사는 한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소용돌이치는 역사였다. 그 역사 한 중앙에 교회가 있었다. 1919년 삼일운동은 일제에 의해 잃어버린 나라의 국운을 되찾기 위한 목숨을 건 일제에 저항운동이었다. 1910년 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한국은 일제의 무력통치로 독립을 시도하지 못하자 독립에 뜻을 품은 이들은 해외로 나가 독립을 모색했다. 대표적인 움직임이 미국과 중국 러시아연해주 등지에서 일어났으며 미국에서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조직되었다. 대한인국민회가 벌인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 1908년 친일파인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었다. 통감부 고문관이었던 스티븐스는 친일 반한 성향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에 도착하자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는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여 미국에 있는 한국교민들에게 분노가 일어나게 하였다. 그는 한국인을 향해 ‘한국은 독립을 유지할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일본이 아니었으면 한국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였다. 이에 장인환과 전명운은 스티븐스를 제거하기로 결의하고 스티븐스가 오클랜드 항구에 도착했을 때, 정명운이 권총을 쏘았으나 불발이었다. 다시 장인환이 권총을 발사하여 스티븐스를 쓰러트렸다. 결국 스티븐스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었다. 국내에서는 한일병탄으로 울분으로 통탄하며 많은 이들이 교회로 찾았다. 이들은 자주성과 자존성을 되찾으려는 새로운 힘을 얻으려 했고 민족애에 대한 새로운 구국운동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일제는 이러한 교회와 기독교를 일본의 식민통치를 위협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위협감을 느꼈다.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된 후에 그들이 중심이 된 ‘신민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서는 신문, 잡지, 서적을 통하여 백성들을 일깨웠고 국외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에 대비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한 애국사상을 바탕으로 했고 독립운동단체로 한국 유일의 비밀 결사대였다. 민족학교로 알려진 평양 숭실학교, 대성학교, 선천 신성학교, 정주 오선학교, 정주 선천교회는 반일감정과 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신민회와 항일운동에 적극 하였다. 엄청난 성장과 반일감정에 대해 일제는 교회와 기독교가 식민지지배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다. 민족운동 교육에 앞장선 선천 신성학교와 강제로 해산된 독립협회의 지도자들이 조직한 신민회야말로 일본에게는 기독교와 더불어 식민통치를 방해하는 상당한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105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일제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을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반일 세력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세웠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11년에 일어난 105인 사건으로 알려진 ‘데라우치총독모살미수사건’이다. 일제는 전혀 있지도 않은 데라우치 총독 살해 음모사건을 날조하여 반일 세력 수백 명을 체포했다. 체포된 123명을 기소했고 그 중 98명이 기독교인이었다. 98명 중 장로교인은 89명이었고 그 중에 88명이 서북지방인 선천과 평양지역 출신이었다. 이 사건은 합법을 가장한 불법 재판, 국내 반일민족세력, 신민회, 서북 출신 기독교 제도자를 제거하려는 음모의 사건이었다. 특히 이 사건으로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 된 후 신민회를 조직하여 여기에 참여한 인사들을 말살하려는 음모였다. 105인 사건 관련자들이 대거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이 발흥할 때 장로교만 아니라 이들 지역의 감리교 지도자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1919년 삼일운동은 처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하여 빠른 속도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삼일운동이 어느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지역과 신분과 연령을 초월하여 한국인들 모두가 참여하는 거국적이고 거민족적인 운동이었다.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3.1운동으로 인해 7,509명이 사망했고, 46,306명이 투옥되었다.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내용이 국내에 전달되었고 국내에서는 학생과 모든 종교계 인사들로 하는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이 결의되자 일은 빠르게 발전되었다. 2019년 2월 18일까지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었고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통고서도 작성되었다. 2월 27일에는 이미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고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적국으로 배포되었다. 학생들은 군중 동원 방법과 시위 방향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전국적인 배포 등의 계획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지도자들은 시위 날짜를 3월 2일로 다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날이 주일(일요일)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측에서 반대하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결정한 날짜는 또 다시 하루가 앞 당겨진 3월 1일로 결정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가 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였다. 원래 계획에는 학생들과 함께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긴급하게 열린 전날 밤 회의를 통해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 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자신들은 따로 태화관에서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태화관에 모인 종교지도자들은 한용운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일제 경찰에게 자신들이 독립선언을 하였다고 자진해서 알렸다. 이를 보고받은 일제 경찰은 기다렸다가 이들을 연행하여 체포하였다. 이 시간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오기만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자 할 수없이 모인 시민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고종의 장례식 참관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지역 사람들은 자연스레 3.1운동을 목격 하게 되었고, 살포된 인쇄물을 몰래 주워 자기들의 지역으로 돌아갔다. 다음날인 3월 2일 정오가 되자 서울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한 종로거리에 400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종로경찰서를 향하여 나갔다. 일제경찰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약 20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다수는 노동자였고, 여러 명의 학생들이 함께 하였던 시위였다. 드디어 3월 5일 서울역 앞에서 학생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오전 8시부터 각 학교 학생들이 서울역 앞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시민들이 함께 모여들기 시작했다. 9시경에 이르자 이들 모임은 수만 명의 대군중을 이루었다. 이 때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인력을 타고 등장했다. 연희전문학교생 강기덕이 나타나 ‘조선독립’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높게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를 계기로 모였던 수만의 군중이 호응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시위는 2일에는 함흥, 해주, 수안, 강서 등으로 번져나갔다. 3일에는 예산과 개성, 곡산과 통천 등으로 확산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3월20일부터 4월9일까지 지속된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절정에 달했다. 곳곳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은 학교와 교회, 천도교의 종교시설을 근거지로 하여 시위를 펼쳐 나갔다. 농민들은 마을과 장터를 근거지로 하여 시위를 벌였고 이것을 본 시민들과 노동자층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한국에는 5일장이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이때는 인근 도시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장터에 모인다. 장터는 일부러 사람들을 모으려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기회였다. 지역의 만세운동은 주로 장터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이러한 역사 가운데 한국의 교회를 관리감독하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미국 선교사들과 함께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디. 이런 가운데 1919년 삼일운동 직전 해에 제7회 총회가 열렸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7회 총회(2018. 8. 31)에서 김선두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부총회장은 창립 독노회에서 노회장이었던 마포삼열 목사가 부총회장이 되었다. 이듬해인 제8회 총회(2019. 10. 4)가 평양부선문밖교회에서 소집되었다. 이때 “회장이 미참”하여 마포삼열 선교사가 개회를 공포했다. 회장의 서간 낭독 : 회장[총회장] 김선두 씨가 본년 3월1일에 조선 독립사건으로 경성대문감옥에 수금되어 본 총회로 보낸 편지에 문암함과 축복함과 회장 직무를 부회장 마포삼열 씨에게 위임한 말씀을 서기가 낭독하매 회중이 슬픈마음으로 받고 부회장이 회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다. 제8회 총회에 보고한 평남노회는 평양부시찰 보고에서 길선주 목사와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경성 감옥에 구금되어 예심중에 있다고 보고했다(제8회 총회록, 2019, 86) 김선두(金善斗, 1876~1949) 목사는 평안남도 평양 출생,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길선주 목사가 시무하는 장대현교회 장로로 임직하였으며, 1909년 장로로서 평양 서문밖교회 목회를 하면서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1913년에 졸업(제6회)하였다. 곧이어 평양 서문밖교회의 청빙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김선두 목사는 총회장 재임 시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삼일독립만세운동을 직접 지휘하였으며, 독립만세 주모자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선교사들은 가석방이라도 얻어 그가 총회를 개회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9월 초에 모이는 총회를 1개월 늦추어 10월 초에 개회하기로 공고되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해방을 맞자 그는 곧 월남하여 박형룡 박사와 함께 서울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재건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평양의 만세시위는 일경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3월 2일부터 3월 5일까지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일제 헌병 경찰은 3월 2일 새벽부터 주동자 체포에 들어갔으며, 3월 8일까지 검거한 인원수만 해도 400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 154명은 태형 혹은 즉결로 처분하고, 주동자로 여긴 48명은 기소하기 위해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겼다. 이날 평양 숭덕학교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에는 모펫(S. A. Moffett), 모우리(E. M. Mowry), 번하이젤(C. F. Bernheisel) 등 네 명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가 참관하였다. 그중 한 사람인 번하이젤(한국이름, 편하설 선교사)은 이날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이날은 이 나라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날이다. 전 대한제국 황제 이태왕(李太王, 고종)이 최근에 죽었으며, 모레는 장례식 날로 예정되었다. 그 장례식은 일본제국의 황족의 자격으로, 국장(國葬)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그 장례식은 신도의식(神道儀式)에 따라 엄수되어질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에 매우 분노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장례식이 자기 나라 의식에 따라 치러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례식 때에 서울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많은 소문이 떠돌고 있다. 고(故) 고종 황제를 애도하는 봉도회(奉悼會)가 이 도시에서 열릴 것이라고 며칠 전에 발표되었다. 한 모임은 숭덕학교(기독교계 남학교), 다른 모임은 감리교회, 그리고 세 번째 모임은 천도교 본부에서 각각 열릴 것이다. 천도교는 전국에 널리 퍼져있는 반(半) 종교적이고, 반(半) 정치적인 조직이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요 며칠 동안 분명히 억누른 흥분이 감돌고 있고, 우리는 그때에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 B(S. A. Moffett) 씨와 C(E. M. Mowry) 씨, 그리고 나(C. F. Bernheisel)는 그 모임에 직접 참가해서 우리 눈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기로 했다. AA(선천)의 F(S. L. Roberts) 씨도 후에 늦게 와서 운동장 뒷켠에 서 있었다. 운동장은 3,000명의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는 아주 앞쪽의 한쪽 열 옆으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모든 교회학교와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참석했다. 입구 정면에는 강단이 있었고, 그 주위와 뒤에는 몇몇 목사들과 이 도시의 장로교 임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에는 제5교회(서문외교회)의 목사이며 장로회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4교회(산정현교회)의 강규찬 목사는 이미 고종황제의 생애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친 후 김선두 목사는 이제 송영가를 부르고 축도를 하며 봉도회를 마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다음 순서가 남았으니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어 달라고 말했다. 축도를 한 후, 김선두 목사는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로마서 9장 3절의 두 성경 본문을 봉독했다. 그가 이 말씀을 엄숙하게 읽는 것을 볼 때, 심각한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4교회(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는 정일선이 연단에 올라서서, 읽어서 알려드려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이 그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날이며,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읽지 않고는 못배기겠다고 말했다. 청중들은 굉장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사실상 한국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낭독이 끝나자, 한 사람이 올라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것을 설명했다. 불법적인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모두 주어진 지시에 따를 것이며, 관헌에게 저항하지 말고 일본인 관리나 민간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강규찬 목사가 민족 독립에 대한 연설을 했다. 연설이 끝날 때 즈음에 몇 사람이 태극기를 한 아름씩 건물에서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커다란 태극기 하나가 연단에 걸리자,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태극기가 물결쳤다. 그러고서 우리 모두가 대열을 지어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자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한국교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2024년 시대 속에서 나라와 민족과는 별개의 선교운동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함께 가야하는 공동운명체인가? 정교분리의 원칙은 교회가 국가와 분리된 선교 정책을 펼치는 것인가?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2024년 4월 10일은 총선이 있는 날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국회의원 300명을 선출한다. 어떤 국회원의원을 선출해야 하는가? 아니면 교회는 이러한 민주적 절차의 행위에 무관심 해야 하고,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하는가?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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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구약성경예수님은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고 하셨다(요 5:46-47). 2천 년 교회사 가운데 가장 치열한 논쟁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기독교(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신구약 성경을 해석한다. 여기서 ‘중심’ 개념은 삼위 하나님 가운데 그리스도만을 강조하는 그리스도 일원론 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과 구원을 계시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 중심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46-47절에서 모세가 예수님 자신에 관해 기록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 후 말씀하신 내용인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 24:44)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45) 라고 말씀한다. 오경을 모세가 기록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모세의 율법’이 예수님 자신에 관한 기록이라고 한다. 모세오경을 비롯한 구약성경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해야 함을 말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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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주관적인 정치적 신념의 극단적 행동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흉기로 습격한 피의자 김모(67) 씨는 경찰 조사에서 “이 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김 씨가 주관적인 정치적 신념으로 극단적 범행을 저질렀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부산경찰청 수사본부는 10일 이 대표의 ‘부산 흉기 피습’ 사건에 대한 최종 수사 결과 브리핑에서 이같이 발표했다. 여기 “주관적인 정치적 신념으로 극단적 범행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시선을 끈다. ‘주관적인 정치적 신념’, ‘극단적인 범행’ 등은 교회와 노회, 총회 등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객관적 진실이나 근거 없이 주관적인 판단으로 고집과 아집으로 접근한다. 자기만의 견해나 관점에 기초하는 주관적 행위는 주변을 힘들게 한다. 이러한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따른 가치관, 정치적 신념으로 객관적 판단, 법리적인 판단을 함몰시켜 버린다. 그 결과 극단적인 언어와 행동은 자기 의로움으로 내세운다. 자신도 돈 봉투를 돌려 당선되었으면서 다른 사람의 돈 봉투를 정죄한다. 자신부터 회개하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의 잘못은 선반에 올려놓고 오로지 자신의 주관적 정치적 신념은 또 다른 형태의 극단적인 언어와 행위들을 경계해야 한다. 교회, 노회, 총회에서 봉사하는 주의 종들은 자기 고집과 아집의 주관적인 정치적 신념으로 구성원들을 피곤하지 않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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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자기반성설교자의 일차적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소개하는 일이다. 이는 성경이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고안해서 만들어낸 막연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이여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다. 이러한 믿음이 전제될 때 그리스도교가 성립된다. 설교자는 성경을 원천으로 하여 설교를 한다. 그 설교는 결국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소개하는 것이 일차적인 임무다. 이러한 임무를 소홀히 할 때 그 설교는 설교로서 기능이 상실된다. 설교자가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성경 구절을 제시하는 형식의 설교 유혹을 받는다. 성경은 성경 스스로가 입증한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임을 성경이 스스로 입증한다. 이 입증이 권위가 있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천 년 기독교 역사는 이 성경을 특별계시로 접근하면서 신적 권위와 그 권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성육신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체계화 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모든 성경”을 포함한다. 모든 성경, 즉 구약과 신약인 66권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는 그리스도교, 즉 기독교에서만 가능한 진리이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유일한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를 대신하고 우리 모두를 대표한 대속의 죽음이었다. 이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이다. 여기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가 성립된다. 이러한 세 가지 교리, 즉 삼위일체, 성육신, 이신칭의 교리는 성경의 핵심 내용이며, 이는 오직 그리스도교에서만 가능한 교리이다. 신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유대교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우리가 말하는 구약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이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율법의 행위로 주어진다고 믿는다. 유대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 인간으로서 선지자일 뿐이다. 그는 한 인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하나님의 계시자 등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구원관 역시 모세율법을 지켜야 구원이 임한다고 주장한다. 즉 행위 구원을 주장한다. 어떠한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구원이 달라지는데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신지식을 부인하고 거부한다.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복음에 근거하면 유대교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유대교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교(기독교)는 구원이 없다. 이는 특별계시인 성경과 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되 어떠한 하나님, 어떻게 계시된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구원관이 달라진다. 설교자는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이 있다. 본문 없이 설교하는 경우는 없다. 모든 설교자는 성경 본문을 읽고 그 본문을 통해서 설교한다. 설교자의 강박관념은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오직 청중들을 설득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성도의 실천적 행위를 강조한다. 그래서 언제나 설교는 세상적인 이야기, 교훈적이고 도덕 윤리적이고 훈계식이다. 물론 설교는 이런 요소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오직 이런 것으로만 설교가 구성되어 있다면 문제가 된다. 여기서 필자가 제한하는 것은 설교자는 먼저 청중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실천적 행위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으로 소개(계시)되고 있는가”라는데 초점을 맞추어 보자는 것이다. 첫째, 본문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이야기하기 위해 본문이 속한 각 권을 살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 더 넓게는 본문이 구약성경일 경우, 구약성경 전체를 살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셋째,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 속에서 살펴야 한다. 넷째, 본문이 신약성경일 경우, 신약성경 전체 속에서 살펴야 한다. 다섯째, 구약성경 전체 속에서 살펴야 한다. 이러한 설교를 위해 신구약 성경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성경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에 관해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본문에 등장한 다양한 인물, 사건, 역사 등을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이 부분을 청중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을 간단명료하게 해야 한다. 설교자도 이해하지 못한 이야기를 청중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설교에서 적용은 두 번째 이야기이다. 먼저 본문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전후 문맥과 맥락, 각 권과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면서 핵심적인 내용을 설명해 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는 설교자의 성경 해석에 대한 일차적인 책무이다. 이 부분을 바르게 수행하지 못하면 설교자로서 그 직무를 바르게 수행하지 못한다. 이런 부분을 무시한 설교는 설교자가 아니어도 설교를 흉내 낼 수 있다. 설교자가 아니어도 일반 신도들도 설교를 흉내 낼 수 있다. 설교자가 많은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장점이다. 그러나 많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알고 있는 것을 성도들의 수준에 맞게 쉽게, 이해되도록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핵심을 요약해서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점정리’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런 요점정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학습해 왔다. 대화를 나눌 때 핵심적인 요점이 중요한 것과 같이 설교할 때 본문의 내용의 핵심적인 요점을 청중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할 경우, 일차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는가? 그것은 청중들이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알게 되고 믿게 된다. 이러한 믿음은 내적 변화를 일으킨다. 물론 이는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에 관해 소개를 받을 때 성령께서 설교를 듣는 자들을 감동하게 한다. 내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면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셔서 성도들의 감동과 내적 결심과 결단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으며(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엡 6:17)이다. 성령의 검인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말씀을 증거하면 성령께서 듣는 청중들의 삶을 변화할 수 있도록 적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소개한 후 구체적으로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가?" 구체적인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본문의 모범적인 교훈을 통해 성도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설교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특별한 자신의 의도된 목적을 위해 강연 형식의 이야기를 한 후 마지못해 성경 본문을 인용하는 식의 설교는 2천 년 교회 역사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교회 최대의 위기는 이 문제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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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 하나님 중심, 룻기서의 구속사적 이해룻기서는 구약성경에 포함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룻이라는 이방 여인과 유다인 보아스가 결혼하여 오벳을 낳았다. 그 오벳이 바로 다윗의 조부요, 이새의 아버지였다. 오벳(עוֹבֵד)이란 이름은 ‘섬기는 자(예배자)’란 의미이다. 에스더서는 유다인 가운데 에스더라는 여인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면, 룻기서는 이방인 룻이라는 여인을 중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윗의 조부인 오벳이 태어나기까지 극적인 이야기가 룻기서에 펼쳐진다. 그 극적인 이야기는 유다 땅에 살던 유다인 중 엘리멜렉과 그 아내 나오미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그 부부에게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이 있었다. 룻기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룻 1:1) 룻기서는 의도된 목적인 보아스와 결혼할 룻이라는 여인을 위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전개된다. 이 이야기를 위해 엘리멜렉과 나오미라는 한 가족의 이야기가 동원된다. 그 가족이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내려간다. 모압은 언약 밖의 사람들이 사는 땅이다. 룻기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룻기서를 시작하면서 예루살렘 흉년 이야기와 더불어 엘리멜렉 가족이 모압으로 내려간 사건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 사건은 특별한 룻기서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관심을 두기에 충분하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다양한 사건을 접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다양한 사건은 그 사건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즉 그 사건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이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 사건을 통한 하나님 계시, 즉 하나님의 의도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지 않고는 그 사건을 바르게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룻기서 초반부에서 보여준 이 사건의 의도된 목적은 다음 두 가지로 말 할 수 있다. 첫째는 모압에서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죽는 일이요, 둘째는 죽은 아들의 남편이었던 룻이라는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얻는 일이다. 룻기서 저자는 이 두 사건을 룻기서의 의도된 목적을 위해 활용하고 있다. 그 핵심적인 이야기는 모압 여인 룻을 예루살렘에 사는 보아스와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룻기서에서 확인해야 하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 일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과 구속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 계시 때문이다. 모 앞 땅에 방문하여 완전히 망해버린 나오미를 따라 유다 땅 예루살렘에 따라온 모압여인 룻이 있었다. 이 룻은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의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 당시 독특한 문화인 ‘기업무를 자(고엘)’를 통해 가능한 일이었다. 이 기업무를 자란 룻을 보아스와 연결하는 방편으로 동원된다. 기업무를 자인 고엘 제도가 룻기에서는 의도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동원된다. 이는 곧 보아스와 룻을 맺어주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룻기서의 의도된 핵심 내용이 왜, 무엇 때문에 보아스와 룻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룻기서가 기록된 배경인 사사시대 이전인 창세기에서부터 이후 신약 성경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더 정확히 표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와 같은 답변은 성경신학에서 신구약 성경의 ‘유기적 통일성’이라 주제로 다룬다. 창세기에서부터 발아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씨앗이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고 있다. 룻기서는 룻기에서만 안주하여 해석하고 설명하면 안 된다. 룻기서 이야기는 신구약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살펴야 한다. 즉 신구약 성경 전체 중에서 한 부분인 룻기서를 다루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인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역사, 구속 경륜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된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기 전에 결혼했는지 결혼을 했다면 아들이 있었는지는 침묵하고 있다. 아들이 있다는 기록이 없다. 룻기서 저자는 아들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마치 히스기야가 15년 생명 연장을 받기 전에 아들을 언급하지 않고 이 기간에 아들 므낫세를 낳아 정통성을 잇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보아스의 어머니는 라합이다. 여호수아 시대에 언급된 기생 라합이다. 여호수아에서 기생 라합의 믿음과 그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관해 자세하게 기록된다. 그러나 그가 누구와 결혼을 하였는가? 그리고 그가 낳은 아들은 누구인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여호수아서와 룻기서에는 이러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신약성경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보아스의 어머니가 라합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 1:5-6) 기생이었던 라합의 남편이 살몬이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아스의 아버지는 살몬이고 그의 어머니는 라합인 셈이다. 이 보아스는 다윗의 고조할아버지가 된다. 결국 이 족보는 예수님의 족보이다. 이 이야기는 룻기에서 왜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가 강조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룻기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이제 룻기에서 어떻게 보아스와 룻이 관계를 맺게 되는지 룻기서의 재판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룻기 4:1) 여기 보면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라고 말한다. 고대의 성문 어귀에는 대체로 넓은 장소로 이곳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다. 이곳은 성읍의 대표들, 특히 장로들이 백성들을 만나고 율법상의 판결을 내리던 곳으로 이용되던 장소였다(신 21:19, 수 20:4). 성읍의 유력한 자만이 성문 어귀에 있는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이처럼 성문은 성읍 백성들에게 있어서 사회·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갔다는 사실은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율법상의 판결을 받기 위함이 틀림없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 앉아 있을 때,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갔다. 여기 '마침'이란 히브리어로 ‘힌네’인데, ‘보라’, ‘자’, ‘드디어’라는 의미가 있다. 드리어 첫 번째 고엘이 광장을 가로질러 보아스가 앉아 있는 곳으로 왔다. 이 사람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아무개여’라고 말한다. 그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룻의 미래가 결정된다. 보아스는 재판을 위해 예루살렘 장로 10명을 불렀다.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룻 4:2) 보아스는 장로 10인을 불러 각자 앉을 자리를 배정하여 준다. 이 재판은 엘리멜렉 집안을 책임질 고엘을 선정하는 재판이었다. 재판 안건은 4:3절에 기록된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룻 4:3) 보아스는 재판을 시작한다. 첫 번째 고엘에게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레위기 25:23-28절에 따라 엘리멜렉의 유가족을 위해 첫 번째 고엘에게 그 땅값을 대신 지불해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이행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그러나 4:4절에 의하면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라고 한다. 여기 히브리어 고엘이란 ‘되 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라는 뜻인데 아무개는 고엘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힌다. 이미 보아스는 그 아무개에게 “당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라는 분명한 의사를 표명한다. 그러자 그 아무개는 자신은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한다. 즉 첫째 고엘은 고엘 의무행사를 포기한다. 그러나 첫째 고엘 의무자가 자신의 의무행사를 포기하자 서열로 두 번째 고엘인 보아스가 고엘 의무행사를 이행한다. 고엘 의무를 양도받은 보아스는 이를 정확히 해 두기 위해 9절에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라고 한다. 두 번째 안건을 위해 증인을 세운다. 10절에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라고 한다. 이제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엘리멜렉의 데를 이어주는 고엘 의무행사에 증인을 내세우고 있다. 재산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주기 위해 고엘 의무책임자로 보아스가 확정되어 대를 잇지 못하고 죽은 엘리멜렉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고엘 의무행사를 확정한다. 재판이 끝나자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축복한다. 11절에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라고 한다. 12절에서는 보아스의 집이 베레스의 집과 같이 되기를 축복한다. 12절에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라고 한다. 베레스에 관해 설명하기를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아들이라고 한다. 다말과 유다의 관계 역시 ‘기업물을 자’인 ‘고엘’에 의해 베레스를 낳아 대를 잇는 것과 같은 개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고엘 제도를 통해 대를 잇게 하여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부터 약속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그 약속은 결국 하나님의 구속이며, 그 구속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룻기서는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구속의 역사를 보여준 하나님의 말씀이다. 룻기서의 해석과 적용의 원리 화란에서 제기된 구속사 설교에서 적용은 별도의 독립된 주제가 아니었다. 본문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면 자동으로, 즉 성령의 역사로 적용이 이루어진다는 논지였다. 구태여 본문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한 후 별도로 적용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속사 설교는 마치 신학 강의와 같다는 평가가 있어 왔다. 본문 해석과 적용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한 결과였다. 그러나 설교의 역사에서 본문 해석과 적용은 설교의 주요 요건이기도 했다. 본문을 해석할 때는 삼위 하나님 중심 개념을 활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본문의 전후 문맥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살핀 후 저자의 의도, 즉 본문을 통한 하나님 계시의 의도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을 적용적으로 설명한 것이 먼저가 아니라 종합적으로 살펴서 본문을 통한 계시의 의도를 해설한 후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 적용적으로 설명함은 물론 삶의 현장에 적용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설교가 본문 설명만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또란 적용중심적으로만 해서도 안 된다. 본문 설명과 적용을 균형있게 해야 한다. 룻기서 본문을 종합적으로 살핀 후 본문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더불어 신구약 성경의 유기적 통일성에 의한 삼위 하나님 중심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는 룻기서는 성경 66권 전체 가운데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 후 본문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할 때에 본문의 사건을 적용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형식논리에 따르면 룻기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적용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물론 전제는 본문을 종합적으로 설명한 후 이루어져야 한다. 본문의 의미 분석 없이 적용적 설명으로만 설교할 경우, 이는 한계가 있다. 이런 형식은 주로 큐티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그러나 설교는 이런 개념을 초월해야 한다. 하나님은 룻기서의 다양한 사건을 통해 구속의 역사를 진행해 가신다. 그러한 진행 과정에서 동원된 다양한 사건과 이야기들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것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 엘리멜렉의 한 가정이 예루살렘의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내려간 사건, 그곳에서 가장과 두 아들이 죽는 사건 등을 통한 아기자기한 삶의 이야기를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 적용적으로 설명하는 일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룻기서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계시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어여 한다. 신학교 강의실에서 구속에 관한 신학적 강의와 같은 설교를 한다면 이 역시 한계가 있다. 룻기서에서 강조한 하나님 계시의 핵심적 진리를 설명할 때 본문 사건과 모범적 행위들을 통해 설명하면서 적용하는 일은 구속사적 설교에서 매우 중요한 전제 요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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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여성 목사후보생, 강도사고시 시행 철회(예장합동)(리폼드뉴스) 조직신학으로 유명한 루이스 벌코프가 교수로 있던 미국의 칼빈신학교의 교단인 북미기독교개혁교회(CRC) 총회가 2007년 교회 직분을 남자로 제한한 헌법 규정에서 남자를 삭제했다. 여성에게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을 금하는 규정으로 남아있던 법적 근거를 최종 제거한 것이다. 이에 앞서 1995년 CRC가 여성안수를 허용하는 여지를 마련하자 보수적인 정통장로교회(OPC)와 미국장로교회(PCA)는 이 교단과의 교류를 단절한다고 선언했고, 북미지역 보수정통 개혁주의 교회를 표방하는 북미개혁‧장로교회연합(NAPARC)은 이 교단의 회원 자격을 박탈했다. 그리고 이 교단의 적지 않은 교인들이 교단의 여성안수 허용 정책에 반발해 다른 교단으로 적으로 옮겼다. 2017년 6월 네덜란드 개혁교회 해방파(과거 스킬더 박사와 그의 지지자들이 네덜란드 개혁교회교단에서 추방되어 세운 31조파로 우리나라의 고신교단과 자매관계를 맺고 있다)가 목사, 장로에 대한 여성 임직을 결정했다. 이에 동년 7월 ICRC 총회는 해방파의 회원권을 정지했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남침례교 소속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가 여성 안수와 여자목사를 세운 것에 대해 남침례교단은 지난 2월 릭 워렌 목사를 제명했다. 이에 대해 릭 워렌 목사는 항소를 했으나 지난 6월 19일 뉴올리언스에서 개회한 2023년 남침례교(SBC) 연례회의에서 거부당했다. 이 결정들을 보면서 과연 우리 교단은 어떤 결정을 할 것인가 두려운 마음으로 총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107회기 여성사역자지위향상및사역개뱔위원회 임원들 - 이들은 누구인가를 기억하자. 이런 안을 제108회 총회에 내놓은 위원들은 본 교단 목사인가? 총회의 결정 드디어 역사적으로 기념이 될 제108회 총회가 대전 새로남교회(담임: 오정호 목사)에서 개회되었다. 전국교회는 108회 총회를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다. 그런데 둘째날 오후 회무에서 여성사역자지위향상 및 사역개발위원회는 위원회의 상설위원회 변경과 목사후보생 고시 및 강도사 고시 응시 자격 허락을 청원하였다. 위원회 서기 유홍선 목사는 “여성 준목 제도 활성화를 위해서는 여성 안수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여성사역자들이 준목 제도에 준하는 위치까지 올라가기 위해 안수를 하지 않아도 올라갈 수 있는 직위까지 올려서 여성사역자들의 인적 유출을 막고, 당회가 관리하던 여성사역자가 노회가 관리할 수 있도록 목사후보생 고시 및 강도사고시 응시 자격까지는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총회장 오정호 목사는 “강도사는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격”이라며 여성 강도사 자격 허락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여성 목사후보생 고시 및 강도사 고시 응시 자격을 주는 것으로 통과되었다. 지난해 10월 13일 총신대 신대원은 경건훈련원 주관으로 호스피스 전문 강사를 초청해 세미나를 열었는데, 세미나를 마치면서 여성인 K목사가 축도를 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 결국 총신대 신대원에서는 징계위원회까지 구성됐다. 지난 6월 23일 오전 11시 예장합동총회회관에서 여성사역자지위향상 및 사역개발위원회가 주최한 여성사역자 지위 향상을 위한 공청회에서 이광우 목사는 예수님이 12사도를 남성으로 세운 이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 성경에서 나온 “형제들아”등 여성안수 논쟁에 있는 성경구절들을 설명하면서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또한 “교단이 여성안수를 정말로 반대한다면 총신대 재단이사회 여성이사 3명에 대한 정관 개정, 여전도사를 없애는 등 일관성 있는 실천적 행동을 해야한다”며 여성안수를 주장했다. 제107회 총회 여성사역자지위향상 및 사역개발위원회는 “지난 2023년 5월 8일부터 6월 22일까지 목장기도회 및 총신신대원 홈커밍 행사 때 참여한 목사 및 장로 205명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에 의하면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것에 있어 찬성 73.6% 반대 24.3%로 나타났다.”고 했다. 108회 총회에서 여성 목사후보생 및 강도사 고시 시행이 통과되자 전주 예수비전교회 이국진 목사 자신의 SNS에 “합동교단에서 여성 강도사가 되는 길이 열렸다.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은 없었다고 한다.”며 “강도할 수 있다면, 이제 목사로 임직하는 길이 멀지 않아 보인다.” 환영의 뜻을 밝혔다. 총회 결정에 대한 충격 그러나 고신측 이광호 목사는 21일 자신의 SNS에 “시대적 풍조, 교회를 이겼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여성 강도사 허락한 한국 최대 교단 합동측 보수교단 개혁주의 신학 앞세운 교단 아니던가. 여성목사 제도 수용 위한 '멋진 길' 깔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어서 “통합, 기장측 오래전 수용한 여성목사 제도, 이럴 거면 그때 왜 극심한 비판 가했는가. 저들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 동반돼야 한다.”고 했다. 기독신문에는 비판의 댓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여성 안수의 수순이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잘도 그러겠습니다.” “108회 총회를 기점으로 이전을 (구)총신 108회 이후를 (현)총신이라 부른다. (구)총신을 개혁주의라 부르며 (현)총신을 복음주의라 칭한다.” “준목에 한하는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해 목사 후보생 고시 및 강도사 시험권을 부여한 일은 통탄할 일이다.” “총회는 바라는대로 여성 안수를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준하는 신학적 오류를 범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적이지는 않았으나 더 이상 개혁주의적이지도 않기에 복음주의 교단이라 칭한다.” “이제 개혁신학의 바른 신학을 아는 남성들은 신대원에 목회자 M.Div를 지원하지 않거나 교단을 떠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총회가 좌경화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왜 백석, 통합이나 자유주의 교단을 따라하는가? 교단에서 여성 사역자가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두려운 일인가? 아니면 신학을 무시한 채 하나님 말씀에 등을 돌리는 것이 더 두려운 일 아닌가?” “준목에 해당하는 지위 향상은 “목사는 아니지만 목사처럼 대우하겠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목사는 아니지만(신학에 있어서 안수를 할 수는 없지만) 목사처럼 대우하고 싶다.(그런 처우 개선을 하겠다.) 하지만 모든 죄악은 미묘하고도 교묘한 틈에서 시작되었다. 안수를 허락하는 발판은 아니라지만, 목사의 직위를 바라 볼 수 있는 기회를.” 교단의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까지 우리 교단이 믿고 지켜온 성경과 개혁신학이 틀렸다는 말인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시대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면 진리가 아닌 것이다. 재론동의를 발의하는 임종구 목사 총회의 재론 그런데 총회 마지막 날(21일) 신학부 임종구 목사는 "신학부, 여성사역향상위원회, 규칙부, 헌법개정위원회, 총회 임원회등이 모여 회의를 하였다. 여성 안수는 성경과 신학, 헌법에 불가한 것이며, 강도사 고시는 목사가 되는길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가지고 심도 있게 토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여성사역자 지위향상이라고 하면 계급구조에서 하급이라고 여길 오해가 있어 수정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했다. 임 목사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보고하였다